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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 15일 서울에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1963년 10월 28일 도서관법이 공포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국가가 세운 도서관이 여럿 있지 않고, 국립'지방'도서관이 따로 있지 않은 상황에서 왜 '중앙'이라는 이름을 추가했을까? 한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호는 '중앙'과 '서울'이었다. 국립도서관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던 걸까?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립중앙도서관'이 있었다
 
국립도서관은 1963년 <도서관법> 공포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현판은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소공동 시절에 도서관 입구에 걸려 있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에 보존 전시중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현판 국립도서관은 1963년 <도서관법> 공포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현판은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소공동 시절에 도서관 입구에 걸려 있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에 보존 전시중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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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도서관의 명칭 변경은 '북한'을 의식한 조치일 가능성이 있다. 인민대학습당 편에서 다룬 대로 북한은 1946년 평양시립도서관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꿔 국가도서관으로 삼았다(관련 기사 : 도서관에 대한 김일성의 유별난 관심, 대체 왜). 평양의 '국립중앙도서관'은 1945년 서울에 앞서 문을 연 '국립도서관'을 다분히 의식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1963년 남한의 국립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서울과 평양에 2개의 '국립중앙도서관'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모르지만 북한은 국립중앙도서관의 이름을 1973년 '중앙도서관'으로 다시 바꿨다. 평양의 중앙도서관은 1982년 '인민대학습당'이라는 전혀 새로운 명칭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1963년부터 1973년까지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립중앙도서관'이 있었다.

'국립'에 '중앙'까지 더한 이름을 갖게 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은 전문적인 문화기관으로 '독립성'을 강화했을까? 이름과 달리 '종속성'이 심화된 건 아닐까. 전문성 있는 관장은 배치되지 않고 문교부와 문체부 고위 관료가 날아와 관장으로 '꽂혔다'. 전환 초기 국립중앙도서관은 사서의 배치, 예산 배정뿐 아니라 초기에는 납본제도도 제대로 도입되지 않아 장서 확보에 애를 먹었다.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세종문화회관은 1974년에 착공하여 1978년 완공되었다. 대강당, 음악당, 회의장을 ㄷ자 형태로 배치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의 한옥 배치 구조를 구현한 것이다. 전통 건축의 지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지붕에 서까래 조형을 살렸다.
▲ 완공 시점의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은 1974년에 착공하여 1978년 완공되었다. 대강당, 음악당, 회의장을 ㄷ자 형태로 배치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의 한옥 배치 구조를 구현한 것이다. 전통 건축의 지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지붕에 서까래 조형을 살렸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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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19일 착공한 제3한강교(한남대교)는 원래 너비 20미터 4차선 교량으로 설계됐다. 착공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윗선에서 제3한강교를 너비 26미터 이상 6차선 교량으로 '확장'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비슷한 시기 북한이 평양 대동강에 너비 25미터 교량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건설부가 이보다 넓은 다리로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제3한강교가 급히 설계를 변경해서 너비 27미터, 6차선 교량으로 건설된 사연이다.

1973년 세종문화회관 현상설계에 당선되어 설계를 준비하던 건축가 엄덕문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하달됐다. 북한이 평양에 지은 '평양대극장'처럼 기와를 얹고 서까래를 넣되, 5천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지으라는 것이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위해 밀사로 평양을 오고 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5월 3일 평양대극장에서 가극을 관람했다. 그때 평양대극장을 둘러본 이후락이 그 규모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모양이다.

참고로 1960년 북한이 평양에 지은 평양대극장은 '민족적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로, 길이만 137미터, 폭은 73미터, 높이가 48.5미터에 이른다. 2천2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과 7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소강당, 360여 개 공간을 갖춘 대규모 건축물이다.

'기와'와 '서까래' 없이도 전통과 현대미가 어우러지는 건축물 탄생이 가능하다는 건축가의 간곡한(?) 설득으로 세종문화회관은 1978년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개관식이 4월 14일로 잡힌 건 북한 최대 명절인 '태양절'(김일성 생일) 하루 전에 김을 빼려 했기 때문이라나.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하던 시절의 풍경이다.

1970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갑자기 여의도에 120만 평 규모의 5.16 광장(5.16 광장은 1999년 여의도공원으로 바뀌었다) 건설을 지시했다. 5.16 광장 건설 지시는 '김일성 광장'을 의식하면서 전시 비행장으로 쓰기 위해 조성했다는 설이 있다.

