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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의 '편의대' 활동을 했던 홍성택(61)씨가 한 증언 내용이 <부마민주항쟁 증언집?3-마산편>에 실려 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의 "편의대" 활동을 했던 홍성택(61)씨가 한 증언 내용이 <부마민주항쟁 증언집?3-마산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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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의 '편의대'로, 그해(1979년) 11월 3일 예상되었던 대규모 학생시위를 차단하는 활동을 했다."

홍성택(61)씨가 부마민주항쟁 당시 했던 '과거'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부마민주항쟁 증언집.3-마산편>에 증언해 놓았다. 사업회는 20일 오후 출판기념회를 연다.

홍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일부 '편의대' 활동을 공개한 사실은 있지만, 증언으로 책에 담겨 나오기는 처음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20일 사이 부산과 마산(창원)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박정희 정권의 유신철폐'를 외치며 벌인 항쟁을 말한다. 당시 정부는 19일 부산에 비상계엄령,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해 강제진압했다.

홍성택씨는 정혜란씨와 대화를 통해 당시 '활동'을 떠올렸다. 1958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던 홍씨는 1978년 8월 입대했고, 처음에는 공수부대 군악대로 갔다가 여단으로 가게 되었고, 그가 당시 맡은 보직은 경비소대의 문화선동대였다.

그는 부마항쟁이 터진 뒤, 인천에 있던 부대에서 기차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대원들과 함께 이동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이동할 때는 트럭을 이용했다.

"병력이 얼마 정도였느냐"는 물음에, 그는 "전 부대가 다 이동을 했는데 숫자는 모르겠고, 어느 책에 보니까 천여 명 온 걸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홍씨를 비롯한 대원들은 수영비행장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틀 동안 머물렀다. 홍씨를 비롯한 대원들은 경남대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머물렀다.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가 있고 난 뒤에 부대와 함께 홍씨가 왔던 것이다. "마산으로 올 때 지휘부에서 말한 게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위수령이 떨어졌고 계엄군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홍성택씨는 '편의대' 활동을 했다. '편의대'는 군복 대신 사복을 입고 시위대 속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거나 주동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던 군인을 말한다.

"편의대 활동을 누가 어떻게 지시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누가 지시를 해서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사복경찰, 형사들하고 같이 나갔다"고 했다.

"함께 (시내로) 나갔던 사복경찰이 한 쪽에 학생 서너명이 있으면 저한테 가보라고 지시를 했고, 거기 가서 '나는 서울에서 온 학생'이라 소개하며 '우리도 11월 3일 날 시위를 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하며 먼저 꼬시는 거다. 그러면 학생들이 이야기를 하다 '우리도 11월 3일 날 시위를 생각 중이다' 이런 말이 나오면 바로 표시(오른 손을 머리 높이로 올림)하면 바로 형사가 와서 연행해 갔다."

홍씨도 학생들과 함께 연행됐다. 그는 "그 분들(학생)은 경찰서로 끌려갔고 그 다음부터는 저는 모른다. 차에 인계가 될 때 저도 차에 같이 탔고, 거기서 분리되고 나서부터는 저는 학교에 있는 부대로 돌아왔다"고 했다.

홍씨는 "편의대가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와 같은 일을 했던 사람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고 했다.
  
홍성택(61)씨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민간인처럼 옷을 입고 사복경찰과 함께 활동하며 시위 대학생을 찾아내 알려주는 활동을 한 '편의대'였다고 증언했다.
 홍성택(61)씨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민간인처럼 옷을 입고 사복경찰과 함께 활동하며 시위 대학생을 찾아내 알려주는 활동을 한 "편의대"였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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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는 당시 학생들한테 접근했던 횟수가 모두 두 번이었다. 그는 "당시 학생들은 호의적이었다. 상황이 워낙 유신정권 말기라 모든 학생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에 그 이야기만 하면, 툭 건드리면 툭 터지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고 했다.

자신에 대해 당시 "정말 앳됐다"고 한 그는 "군인이라 머리는 짧았지만 군인이라고 보이지 않는, 그런 군인들을 골라서 아마 편의대를 운영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고 했다.

음식점이 아닌 다방에 갔던 그는 "그 때 이슈는 11월 3일이었다. 11월 3일 날을 유도해서 많이 끌어내게끔 했고, 무조건 많이 연행해야 하니까 그렇게 했던 것 같다"며 "이 부분은 너무나도 제가 아픔이었기 때문에 평생 담고 왔던 이야기다"고 했다.

마산에 왔던 공수부대원들은 언제 철수했을까. 홍씨는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 날인 27일 새벽 한 시에 짐을 싸서 바로 기차를 타고 네다섯시경 대전에 도착했는데 대통령이 유고로 나오더라. 그래서 그 때 알았다"고 했다.

이어 바로 12‧12가 났다. 그 때 어느 부대 소속이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저희는 전두환 쪽이었다. 그래서 저희 부대장이 장기오씨라고 나중에 장관(총무처)까지 해먹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제대해 대학을 다녔다. 그는 부마항쟁에 대해 "이전에는 어떤 하나의 '점'으로만 이해를 했는데, 지금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왜 11월 3일에 그렇게 집중했는지도 이제 이해가 간다"고 했다.

이어 "왜냐하면 부마 이후에 광주항쟁, 우리 민주화운동이 연결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이게 꿰맞춰지는 것 같고, 그래서 유신정권 말기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들이 저렇게 됐고, 그게 현실로 나타나고 역사가 그렇게 발전했구나 하는 것을, 이게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도 부마항쟁의 '가해자'라고 한 그는 "저희들이 가해자인데 그 일을 했던 군인들이 가해를 했지만, 그분들이 한 게 아니다. 오늘 마이크를 섰다고 그 마이크에 내 목소리가 나갔다고 그게 제가 아닌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스피커였을 뿐이고, 저 위에 폭력적인 사람들이 어떤 단계 단계로 이어 내려져 와서 그냥 맨 밑바닥에서 우리가 했던 일이 그런 일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군인들은 이제 다 제대를 했으니까, 지금이라도 어깨 잡고 이 일의 진상을 밝히는데, 역사를 밝히는데 나서야 한다. 나서기 힘들어 하는 이유가 저를 아는 분들이 저를 염려하는 게, 이런 증언을 하게 되면 곤욕을 많이 겪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홍성택씨는 "제가 아는 건 딱 편의대 활동을 했다는 기억뿐이다. 부마항쟁이 이런 아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줄 몰랐다. 그냥 잊혀진 이야기인줄 알았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마사태'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항쟁'이라고 하는 단어도 이번에 알았다.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일들이 참 많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은 올해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처음 지정되었다.
 
<부마민주항쟁 증언집.3-마산편>.
 <부마민주항쟁 증언집.3-마산편>.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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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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