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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 10.1항쟁, 1948년 제주 4.3항쟁, 여순 10.19항쟁 등 해방 직후 일어난 3대 민중항쟁이 모두 자주통일국가 건설, 일제잔재 청산, 토지개혁, 미군정 철폐란 민족과제를 내건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71년 전 여순 민중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정당성과 당위성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여순은 현재 진행형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불과 두 달이 지난 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 등지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자 논쟁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19년은 여순사건 71주년을 맞는 해다. 사건 발생 뒤 긴 시간이 지났지만 국군에 침투한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세포가 주도한 '반란' 사건이란 인식에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대량 학살'은 축소되고 흐릿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역사적 재평가와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 공감대 형성,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에서 기자와 만난 이자훈(78) 여순항쟁서울유족회 회장은 "서울과 오사카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한 달 가까이 서울에서 체류 중"이라며 "매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순사건 당시 친인척 8명 사망... 국가폭력 피해자
 
 지난 12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여순항쟁서울유족회 사무실에서 이자훈 회장이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여순항쟁서울유족회 사무실에서 이자훈 회장이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신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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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여순사건으로 아버지와 큰아버지, 고모, 사촌 등 친인척 8명을 잃은 국가폭력 피해자다. 그는 지난 1968년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에 정착했다. 여순사건 당시에는 학살을 피하고자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한 사례가 많았다. 이후에도 유가족에게 씌워진 연좌제와 사찰의 굴레로 인해 희생자 자녀들이 일본행을 선택하곤 했다.

지난 7월 설립한 서울유족회에는 서울·경기 거주 100여 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여순사건 당시 부모의 학살을 경험한 70대 초반~70대 후반 회원이 상당수다. 그는 "드러나지 않거나 나타나길 거부하는 유족들도 있다"면서 "제도권에서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명명해 반란도시, 빨갱이 거주지역이라는 낙인을 받고 평생 위축된 생을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에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 (그런 인식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여순 시민들의 탄원으로 지난 김영삼 정권 때 '여순 10.19 사건'으로 공식 명명된 해당 사건은 1948년 10월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이에 호응한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현대사의 비극이다.   

당시 14연대는 경찰과의 갈등, 숙군(군 내부의 부정·비리자와 불순분자들을 인사 조치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심해지자 연대 내 남로당원 중심으로 미군정청의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전남 일대에서 벌어진 반란군·시민군과 진압군의 전투, 이후 진압군의 봉기 가담자·협력자 색출 과정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아버지 고향인 금오도가 여수 일대 섬 중에선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우리 지역에선 가구마다 3~4명 정도 희생된 경우는 흔하다. 총인구가 6000여 명이었는데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된 청년들은 거의 희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장의 가족과 친인척도 8명이 학살됐다. 셋째 큰아버지 이윤기씨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사회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여수건준 6인 위원으로 선출됐고, 여수시 여천군 남면(금오도)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금오도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이 됐다. 진압군이 들어와 금오도를 점령하자 큰아버지는 부산으로 탈출해 2년 가까이 은신하며 일본 망명을 모색했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초 여수경찰서 특별수사대에 붙잡혔다. 함께 부산으로 피했던 아버지 이윤복씨도 형을 구출하려고 여수로 돌아왔다가 체포됐다. 잔여 세력과 관여자들을 오랫동안 색출·탄압·학살했던 것이다.

경찰서 수감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여수 경찰은 다음날인 26일 큰아버지를 만성리(여수엑스포 자리) 쪽에서 총살해 시신을 불태웠고, 아버지 역시 30일에 총살 뒤 여수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사촌형 세 명도 6.25 개전 직후 대전형무소와 대구형무소에서 집단 학살당하거나 지리산 빨치산 투쟁 중 사망했다. 고모와 고모부, 사촌 형수의 아버지도 학살당했다. 이 회장은 여순사건의 와중에 고향 금오도에서 벌어진 학살 장면을 전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 김종원 제5연대 1대대장이 금오도에 와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일본도로 선창부두에서 청년들의 목을 쳐서 바다로 떨어뜨리는 즉결 처분을 했다. 그렇게 목을 치다가 힘이 떨어지면 총살했다. 김종원은 6.25 때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1956년엔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서 치안국장까지 한 인물이다. 

여순 학살 당시 진압군 지휘관 가운데 일제 만주군관학교·간도특설대 출신이 많았다. 이들이 여수·순천, 제주도에 들어가 학살을 자행한 거다. 일제강점기엔 일본에 협력하고 갖은 나쁜 짓을 하다가 해방 후엔 자국민을 무참히 학살한 주범으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자도 있다. '국가폭력'이란 잔혹한 일을 저지르고도 계속해서 권력을 잡으면서 정당화시켜온 거다."