1974년 8월 15일 개통한 서울 지하철은 1973년 9월 개통한 평양 지하철보다 1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경쟁하듯 개통했다. 1972년 남한의 <유신헌법>과 북한 <사회주의 헌법>은 발효 시점이 비슷하다. 1973년 5월 5일 남한이 서울에 53만 제곱미터 면적의 어린이대공원을 열자, 북한은 1977년 평양 대성산에 8만 제곱미터의 대성산유희장을 지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인민대학습당의 평행이론?
 
국립중앙도서관은 1984년 3월 19일 반포동 부지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도서관 건립 공사는 4년 동안 이어졌다. 1988년 5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은 남산에서 반포동으로 이전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신축 기공식 국립중앙도서관은 1984년 3월 19일 반포동 부지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도서관 건립 공사는 4년 동안 이어졌다. 1988년 5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은 남산에서 반포동으로 이전했다.
ⓒ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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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세운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서울을 대표하는 동상이다. 평양을 대표하는 동상은 1972년 만수대에 세운 김일성 동상이다. 이순신 동상의 높이는 17미터, 김일성 동상의 높이는 22.5미터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1984년 완공한 잠실종합운동장은 6만 9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89년 평양 능라도에 완공한 5.1 경기장은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85년 완공된 서울 63빌딩은 이름처럼 63층에 높이 249.6미터다. 1989년 완공 예정으로 평양에 지은 105층짜리 류경호텔은 높이 330미터다. 2016년 서울에 완공된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높이 554.5미터로,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평양 류경호텔을 '압도'했다.

남과 북에서 각각 전개된 새마을운동과 천리마운동, 반상회와 5호 담당제까지 떠올려 보자. 적대적 공존을 했던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전개됐다. '적대적 공존'인지 '공존적 적대'인지 헷갈릴 정도인 남북 관계는 서로 싸우면서 닮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은 이런 남북 관계를 '거울 영상 효과'라고 지칭했다.

남산 어린이회관 건물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이 반포동에 부지를 마련해 공사를 시작한 시점은 1984년 3월 19일이다. 공교롭게 국립중앙도서관의 신축 이전에 대한 기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시점은 1981년 가을부터다. 이 시점은 북한이 평양 김일성 광장에 인민대학습당을 대규모로 건립하기 시작한 시점과 묘하게 '일치'한다. 북한은 1980년 7월부터 1년 9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82년 4월 15일 평양 인민대학습당의 문을 열었다(관련 기사 :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 북한에 있습니다).

북한이 김일성 광장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건립한 시점부터 남한에서도 국립중앙도서관 신축 논의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북에서 거대한 국가도서관을 완공하니까 남한 당국도 국립중앙도서관을 새로 짓자는 생각을 한 걸까. 세종문화회관과 여의도광장이 만들어진 에피소드를 떠올리면, 국립중앙도서관과 평양 인민대학습당의 '연관설'이 우연만은 아닐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체제 경쟁이 '도서관' 분야에서 제대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양 김일성 광장 인민대학습당 건립에 맞서 광화문 광장에 국립중앙도서관을 세운다든지,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도서관으로 꼽힌다는 인민대학습당보다 더 큰 규모의 국가도서관을 짓는다든지...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도서관 분야까지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국립중앙도서관과 디지털도서관
 
2000년에 완공된 국립중앙도서관의 자료보존관. 국립도서관 초대 부관장 박봉석을 기려 ‘용재관’으로 명명하려 했던 건물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보존관 2000년에 완공된 국립중앙도서관의 자료보존관. 국립도서관 초대 부관장 박봉석을 기려 ‘용재관’으로 명명하려 했던 건물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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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형복이 설계한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은 철근콘크리트조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이다. 9*9미터 모듈을 기본으로 설계한 건물이다. 수직선과 수평선 모두 굵직하게 처리해서 웅장함을 강조했고, 외벽은 화강석으로 마감했다.

도서관 본관은 정면과 측면, 후면이 모두 같은 입면으로 처리되어 통일감을 주지만, 좌우대칭을 강조해서 권위적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최초 설계에 있던 전면 계단과 식당 건물은 사라지고, 중앙광장은 축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료주의적인 '관공서' 건물의 인상이 강화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유사한 외형을 가진 공공기관 건물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도서관 건물 특유의 독자성과 기능성이 외형에 드러나는 건물은 아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크게 본관과 디지털도서관, 사서연수관과 자료보존관 4개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지털도서관은 주차장이 있던 부지에 지었다. 사서연수관은 국제회의장을 갖추고 있다. 본관과 사서연수관은 2층 연결복도로 이어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2000년 서고동, 지금의 '자료보존관'을 새로 지으면서 국립도서관 초대 부관장 박봉석을 기리는 뜻으로 그의 호를 따 '용재관'(榕齋館)으로 명명하려 했다. 자료보존관이 '용재관'으로 명명되지 않은 이유는 박봉석의 납북 논란을 우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 잔디밭 아래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진 디지털도서관은 디브러리(Dibrary)로도 불린다. 정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건물로, 전 세계 800개 이상 도서관과 기관에 접속해 1억 1천6백만 개 이상의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다. 전자책과 잡지, 저널, 웹디비(web DB), 영화를 열람할 수 있는 환경과 콘텐츠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다.  

