지난 10월 27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작전 지시하는 유상철 감독.

지난 10월 27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작전 지시하는 유상철 감독. ⓒ 연합뉴스

 
췌장암 투병 중인 유상철 감독이 프로축구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2일 인천 유나이티드는 보도자료를 통해 "췌장암 투병 중인 유상철 감독이 지난 12월 28일 구단 측에 사의를 표했다"며 "고심 끝에 유 감독의 선택을 존중하고, 동행을 마무리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인천은 유상철 감독을 '명예 감독'으로 선임하는 한편 앞으로도 치료를 위한 지원과 예우를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2002 한일월드컵의 영웅 유상철 감독은 지난해 5월 성적부진으로 물러난 욘 안데르센 감독의 후임으로 인천에 부임했다. 하지만 10월 췌장암 4기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축구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건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유상철 감독은 특유의 강한 책임감과 의지를 드러내며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투병중인 유 감독의 투혼은 인천에도 강한 자극제가 되어 위기의 선수단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인천은 결국 최종순위 10위(7승 13무 18패, 승점 34)로 1부 잔류에 성공하며 다시 한번 '생존왕'의 면모를 과시했다.

특히 잔류가 확정되는 순간 인천 선수단이 유상철 감독을 둘러싸고 헹가래를 치던 모습과, 인천 응원단이 '두 번째 약속도 지켜줘(인천의 1부리그 잔류에 이어, 암을 이겨내겠다는 약속도 지켜달라는 의미)'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유 감독의 쾌유를 기원하던 장면은 2019년 프로축구에도 감동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유 감독의 축구인생에서도 유난히 뜻깊었던 순간이었다. 사실 유감독은 화려한 현역 시절에 비해, 지도자로서의 인생은 평탄하지 못했다. K리그에서 대전과 전남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인천 감독을 맡기 전 한 인터뷰에서 "실패한 감독으로만 기억될까 두렵다"는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낸 일도 있었다.

더구나 투병 소식이 밝혀진 상황에서 계속 지휘봉을 유지한다는 것은 유 감독에게나 인천에게나 엄청난 모험이었다. 물론 유 감독은 순수하게 팀에 대한 책임감으로 내린 결정이지만 만에 하나 인천이 강등되는 사태라도 벌어졌다면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수도 있었다. 인천 구단도 유 감독이 지휘봉에 강렬한 의지를 보이는 상황에서 억지로 물러나게 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지만, 만일 유상철호의 최종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유상철 감독과 인천의 동행은 서로에게 최선의 해피엔딩으로 마감했다. 시즌 중반에 소방수로 투입되어 투병의 고난 속에서도 인천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유상철 감독의 지도자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매년 강등권을 전전하는 성적으로 '감독들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던 인천도 유 감독을 끝까지 믿고 신뢰해 준 덕분에 1부 리그 잔류와 구단 이미지 상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24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남자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와 상주 상무 프로축구단의 경기. 유상철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경기장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24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남자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와 상주 상무 프로축구단의 경기. 유상철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경기장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유상철 감독과 인천은 다시 한번 냉철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유 감독의 투병 사실이 공개적으로 처음 알려진 것은 시즌 막바지였고 몇 경기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유 감독 본인이나 인천의 입장에서도 끝까지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2019시즌은 이제 끝나고 이제 2020시즌을 새롭게 준비해야하는 시점이다. 프로 감독들은 오히려 비시즌에 더욱 바빠진다. 새로운 시즌 구상을 위하여 선수들을 점검하고 전술과 훈련일정을 짜는 등 과도한 업무 현안들을 유상철 감독이 일일이 감당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인천 구단은 일단 다음 시즌도 유 감독과 함께 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였던 셈이다. 유 감독은 1부 리그 잔류를 확정지은 뒤 홀가분하게 스스로 물러나는 모양새를 통해 구단의 부담도 덜어줬고 스스로의 명예도 지켰다. 인천도 유상철 감독과 완전한 결별이 아닌 명예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통하여 유 감독과의 인연을 앞으로도 유지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인천 구단과 유 감독이 한걸음씩 양보하여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주는 자세를 유지했기에, 별다른 잡음없이 평화로운 엔딩에 이를수 있었다.

인천은 임중용 수석코치 체제로 오는 7일부터 태국 방콕에서 전지훈련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후임 감독 인선은 현재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 감독은 인천과의 동행은 일단 마감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작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천을 넘어 축구팬들과 다짐했던 '두번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 감독에게는 어쩌면 축구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될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함께있는 한 결코 혼자는 아니다. 유 감독이 이번에도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로 돌아오기를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유상철 인천유나이티드 두번째약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