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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은 나랑 상관 없는데...'

간첩조작사건피해자를 인터뷰하는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이다.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때는 그랬다. 간첩, 하면 어릴 때 <수사반장>에서 본 어둡고 음산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울릉도간첩조작사건의 지명처럼 가깝고 먼 세상 얘기였다.

못한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국가폭력의 '악함'을 다루는 게 아니라, 그 거대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일상을 지켰는지 인간의 '존엄'을 담고 싶다는 기획 의도에 마음이 동했다. 3년 전, 그렇게 <폭력과 존엄 사이>(오월의봄)라는 인터뷰집을 펴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한 사람을 '사연의 존재'로 바라보게 됐다. 인터뷰를 진행한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일곱 분의 첫인상은 지하철에서 스친 듯 평범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푸근하기도 신산하기도 한 주름 패인 얼굴들. 내면에 아픈 기억의 웅덩이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르신들은 "이런 얘기지만 좀 재밌게 써달라"며 당부하고 "우리는 전직 간첩들"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나를 웃게 했고, 또 부끄럽게 했다. 간첩조작사건을 당한 사람이라면 이럴 거라고 단정하고 한 사람을 '피해자다움'에 가두어버린 내 편견은 금세 깨져버렸다. 그후로는 길거리나 국밥집에서 머리 희끗한 어르신만 봐도 생각한다. '저 분들도 간첩 누명 같은 기막힌 일을 겪으셨을지도 몰라.' '세월의 비바람 다 통과하고 살아남으신 거 너무 대단하다.'

간첩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한 사람들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포스터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포스터
ⓒ 공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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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은 그렇게 나랑 상관 있는 일, 이웃의 이야기가 됐다. 그래서 이번 전시도 한달음에 달려갔다. 간첩조작사건 고문피해자 자기회복 사진치유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 나의 인터뷰이기도 했던 김순자(74)와 그의 동생 김태룡(2019년 10월 70세로 작고), 이사영(81), 최양준(80), 강광보(78) 등 5명의 피해자가 트라우마 치유작업으로 사진가 임종진과 같이 2016년부터 사진을 찍었다. 그 작품 300점을 내걸었다.
  
장소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의 5층 옛 조사실이다. 고 박종철이 고문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로 알려진 곳이다. 영화에서나 본 좁고 긴 복도에 좌우로 철문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전신을 옥조여오는 공간이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37년 전 끌려왔을 때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여기서 사진전을 하게 될 줄은. 묵묵히 일상을 살아갈 때 간첩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맞아죽지 않고 살아서 이런 날을 맞이하네요."

전시 오프닝에서 김순자는 소감을 말하며 울먹였다. '상처와의 대면'의 방에 전시된 흑백 사진들이 그 복받침의 이유를 말해준다. "악어가 사람을 물어서 확 끌고가는 것 같았"다고 느낄 만큼 완강한 힘에 포획돼 떨궈진 곳, 옆방에선 아버지와 동생들이 죽어나가는 것만 같았던 공포가 덮쳤던 이 아픈 삶의 자리를 그는 이제야 바로 본다.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중 김순자 전시방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중 김순자 전시방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사진작가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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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준도 그랬다.

"여기는 벙어리도 말하게 하는 곳이야!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인간 도살장이라구!"

수사관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던 장소, 군의관이 검사까지 하면서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 온갖 고문을 당했던 부산 보안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치유 사진 여정의 시작을 함께 했으나 지난 10월 고인이 된 김태룡은 자신이 고문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그리고 아버지가 사형당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사영도 이문동 옛 중앙정보부 건물을 45년 만에 찾아가서 "한없이 두들겨 맞다가 바라봤던 창문"을 사진에 아프게 담아냈다.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사진 중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사진 중
ⓒ 이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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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넘나들고 존엄을 훼손당한 기억을 되짚는 작업이 수월했을 리 없다. 카메라가 도왔다. 상처와 나 사이에 카메라를 두고 조심조심 여러차례 다가간 끝에 망설이고 주저하다 겨우 셔터를 눌렀다. 치유 사진가 임종진의 묵묵한 동행과 지원과 격려에 힘입었다.

이 고통의 기억에 맞서 지켜낸 찬란한 일상의 장면들, 아내와 손녀가 웃고 갈매기가 시원하게 날고 하얀 눈이 소복한,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틔이는 삶의 풍경들이 '원존재의 방'에 귀하게 담겼다.

불행과 고통 속에서 나를 지킨다는 것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중 김태룡 전시방
 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 중 김태룡 전시방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사진작가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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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태룡은 부인 이정선의 사진을 유독 공들여 여러 장 찍었다. 자신이 잡혀가고 20년 세월 간첩의 아내로 눈총 받으면서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홀로 아이를 키워준 데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컸다. 전시 오프닝에 참가한 이정선은 고 김태룡의 인물 사진 옆에 서서 소감을 말했다.

"사람들이 다 나보고 어떻게 기다렸냐고 하는데 이 사람이 잘생겼으니까 기다렸죠. 이렇게 잘생겼는데 어떻게 안 기다려요."

다같이 울다가 웃었다. 저 웃음, 저 밝음, 저 긍정이 삶의 에너지다. 인간 존엄의 근간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감동하는 능력은 누구도 망가뜨리지 못한다. 고문으로 일그러진 마음도 어루만지고 살려낸다.

독재정권 시절 '흑역사'인 간첩이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일까. 내가 스스로 던졌던 질문을 <폭력과 존엄 사이>를 읽은 한 독자는 이렇게 물었다.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책을 쓰고나서 작가님의 생각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나는 답했다. 잘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고.

이전까지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음식, 좋은 집 등 내가 좋은 선택을 하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들 뵙고나니 그게 아니었다. 삶은 그렇게 간단치 않아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도 일어난다. 아무리 안전운행을 해도 끼어드는 차 때문에 사고가 나듯이 간첩 누명 같은 일이 덮친다.

그 불행과 고통에서도 나를 지키는 것,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 결국 내가 택하지 않은 일을 삶으로 의연하게 수용하는 게 삶의 능력임을 알았다. 30~40년 동안 진실을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사진을 배워 아픈 기억을 대면하는 시도는 얼마나 멋진가.
  
'전직 간첩' 선생님들은 작은 억울함과 속상함에도 뒤척이는 나 같은 소인배를 삶의 통을 키워주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말하는 주체로서 자기 아픔을 당당히 터놓는 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통의 기억을 직면하고 삶으로 통합하는 예술가의 면모를 발휘했다.

아직도 비명이 들릴 것 같은 깊고 어두운 사진은 말하고 있다. 한 사람에게 가해진 상처의 크기이자 고통의 깊이가 곧 인간의 깊이이자 삶의 폭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나 외로웠는데 사람들이 옆에 있어줘서 좋다"는 김순자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옆에 있어주는 일임을.
 
 <나는 간첩이 아니다> 전시장 사진
 <나는 간첩이 아니다> 전시장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사진작가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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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은유 작가에게 의뢰한 고문피해자 자가치유 회복 사진전 관람 후기입니다. 은유는 <폭력과 존엄 사이>를 비롯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다가오는 말들> 등을 썼습니다. 기획전시 '나는 간첩이 아니다'는 오는 11월 17일까지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 5층에서 진행됩니다. 민주인권기념관 운영시간은 매주 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입니다.


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

은유 지음, 지금여기에 기획, 오월의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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