건축가 서현의 국립중앙도서관 비판
 
건축가 위형복이 설계한 건물이다.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은 본관과 디지털도서관, 사서연수관, 자료보존관 4개 건물군으로 이뤄져 있다.
▲ 국립중앙도서관 전경 건축가 위형복이 설계한 건물이다.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은 본관과 디지털도서관, 사서연수관, 자료보존관 4개 건물군으로 이뤄져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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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서현이 국립중앙도서관 건물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보자.

"국립중앙도서관 전면에는 열주와 계단이 근엄하게 들어서 있다. 건물 현관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자는 권위적인 관청 건물의 예를 충실히 따랐다. 더구나 휠체어를 탄 이는 혼자서 들어갈 수도 없다. 콘크리트 뼈대의 외부에는 근엄하게 돌을 붙였지만 내부는 그냥 적당히 칸막이를 쳐서 책을 쌓아둔 것이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의 모습이다."

서현의 지적처럼 국립중앙도서관은 사람을 압도하는 육중한 건물에,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열주를 외벽에 새겼다. '지혜의 전당'을 지향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 현관을 기준으로 좌우대칭 구조에, 외벽에는 석재와 유리를 사용해서 권위적으로 보인다. 근엄함을 강조하는 건물 모양새다.

내부에서도 엄숙함을 강조한다. 장서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사정이 있다지만 가방도 자유롭게 반입할 수 없다. 투명 가방으로 소지품을 옮겨 담아 소중한 국가도서관 장서를 훔치지 않았음을 도서관에 있는 내내 증명해야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외관이 권위적이냐 아니냐는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도서관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하면서 우리나라 도서관을 대표할 건물이냐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서관 건물의 외형과 구조는 단순하다. 네모난 건물을 올리고 내부를 적당히 구획해서 어린이자료실, 종합자료실, 칸막이 열람실, 디지털자료실, 서고, 사무실을 배치하면 그게 '도서관'이다. 최근 들어 다양한 입면과 공간을 가진 도서관이 늘고 있지만, 한동안 우리 '도서관 건축'도 학교 건축만큼이나 단조롭고 뻔했다.

건물 외관에 새겨져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명칭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이 건물의 사진을 시민에게 보여주면, 이곳이 '도서관'임을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건립 당시 부착하지 않았던 '국립중앙도서관'이라는 글자가 건물 전면에 크게 붙어 있는 건, 도서관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시민을 위한 '친절'일까.  

한국에 '국립도서관'이 많은 이유?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에 국립중앙도서관 분관으로 지은 ‘국립세종도서관’. 행정부가 이전한 세종시에 있는 도서관답게 ‘정책정보 전문도서관’을 표방한다. 세계 10대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 국립세종도서관 야경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에 국립중앙도서관 분관으로 지은 ‘국립세종도서관’. 행정부가 이전한 세종시에 있는 도서관답게 ‘정책정보 전문도서관’을 표방한다. 세계 10대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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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법원도서관 같은 국가가 건립한 '국립도서관'이 세 곳 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국립도서관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는 건 '삼권분립'의 원리를 도서관 분야에서도 구현하기 위함일까.

국립중앙도서관의 분관 격이라 할 수 있는 국립세종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국립디지털도서관, 국립장애인도서관까지 헤아리면 국립도서관은 7개나 된다. 여기에 국회도서관은 부산에 '분관'을 짓고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은 평창에 '국가문헌보존관'을 조성할 예정이다.

