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이번부터 양양군 6개 읍‧면의 메밀막국수 음식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몸살로 며칠째 누워 있으려니 현장을 찾아다니지도 못했다. 밤새 비도 퍼부었으니 날이 밝으면 한계령부터 올라가봐야 될 것도 같고, 어차피 중간정도에 한 번 거론하려던 어떤 사연으로 막국수를 즐기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메밀막국수와 수육 막국수와 수육은 따로 떼어놓고 얘기를 하긴 어렵다. 더구나 추운 지역일수록 메밀막국수나 냉면의 육수엔 돼지고기가 더 중요한 비중으로 사용되었으리라 본다. 일부에서 물막국수의 육수는 동치미가 원조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렇다하기는 어렵다.
▲ 메밀막국수와 수육 막국수와 수육은 따로 떼어놓고 얘기를 하긴 어렵다. 더구나 추운 지역일수록 메밀막국수나 냉면의 육수엔 돼지고기가 더 중요한 비중으로 사용되었으리라 본다. 일부에서 물막국수의 육수는 동치미가 원조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렇다하기는 어렵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어렸을 적 맛 본 음식은 나이가 들어서 더 좋아한다"고들 하는데 이 말엔 사실 동의하기는 어렵다. 어렸을 적 어떤 음식을 맛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린다'는 말과 '질린다'는 말이 같이 쓰이는데, 어떤 음식을 오랜 시간을 두고 지겹도록 먹어 더 이상 먹기가 꺼려지는 경우 이렇게들 표현한다.

옥수수를 능궈(맷돌로 껍질을 벗기는 동시에 잘게 부수어지도록 하는 작업) 고운 가루를 채로 친 뒤 이 능군 옥수수로 밥을 지어 먹었다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북한에서 왔나" 할 정도로 북한에서는 강냉이로 밥을 지어 먹는 게 일반적인 모양이다. 분명 우리도 옥수수로 밥을 지어 먹었다. 이런 밥을 먹는 자식들에게 아버님께서는 미안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몇 번 하셨다.
 
"연내골서 태어나 증골너머 빈지골서 살 때다. 그때 애비는 덕수 너만 한 나이였는데 이런 밥도 못 먹었다. 허기진 배를 허리끈으로 졸라 묶고 꽁꽁 언 땅을 파 칡을 캐는데 이걸로 밥이나 떡을 해 먹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캐온 칡을 씻어서 찢어 물에 담가 가루를 내리면 그걸 칡녹말이라 그런다. 그걸로 떡을 해 먹으면 속이 든든한데 네 할아버지는 그 칡가루를 장에 내다 팔았고, 우린 녹말을 뺀 칡무거리로 밥을 해 먹었다. 그러다 봄이 되면 송기(소나무의 속껍질)를 벗겨서 그걸로 끼니를 해결했다."
 
아버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면 공연히 서러워졌다. 그때 내 나이 막 11살 되던 때였는데 어머니가 집을 나가신 지 이미 5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나마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아버님은 황철나무나 피나무를 산림간수 몰래 잘라다 여러 종류의 주걱을 깎으셨고 이걸로 다양한 곡물과 맞바꿔 오셨다. 마을에서 유일한 목수셨으나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을 해도 품삯을 제대로 못 받는 통에 굶는 날이 더 많은 해도 있었다.
  
국수 요즘은 결혼식에선 국수를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마을의 대동회와 같은 대소사에서는 소머리국밥 아니면 주로 국수를 많이 먹는다.
▲ 국수 요즘은 결혼식에선 국수를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마을의 대동회와 같은 대소사에서는 소머리국밥 아니면 주로 국수를 많이 먹는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아버님께서 국수를 좋아하신 건 아마도 어려서 잔치나 상을 당한 집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닐까 싶다. 그런 국수를 상당히 오랫동안 입에 안 댄 이유가 있다. 그러하신 아버님과 난 이 부분에선 반대되는 입장인 이유가 있다.

9살 되던 해 여름내 국수로 연명해야 됐다. 지금처럼 학교를 옮기는 일이 쉽지 않던 그 시절 양양읍 서문리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그땐 왜 그렇게 자주 이사를 하는지 몰랐다.

그 여름 쌀이 떨어지는 날이 잦았다. 자식들이 굶는 걸 볼 수 없으셨던 아버님께서는 밖엘 다녀오셔서 백원짜리 지폐를 형에게 주시면 형은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덕수야, 국수집에 가서 국수 반관만 사와" 이 말을 듣고 백원을 들고 국수집에 가면 밀가루포대를 오려 띠를 둘러 묶은 국수 반관을 사고 십원을 거슬러 받아 오곤했다. 이 국수 반관으로 우리 사남매와 아버님까지 다섯 식구가 사흘 정도 살았다.

가족과 함께 어우러져 밥을 먹는 건 결국 정을 나누고 도탑게 만드는 과정이다. 더불어 이를 통해 서로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꾸게 된다. 하지만 겨우 생명을 연명하는데 급급한 음식은 모든 생각을 척박하게 만든다. 결국 이와 같은 사연으로 제법 오랫동안 어지간해서는 국수나 라면을 안 먹게 됐다. 하지만 어쩌다 맛보는 자장면과 콩국수 그리고 칼국수로 그나마 국수와의 인연을 이어왔다고 본다.

