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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교사 자격증 3급 과정이라고 얕잡아 본 면도 없지 않았다. 학벌 위주의 한국 사회에서 살다가, 실무 능력과 이력서에 적힌 다양한 관련 경험을 우선시 하는 호주에서 처음 해보는 공부는 낯설었다.

교육 과정은 철저하게 장차 직업 현장에서 필요한 알찬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6개의 클러스터(Cluster)로 구성된 내용들은 더하고 뺄 것 없이 현실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민자들에게는 본국에서의 화려한 학력과 스펙보다는 현지에서의 3급 짜리 자격증이 더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다.

호주에서 일해 본 경력이나 인맥도 없고, 언어적으로도 능수능란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학벌은 무용지물,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짜리의 무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때가 부지기수다.

자격증 3급 과정은 보통 주 2회 출석,  6~8개월짜리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내가 등록한 보조교사 양성과정은 실습 4주를 포함해서 8개월 과정 코스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고려한 교육 과정이어서 아이들 방학기간에는 수업이 없다.

호주에서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받는 교육은 WHS(Work Health and Safety) 또는 OHS(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 법안(legislation)이다. 예로, 코스트코(Costco)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려고 해도 WHS 교육을 받아야 일을 시작할 수 있고, 자녀의 학교에서 학부모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도 간단한 인덕션(Induction, 개별 학교의 실정에 맞게 작성된 안전 교육으로 WHS에서 요구되는 절차)을 받아야 봉사 자격을 부여 받는다.

이 법안 교육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작업장(학교)의 모든 구성원(학생, 교사, 스태프, 방문객)들의 건강과 안전을 확보하고, 둘째는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셋째는 작업장(학교)에서의 각종 사고와 사망을 줄이는데 있다.

안전 교육의 일환으로 꼬박 이틀 동안 풀로 가동된 '응급처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응급처치(First Aid) 모의 실전 훈련부터,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가장 흔하게 겪는 응급상황이나 사고를 대비한 사례별 훈련 교육이었다.
  
보조 교사 양성과정에서 각종 응급 상황에 맞춰 대응 매뉴얼을 배운다.
▲ Anaphylaxis 대응 매뉴얼 샘플 보조 교사 양성과정에서 각종 응급 상황에 맞춰 대응 매뉴얼을 배운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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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쯤 들어선 강의실에 강사 게리는 벌써 도착해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더미들(마네킹)과 각종 붕대들, 에피펜 주사기(Anaphylaxis, 특정 알러지 과민 반응 쇼크가 왔을 때 놓는 주사), 벤톨렌 흡입기(Asthma, 천식 환자의 호흡 곤란 시 필요) 등의 도구들이 수북했다.

게리에 따르면, 호주 대부분의 교사들은 응급 처치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2-3년마다 갱신을 해야한다. 보건교사가 따로 배치되지 않는 작은 학교들이 많아서 교사나 스태프들은 각각의 응급 상황에 맞는 대응 매뉴얼을 숙지하고 절차에 맞는 처치를 해야 하기에 안전교육에 대한 요구는 높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방의 주사가 한 학생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

강사 게리가 외치는 주의에 처음 에피펜 주사기를 든 내 손은 덜덜 떨리고, CPR(심폐소생술) 순서는 귀에 딱지가 내려 앉도록 듣고 보고 실습을 해야했다. 간질 환자의 발작 시 대응 매뉴얼, 천식이 있는 아동들을 위한 밴톨렌 처치 매뉴얼, 소아당뇨 환자를 돌보는 법 등 수많은 매뉴얼을 익혀 게리 앞에서 시연을 할 수 있어야 자격증(Emergency first aid response in an education and care setting) 발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게리는 각종 모의 훈련 뒤엔 응급처치 보고서(Illness/Injury Reports)를 작성하는 방법을 교육시켰다. 응급처치를 한 교사는 24시간 안에 자세한 사고의 경위나 실시한 처치를 작성해서 학부모에게 보고하는 게 원칙이었다.

온통  '난생 처음' 배우는 것들 투성이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교사였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학교 안전에 대해 한 텀 내내 배운다고?"

교육과정 첫날 수업 계획표(Training Plan)를 받아 든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한 텀 동안 진행 될 클러스터(Cluster)1의 수업은 온통, 학교와 관련된 건강과 안전 그리고 법적으로 요구되는 요건들(Health, Safety, and Legal Requirements in School )뿐이었다.

수업을 듣다 보니 내 예상과는 달리, 수업내용은 단지 응급처치나 학생의 안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보조교사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유지의 중요성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회제도, 보조 교사의 책임/의무와 더불어 책임의 한계와 권리도 배웠다.

심지어는 구직 시 영문이력서 작성 요령, 학교와 노동 계약서 작성시 유의사항, 평균적으로 받게 될 임금과 각종 복지 혜택 그리고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호소할 수 있는 기관과 절차들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통틀어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그제서야 호주 생활 3년 넘게 궁금했던 의문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동의 학교 입학과 동시에 아동 주치의의 연락처를 학교에 등록시켜 응급 시에 학교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하고, 부모가 가입한 앰뷸런스 보험(호주는 응급차 호송은 유료이므로 대부분 보험을 가입함) 내용을 제공해서 교사들이 응급차 호송 시에 바로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아들은 가끔 학교에서 응급처치 보고서를 받아들고 온다.
▲ Injury Report  아들은 가끔 학교에서 응급처치 보고서를 받아들고 온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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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아들이 학교에서 들고 온 '응급처치 보고서(Injury Report)'의 정체도 알게 됐고, 학교에서 '달랑 종이 한 장으로 아이의 부상에 대한 통보를 갈음해도 학부모들이 '교사의 태만'이나 '관심 부족'이라며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됐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납득할 만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매뉴얼을 만들어 교사 양성과정에서부터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시키고, 교사가 이에 준하는 절차에 따라 대처를 했다면 그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고 있다.

어른들이 구축한 안전시스템의 가장 큰 혜택은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아이들 본연의 권리인 '놀며 다치며 성장할 기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응급상황 대처 능력과 안전 의식과 비례하는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나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호주, #호주이민, #호주교육, #멜번, #호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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