국가가 건립한 '국립도서관'이 많은 편에 속하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도서관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렇게 많은 국립도서관이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도서관 정책의 잔재 때문일까?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도서관을 중시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기 때문에,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도서관은 '다다익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국립도서관이 많은 건 '옥상옥'일 수 있지 않을까. 국립중앙도서관이 하는 일이 과거에 비해 늘어났지만 국중이 담당하던 기능이 분산된 측면도 있다. 의회도서관 역할을 하고 있는 국회도서관이 따로 존재하고, 대통령 직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가 도서관 정책을 새롭게 담당하고 있다. 지역 대표도서관이 속속 건립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이 앞으로 어떤 '위상'을 가져갈지 궁금하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업무 중 꼭 해야 할 업무가 아닌 것은 과감히 다른 기관에 넘기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만이 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영역에 '집중'하면 좋지 않을까. '작은결혼식'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나 국립중앙도서관이 굳이 나서 '작은결혼식 박람회'까지 열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노스코트 파킨슨(Northcote Parkinson)은 식민지는 줄어드는데 영국 식민성 직원 수는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을 사례로 들며, 업무량과 상관없이 공무원 수는 늘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한 바 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이 '도서관'이라고 예외일까?

1945년 국립도서관 개관 시절 34명이었던 국립중앙도서관 직원 수는 70년이 지난  2015년 12월 현재 9배인 300명을 넘어섰다.

단명한 관장, 최장수 근속 직원
 
본관과 디지털도서관 모습이다. 1945년 국립도서관 시절부터 꼽으면 40명의 관장이 거쳐갔다. 서혜란 관장은 제41대 관장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전경  본관과 디지털도서관 모습이다. 1945년 국립도서관 시절부터 꼽으면 40명의 관장이 거쳐갔다. 서혜란 관장은 제41대 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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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개관한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은 지금까지 219년 동안 14명의 관장이 재임했다. 2019년 9월 취임한 서혜란 관장은 국립중앙도서관의 '41번째' 관장이다. 국립도서관 시절을 제외하고 국립중앙도서관 시대만 헤아려 보자.

1963년 제8대 최락구 관장부터 2019년 제40대 박주환 관장까지 56년 동안 국립중앙도서관은 33명의 관장이 거쳐갔다. 관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1.7년이다. 관장으로서 역량을 펼치기에 재임 기간은 너무 짧았다. 짧은 재임 기간도 문제지만 관장의 전문성이 더 문제였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장 자리를 독차지해온 문교부와 문체부 고위 관료들은 도서관에 대해 어떤 전문성을 지녔기에 국가중앙도서관 수장 자리를 '독식'했을까?

국립중앙도서관 관장과 관련해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사서 자격증 발급을 기준으로 해방 이후부터 2019년 현재까지 총 10만 명 가까운 사서가 배출되었다. 수많은 사서가 배출되었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은 1950년 초대 이재욱 관장 납북 이후 2019년까지 69년 동안 단 한 명의 '사서 출신 관장'도 선임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10만 명 가까이 양성된 대한민국 사서 중에 국립중앙도서관장 소임을 감당할 '사서'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이라는 소임을 맡기에 이 땅의 '사서'는 역량이 부족했던 걸까. 2019년 개방형 관장제를 통해 임명된 서혜란 관장은 이재욱 이후 두 번째 '사서 출신 관장'이며, 최초의 '여성 관장'이다.  

국립도서관부터 국립중앙도서관 시절까지 역대 관장은 '단명'했지만 조선총독부도서관 이래 94년 역사 중 50년을 함께 한 직원도 있다. 이의영씨는 1933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취직해서 해방과 국립도서관 개관, 한국전쟁, 국립중앙도서관 전환, 남산 이전을 모두 겪고, 1983년에 78세 나이로 근속 50년을 맞았다.

그는 1963년 정년을 맞아 퇴직한 후 도서관에 대한 애정으로 잡급직으로 근무를 자청, 1983년까지 고용직으로 일했다. 정년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깨지기 힘든 근속 기록이 아닐까 싶다. 이의영씨는 1983년 2월 7일 국립중앙도서관을 떠났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전통'의 글씨가 새겨진 사연
 
“국민 독서교육의 전당”이라고 새겨진 이 조형물은 전두환의 글씨를 새겼다. 반포동에 세운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전두환 임기 때인 1984년 공사를 시작했다. 전두환은 정부 수립 후 ‘도서관’을 처음으로 언급한 최고 권력자이기도 하다.
▲ 전두환의 글씨를 새긴 조형물 “국민 독서교육의 전당”이라고 새겨진 이 조형물은 전두환의 글씨를 새겼다. 반포동에 세운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전두환 임기 때인 1984년 공사를 시작했다. 전두환은 정부 수립 후 ‘도서관’을 처음으로 언급한 최고 권력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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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남산으로 이전한 후 국립중앙도서관은 공간 부족과 습기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1980년 10월 20일 남산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한 전두환에게 도서관 측은 이런 어려움을 호소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호소가 통한 건지, 북한의 인민대학습당 건립에 자극받은 건지 모르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은 전두환 집권 때인 1984년 3월 19일 반포동에 부지를 마련해 공사를 시작했다.