잔치나 생일 등 특별한 날엔 우리는 국수를 먹었다. 아침엔 미역국에 쌀밥을 먹고 저녁에 국수를 먹는 풍습은 아무래도 국수의 모양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 걸로 보인다. 국수는 대부분 그 길이가 긴데, 바로 이 부분에 의미를 둬 오래 살라는 뜻을 담아 생일에 국수를 먹었으리라. 물론 잔칫날 국수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풍습도 이제 새로 탄생한 신랑과 신부가 오래 행복하게 살라는 축복의 의미였으리라 본다.

중국에서도 생일이면 국수를 먹는데 우리와는 다른 국수로 장수면(长寿面 : 長壽麵)이란 국수다. 한 가닥으로 길게 뽑은 국수를 그릇에 담고 여기에 계란 두 개를 얹어 국물과 함께 생일을 맞은 사람이 먹도록 하는데 끊어 먹지 않는다고 한다. 한 가닥의 국수와 계란 두 알은 국수 한 가닥은 숫자 1을 의미하고, 계란 두 알은 생긴 모양 그대로 0을 뜻하니 모두 합하면 숫자 100이 된다. 100세까지 살라는 축복의 뜻을 담아 장수면을 먹도록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아 온 국수를 근 20년 가깝게 즐기지 않았으나 다시 국수를 즐기게 된 계기도 아버님 덕분이다. 1985년 봄 병환 중인 어머님을 모셔와 형과 간병을 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일로 아버님과 의절 아닌 의절을 하고 새천년이 되어서야 다시 모시기 시작했다.

아버님을 다시 모셨다고 해봐야 겨우 생신에 국수 두 번 아버님의 친구분들 모셔서 대접하고 세 번째 되던 해 생신을 두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리 긴 세월도 안 된다.

2001년 여름으로 아침식사를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당시엔 오색마을에 인터넷전용선이 들어오기 전이라 전화회선을 두 개 신청해 하나는 인터넷전용으로 모뎀을 연결해 사용할 때다. 전화를 받으니 아버님께서 "둘째냐"라 먼저 물으시고 "호박이 더 커지기 전에 얼른 따가고, 부추도 얼른 잘라야겠다"고 하셨다.
  
양양시장의 장날풍경 양양은 지금도 5일마다 장이 선다. 매월 4일과 9일, 14일 등 닷새에 한 번 장이 서는데 이날은 산촌에 사는 노인들까지 읍내로 나온다.
▲ 양양시장의 장날풍경 양양은 지금도 5일마다 장이 선다. 매월 4일과 9일, 14일 등 닷새에 한 번 장이 서는데 이날은 산촌에 사는 노인들까지 읍내로 나온다.
ⓒ 정덕수

관련사진보기

 
이 말씀을 듣고 달력을 보니 양양장날이다. 장에 나가고 싶으시다는 말씀을 에둘러 하신거란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으니 서둘러 요기만 하고 아버님 계신 곳으로 갔다. 미리 준비를 하고 마당에 서성이시는 아버님을 모시고 읍내로 나갔다. 조금 지체하면 아버님은 어시장에서 오징어 회 한 접시 썰어놓고 적조했던 이들 아무나 붙잡아 소주 한 잔씩 권하시니 식사부터 하시자고 말씀드렸다.

"아버님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곧 점심 때니 따뜻한 찌개에 식사부터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이렇게 미리 점심식사를 하시자고 말씀을 드렸더니 거절하기는 난처하신지 "시원한 막국수나 한 그릇 먹자"고 하셨다. "그럼 단양면옥으로 갈까요"라 예의 오래전 단골로 다니시던 막국수집을 가시겠느냐 여쭈었다. 아버님은 "거기보다 요즘은 너도 잘 알겠다. 담배집 경자가 양양에서 막국수 집을 하는데 거기로 가자"며 앞장 서셨다.

어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함경면옥'이란 간판을 걸고 친구의 누나(경자)가 식당을 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니들은 아무래도 비빔이 좋겠지"라 물으셨고 아버님은 "난 물막국수로 줘"라 하셨다. 아버님과 같은 물막국수로 주문하고 "약주 한 잔 하시겠어요"라 여쭈었다. "아범은 운전을 안 하지. 그럼 나랑 한 잔 해도 되지"라 하셨다.

곁에 서 있던 경자누나는 "그럼 수육도 하나 할까"라며 내 얼굴을 보더니 "야가 장순 줄 알았는데 덕수네요.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다. 한 20년 됐지"라며 반겼다.

수육과 소주가 먼저 나왔다. 술잔을 채워 아버님께 드리고 잔을 앞에 놓고 채우는데 막국수도 나왔다. "며느리가 있어서 막국수도 같이 내왔어요"라며 수육과 막국수가 거의 동시에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아버님 덕에 실로 오랜 세월을 잊고 살았던 양양의 막국수 맛을 다시 만나게 됐다. 면발은 오래전 오색에서 특별한 날에나 먹던 것과는 달라졌다. 순수한 메밀막국수의 맛을 느끼려 나온 그대로 면발을 풀어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당시엔 맥없이 면발이 끊겼는데 상당히 질겨져 있었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여름철이면 먹던 냉면처럼 질기진 않았다.

면과 육수의 맛을 먼저 본 뒤 겨자를 풀고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부분에 식초를 친 뒤 먹는 걸 보시곤 "설탕은 안 먹냐"고 하셨다. "설탕 안 넣어도 맛이 달아서요"라고 말씀을 드리고 천천히 면을 씹으니 어려선 거북하기만 했던 겨자향이 제법 메밀향과 잘 어우러진다는 게 느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