이렇듯 국가형성기에 내전에 준하는 혼란과 좌우대립 속에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당시 반란군과 이에 호응한 시민군은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경찰서장·지주 같은 우익인사를 처형했다. 머슴이나 마름이 지주 주인을 고발한 사례가 많았다는 구전이 남아 있다. 평소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하면서 억눌린 심정이 폭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군의 전남 동부지역 탈환·점령 뒤 봉기 가담자 및 부역자 색출을 무원칙하게 처리하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1만 명을 넘는다.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좌익으로 색출된 시민들을 찍은 사진.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좌익으로 색출된 시민들을 찍은 사진.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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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수많은 민중이 억울하게 생명만 잃은 게 아니다. 약탈·방화·강간·납치·고문이 비일비재했다"고 밝혔다. 여순사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체 국군 5만 명 중 10%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을 여수·순천, 전남 동부 6군에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1948년 10월 19일~28일까지 벌어진 여순사건에서 잔여 세력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난 뒤 25일부터 시민군과 국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는 "시가전을 제압 못 하니까 국군이 26일에 여수 전 시가지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이 많이 질식사했다. 희생자 가운데 행방불명자로 처리되면서 사망자 공식 집계에서 누락된 이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지리산으로 들어간 잔여 세력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도 매우 많았다. 반란군은 게릴라 정치를 펼치며 1950년 초까지 저항했다. 당시 군경 당국은 게릴라와 민간인 모두를 작전 목표로 삼는 '민간인 희생화 전략'을 채택했다. 관련 연구자들은 전투원에 비해 민간인 희생 비율이 과도하게 높았던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민간인을 작전대상에 포함한 계획적 결과로 보고 있다. 

여순사건 후 변한 삶 

가족 중에 8명이나 관련자가 있으니 이 회장의 삶도 평안할 리 없었다. 스물아홉에 청상이 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금오도를 떠나 여수 외가로 숨어들었다. 1961년 건국대 법학과에 입학,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 반대 운동인 6.3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배자가 되기도 했다. 1968년 일본으로 밀항해 약 4년간 낮엔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밤엔 독학으로 일어를 공부했다. 

일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1972년 오사카 소재 재일한국장학회라는 단체에 사무국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재일교포 2·3세 고학생을 지원하고 민족교육을 하면서 해당 단체에서 10년간 일했고, 이후에도 봉사활동 등으로 20년간 관여했다. 재일 2세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정식으로 체류자격을 취득했다. 1982년 6월 3일 오사카 최초로 한국학 자료를 취급하는 서울서림을 열어 현재까지 38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일본인이 한국에 가진 편견과 오류를 불식시키고 우리 역사·문화를 정당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자 했다"는 이 회장은 서점 운영을 통해 번 돈을 재일 2·3세들의 민단·총련 통합운동, 통일 관련 문화 활동에 썼다.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선후배·동기들이 오사카를 찾아오면 기꺼이 서울서림을 사랑방으로 내주면서 한일가교 역할도 했다. 이들 중엔 리영희·백낙청·황석영 같은 이름난 언론인·문인들도 있었다. 

재심청구보다 특별법 제정을 지지하는 이유  
     
이 회장은 아들에게 서울서림을 물려주고 편히 노후를 보내기보다 한국으로 건너와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의 한을 푸는 일에 나섰다. 지난 2월 한국진보연대를 중심으로 민주노총·전농·민변·주권자전국협회·가톨릭농민회 등 60개 넘는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시민대책협의회'가 출범했다. 지난 2001년 16대 국회에서 특별법안이 발의된 이래로 현재까지 5차례 특별법안이 제출됐다. 20대 국회에선 5개당 139명 의원이 재차 특별법을 발의, 현재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 회장은 개별적으로 유가족들이 법원에 재심청구를 하는 것보다 특별법 제정을 통한 배·보상, 국가의 공식사과, 재단 설립 등 일괄 구제를 옳은 방법이라 보며 지지하고 있다. 그동안 재심을 통해 국가배상을 받은 관련자들은 전체 희생자의 약 0.4%로 알려졌는데, 긴 재판기간과 변호사 선임 등 비용 문제로 유족 개개인이 재심청구를 하기가 쉽지 않다.

"지리산에서 저항하다가 체포된 뒤 비전향 장기수로 오랫동안 복역한 아흔이 넘은 생존자도 있다. 특별법이 시급한 게 고령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올해는 여순사건 71주년을 맞는 해로, 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기자회견·추도회·추모문화제· 학술대회·사진전 등 각종 행사가 열렸거나 열릴 예정이다. 특히 이 회장은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리는 '칼 마이던스 여순사건 미공개 사진집 출판기념회'를 강조했다.    
  
미국의 <라이프>지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던스(1907~2004)는 여순사건 당시 맥아더 장군과의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여수·순천 지역을 자유롭게 다니며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사진을 촬영했다. 그렇게 얻은 사진들을 그는 미국 잡지사에 송고했다. 오늘날 여순사건의 진실을 담은 흑백 사진 대부분은 그렇게 세상에 나온 것들이다. 잔인하지만 생생하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은 사진들이다.  

칼 마이던스가 <라이프>에 보내지 않고 보관한 약 300여 장의 여순 관련 사진 가운데 100여 장을 전남도청이 마이던스의 가족에게 샀다. 해당 사진들을 도록으로 만들어 출판기념회를 하고, 특별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실에 한 부씩 제공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현재까지 알려진 보도사진보다 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촛불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행사를 치르게 된 것이 전향적인 일이다. 국민의 공감을 끌어내고 국민의 지지 속에서 함께 역사적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데 젊은 세대를 포함해 국민이 여순항쟁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 회장은 "여덟에서 아홉 살 사이에 본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지치지 않고 1인 시위와 의원실 설득을 계속해 나갈 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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