건물이 완공된 1988년 5월 28일 국립중앙도서관은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개관과 함께, 전두환이 글씨를 쓴 '국민 독서교육의 전당'이라는 커다란 조형물이 도서관 앞에 자리잡았다. 

전두환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 때 '도서관'에 대해 '언급'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고 권력자가 도서관을 정책적으로 언급한 첫 사례다. 전두환의 '치적'이라기보다 이승만-박정희의 도서관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는 '촌극'이지만 말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디지털도서관 건립 과정에서 '앞마당'에 둔 전두환 글씨 조형물을 슬그머니 도서관 '뒷마당'으로 옮겼다. 재미있는 건 디지털도서관 공사가 끝난 후에도 전두환 글씨 조형물이 국립중앙도서관 앞마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앞마당에 대놓고 '전시'하기는 그렇고, '철거'할 용기는 없어서 뒷마당에 어정쩡하게 둔 걸까? 국립중앙도서관은 전두환의 '사비'가 아닌 국민 '혈세'로 지은 곳이다. 그런 국립중앙도서관이 부지 마련과 건물 공사 때 집권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의 글씨를 새긴 조형물을 31년째 '전시'하고 있다? 

더구나 전두환은 국민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자가 아닌가. 독재자의 조형물을 '방치'하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의 역사 의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국가의 지적 유산과 함께 독재자의 '하사품'을 후대에 전승하려는 것인가. 국립중앙도서관의 '어정쩡한' 처신을 전두환 조형물 취급을 통해서도 읽게 되는 건 지나친 '오독'일까.

'대표도서관'으로 아쉬운, '중심도서관'이라 하기엔 애매한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문헌으로 나라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문헌보국’(文獻報國) 휘호를 남겼다. 문헌보국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내건 기치였고, 깃발로 제작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가주의’를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쓴 ‘문헌보국’ 휘호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문헌으로 나라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문헌보국’(文獻報國) 휘호를 남겼다. 문헌보국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이 내건 기치였고, 깃발로 제작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가주의’를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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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도서관 시대를 역사에서 '지운' 국립중앙도서관은 식민지 도서관의 잔재는 제대로 '청산'했을까? '국가주의 도서관'을 표방한 일제의 도서관 운영 방침은 청산되지 않고, 기나긴 군사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변형된 채 이어진 건 아닐까.

도서관을 짓지 않는 일제의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과 대한민국 독재자들의 '도서관 외면' 정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 보급한 '양서'와 국립중앙도서관의 '추천도서'는 어떻게 다를까. 시민이 민주화를 뜨겁게 열망하던 시절,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사회를 바꿀 지식과 사상을 제공하는 공간이었을까. 아니면 이와 동떨어진 '책창고' 또는 '공부방'이었을까.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처럼 '사상 통제 기관' 역할을 하진 않았더라도 국립중앙도서관이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것도 아니다. '국방부 금서' 사건처럼 우리 사회와 도서관의 '지적 자유'를 위협하는 문제가 터졌을 때 이 나라 '대표도서관'과 그 '사서'들은 뭘 했을까.

'도서관의 도서관', '도서관을 위한 도서관'을 지향한다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도서관인은 어떻게 바라볼까. 늘 도움 주는 '친구' 같은 도서관? 도서관 분야에 궂은 일이 생겼을 때 '앞장' 서서 싸운 도서관? 사서 개개인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스스로 '권위'를 쌓아온 도서관? 

언젠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대해 '한 줄'로 평해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국가도서관'인 건 맞지만 '대표도서관'이라 하기엔 아쉬운, '중앙도서관'을 자처하나 '중심도서관'이라 하기엔 애매한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대로) 
- 이용시간 : 09:00 - 18:00(야간도서관: 18:00~21:00, 본관 4층 도서자료실)
- 휴관일 : 매월 둘째주, 넷째주 월요일 / 일요일을 제외한 관공서의 공휴일(북한자료센터 : 매월 둘째·넷째 월요일 , 매주 일요일)
- 이용자격 : 만16세 이상. 무료. 
- 홈페이지 : http://www.nl.go.kr/
- 전화 :  02-535-4142
- 운영기관 : 대한민국 정부

덧붙이는 글 | ‘국립중앙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국립중앙도서관, #국립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도서관,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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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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