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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오직 학술서만을 1600종 가까이 펴낸 출판사가 있다. 이 책이 팔릴까 하는 의문을 둘째치고 서점 매대에 도저히 진열되기도 어려울 것 같은 책만 골라서 낸다. 국문학과 동아시아학을 전문으로 내는데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라도 이 책을 사주어야겠다'는 '소명' 의식과 '나는 무려 이런 책을 소장하고 있어'라는 '선민'의식으로 이 출판사의 책을 사는 경우가 많다.

팔리지 않는 책을 소개할 수 없는 숙명 때문에 이 출판사의 목록을 외면해야 하는 출판평론가들이 늘 미안해하기도 한다. 이 출판사가 아니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금쪽같은 1600여 종의 책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그만한 값어치를 되돌려준다. 팔리지 않는 학술서만을 내면서도 무려 1천만 원의 상금을 주는 임화문학예술문학상을 후원한다. 소명출판이 그 주인공이다.

소명출판의 책을 주문할 때는 책이라는 상품을 구매한다는 느낌이 아니고 말 솜씨는 없지만,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한 사내를 만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귀한 스승을 모신다는 비장한 각오로 소명에서 나온 책을 구매한다.

소명출판의 시작

의외로 출판사의 시작은 소박했다. 학비가 부족해서 무려 10년에 걸쳐서 대학을 다닌 소명출판의 박성모 사장이 제대를 한 무렵. 우연히 한국어계통론의 권위자인 강길운 선생의 연구실에서 임화의 <문학의 논리>라는 불온한 책을 발견한 것이 소명출판의 시작이었다.

임화는 '조선의 랭보'라는 찬사를 받으며 윤동주, 백석, 황순원과 일제 강점기 문화계를 대표하는 꽃미남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이었다. 시인으로서 임화는 단편 서사시를 최초로 소개했고 문학비평가로서 임화는 우리나라 비평의 근간을 구축했다. 영화의 주연배우로도 활약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업적은 화려했지만, 말로는 불우했다.

24살의 나이로 마르크스 문학을 지향했던 카프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다가 광복이 되고 나서 박헌영과 함께 월북했지만, 남로당 숙청 작업이 한참일 때 미국의 스파이, 친일 행위, 반소련, 반공의 죄를 뒤집어쓰고 총살을 당했다. 북한에서 처형되었던 임화는 남한에서조차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문학가로서는 더 치욕스러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소명출판 박성모 사장이 대학생 시절 강길운 선생의 강의실에서 <문학의 논리>를 발견한 1980년대 중반에도 임화는 실명으로 부를 수도, 표기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화가 아닌 '〇화'로만 불려졌다. '〇화'가 쓴 불온서적 <문학의 논리>를 강길운 선생의 책장에서 발견하고 박성모 사장의 심장이 뛰었다. 전설적인 금서를 코앞에서 알현한 박성모 사장은 은사에게 "선생님, 이 책 복사 좀 하겠습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문학의 논리 복사판
 문학의 논리 복사판
ⓒ 박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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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애착이 없는 사람들은 '그깟 복사가 뭐가 대수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책을 보물처럼 아끼는 사람에게 '복사'는 국보급 도자기를 밥그릇으로 쓰면 안 되느냐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책 한 권을 복사하자면 원본이 상할 수밖에 없다. 먼지마저도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애서가에게 복사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강길운 선생은 거의 결벽증 수준으로 책을 소중히 보관하는 애서가였다. 

제자의 당돌한 부탁에 어지간히 당황했을 강길운 선생은 태연하게 "자네들이 뭐 알기나 하겠나. 임화에 대해서"라며 선뜻 <문학의 논리>를 내주었다. 금지된 보물을 품에 안은 박성모 사장과 한 친구는 복사집에 달려갔다.

복사집 주인에게 아픈 자식을 의사에게 부탁하듯이 원본이 상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복사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과연 튼튼하고 아름다운 제본으로 이 세상에 단 2권밖에 없는 <문학의 논리>가 탄생했다.

책 사이즈도 두툼하고 큰 원본에 비해 여백을 잘라내고 아담하게 제작했다. 그야말로 참 예쁜 책이 되었다. 원본은 상당히 훼손되었다. 책보다 제자를 사랑하셨던 강길운 선생은 아무런 말이 없이 원본을 받아들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국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게 된 박성모 사장은 당연히 <문학의 논리> 원본을 구했지만, 대학 시절 복사집에서 만든 복사본에 더 애착을 가졌고 그의 애정서 1호 자리는 원본이 아니고 복사본이 차지한다.

임화문학예술전집

스승의 원본을 훼손해가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복사판 <문학의 논리>를 정성스럽게 읽은 박성모 사장은 '임화문학전집'을 내기 위해서 출판사를 차리기에 이른다. 임화가 소명출판의 뿌리라고 한다면, <문학의 논리>가 포함된 임화문학전집은 소명출판이 후원하는 임화문학예술상의 뿌리다. 

임화는 1930년대 새롭게 태동한 문학 경향에 반대하며 사실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평론으로 일약 조선을 대표하는 평론가로 등극하였는데 당시의 평론을 엮은 유일한 평론집이 바로 <문학의 논리>다. 당시 약 7년 동안 다양한 매체에서 발표한 평론 가운데 임화 자신이 직접 고르고 고른 대표작을 선별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더한다.
 
 임화문학예술전집
 임화문학예술전집
ⓒ 소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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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모 사장이 강길운 선생의 연구실에서 발견한 <문학의 논리>는 학예사라는 출판사가 1940년 12월 20일에 초판을 출간한 판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학예사가 금광으로 큰돈을 번 최남주가 투자하고 임화 선생이 경영을 맡은 출판사라는 것이다. 장정을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 선생이 맡았으며 앞뒤 표지 모두에 연꽃이 수줍게 그려져 있다. 

800쪽이 넘는 하드 커버라서 당시 판매 가격이 3원이었다. 오늘날 가치로 대략 5만 원이 좀 못 되는 비싼 책이었다. 임화전집을 내기 위해서 박성모 사장은 임화 전문가들을 편집위원으로 삼고 무려 9년이 넘게 자료를 수집하는 등 애를 쓴 끝에 2009년 5월 마침내 전집의 1차분을 출간했다. 원문의 맛을 살려 현대어로 옮기되, 각주를 상세히 달아 보충한다는 취지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문학의 논리 초판
 문학의 논리 초판
ⓒ 박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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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임화문학예술전집>은 총 8권으로 기획되었고 시, 문학사, 문학의 논리, 평론 1, 2권이 먼저 출간되었다. 산문 및 자료집으로 6, 8권까지 출간을 계획하였지만, 시간이 또 흘러 10년이 지난 2019년이 된 지금도 박성모 사장이 계획했던 2차분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드는 대업이기도 하다. 임화전집을 낼 만한 규모 있는 출판사들이 하지 않으니 자기라도 해야겠다며 시작한 일이었다. 임화전집 발간이야말로 소명 의식의 결정체다.

소명출판에서 나온 임화 전집을 살펴보면 내용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무수한 각주다. 각주 하나를 위해서 며칠 동안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연구자, 각주를 학술 서적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편집자로서의 참모습을 임화전집이 잘 보여준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각주들은 소명출판의 장인 정신을 상징한다.

소명출판이 애를 많이 써서 만든 임화전집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문학의 논리>가 전집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 구도를 일부러 만들기 위해서 <문학의 논리>를 5권의 전집 중 제3권에 배치한 것은 아니냐는 궁금증이 생겼다.

20년 동안 1600여 종의 묵직한 책을 낸 출판인이 10년 전에 나온 <임화문학예술전집> 이미지를 SNS 프로필 사진으로 10년째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귀찮음의 발로인 것인지 애착의 발로인지도 궁금하다.

박성모 사장에게 따로 확인 차 묻지는 않았다. 독자의 상상 또한 문학책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임화문학예술전집 1 : 시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은이), 소명출판(2009)


임화문학예술전집 2 : 문학사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은이), 소명출판(2009)


임화문학예술전집 5 : 평론 2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은이), 소명출판(2009)


임화문학예술전집 4 : 평론 1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은이), 소명출판(2009)


임화문학예술전집 3 : 문학의 논리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은이), 소명출판(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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