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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7일 자 <경향신문> 칼럼 [이진우의 의심]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10월 7일 자 <경향신문> 칼럼 [이진우의 의심]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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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지만 이진우 교수(포스텍 인문사회학부)를 명석한 철학자로 기억하며 좋아했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1993)과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2009)을 보면,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정치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니체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정교하게 해석한 데에 감명받은 바 크다.

하지만 한국 현실 정치에 대한 이 교수의 발언과 논의는 공감도 전혀 안 되고 이론적 수준에서 이 교수 본연의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서초동에서 열린 검찰개혁을 위한 촛불문화제를 '광장의 파시즘'으로 보며 이를 경계한다는 <경향신문> 칼럼(10월 7일)이 대표적이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인 국회는 공동화되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광장이 세력을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이 단순한 힘의 전시 공간이 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는 오히려 파시즘이 싹튼다."
- [이진우의 의심]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이 교수는 국회의 정치 일정 정지 사태와 광장의 정치 작동을 교묘하게 병렬로 배치하여 인과관계를 은폐하고 만다. 현 상황은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에 시민이 광장에 모여 개혁을 위한 정치 추동력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 광장의 파시즘이 의회 정치를 불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가 토론과 합의가 불가능한 불모의 공간으로 변질된 것을, 시민들이 촛불로 질타하고 있는 것이지, 파시즘의 경우처럼 집권 세력이 대중을 총동원하여 의회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용어의 모순
 
이진우 교수의 광장 파시즘론을 보며 '한 철학자의 이론과 정치적 태도를 구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한 사상가의 정치적 입장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그 이론의 차원만이 아니라 그 '실험적 태도'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그가 생각하고 말한 것', 즉 '이론'을, '그가 하고 있는 것', 즉 '실천적 태도', 다시 말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대비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푸코의 논의를 바탕으로 '뛰어난 니체 철학 해석자인 이진우 교수의 철학적 이론'과 '천박한 수준의 광장 파시즘론'을 구분하고 싶다. 원래 '파시즘'은 극우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편, '숙의 민주주의자'인 하버마스는 1960년대 극좌 학생 운동의 혁명적 폭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좌파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만든 바 있다. 물론 이진우 교수는 하버마스의 여러 책을 번역한 공로가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하버마스를 답습해 '광장의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손쉽게 만들어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좌파 파시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구소련의 스탈린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정치체제였다. 둘 다 전체주의라고 비판받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나 한 당을 위해 국민 전체가 동원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인종주의에 바탕을 두고 차별과 혐오를 선전하는 나치즘과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대의명분에 바탕을 둔 스탈린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극우의 인종 청소라는 혐오적 폭력주의와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극좌의 혁명적 폭력주의도 역시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둘을 함께 지칭하며 냉전 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전체주의라는 단어는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했듯이 폐기되어야 한다.

진단의 오류, 인식의 나태
 
검찰청 방향 사전집회 현장 

12일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검찰청 방향 사전집회 현장 장면입니다
 지난 12일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열린 "제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 사전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사진을 찍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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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이유는 다음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이 정권이 흠집 난 도덕성을 덮기 위해 다시 촛불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촛불 문화제를 집권 세력의 주도로 동원된 집회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 진단의 오류이다.

촛불 문화제는 시사타파TV 유튜버의 제안으로 자발적으로 모인 집회라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02년 붉은 악마의 축제와 2016년 촛불혁명 집회처럼 가족 단위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으며 무엇보다 자발적인 문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혐오와 차별의 적대적 구호가 난무하는 호전적인 성격의 파시즘적 집회와 전혀 다르다.
 
또 하나의 진단의 오류가 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반대 세력을 포용하기는커녕 대화조차 안 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지금 의회에서 대화를 거부하고 일정을 파기하고 태업하는 집단은 제1야당이지 현 정부나 여당이 아니다.

대통령의 정당한 인사권에 대해 제1야당이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이 여기에 수사로 개입하고 언론이 검찰발 뉴스로 일방적인 공세를 펴고 있는 것에 대해 시민들이 부당함을 느끼고 있는 국면이다. 그래서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제1야당 해체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교수가 하고 싶은 말이 나온다. "기득권 세력은 좌우와 관계없이 똑같다는 차가운 인식만이 남았다." 지금은 586이 되어버린 386의 기득권도 있다. 그렇지만 대기업 재벌과 사학 재벌, 언론 재벌과 이와 연관된 정치 세력의 기득권이 훨씬 크고 더 부패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이 둘을 동일한 기득권으로 동일시하는 인식의 나태함이 드러난다. 게다가 "한국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던 운동권 좌파 정부에서 파시즘의 기운이 엿보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라고 탄식까지 덧붙이고 있다. 결국 "광장만 있고 의회는 없고, 정쟁은 있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서초동 촛불문화제는 촛불혁명의 발전적 계승
 
이 교수의 진단에는 도리어 자유한국당과 우리공화당이 극우 기독교 세력과 연합하여 시위 참여 시민을 동원하고 있다는 합리적 추론 가능한 인식이 부재하다. 차이와 비판을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방식으로 매도하는 혐오 발언과 폭력적 양상이 이들의 집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외면하고 있다. 의회를 포기하고 정치적 회담을 거부하며 장외 집회라는 형태로 민중과 직접 소통하려고 하는 쪽이 제1야당 대표라는 점도 간과하고 있다.
 
이 교수의 말과 달리 서초동에서 일어난 촛불문화제는 촛불혁명의 배반이 아니라 발전적 계승이다. 이는 현 정부가 보장하는 독립과 자율의 기조하에서 고삐 풀린 검찰 권력과 언론 권력이 그 부당한 민낯을 드러내자 촛불 시민이 이를 거대한 권력의 악으로 비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표출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제1야당에 의해 의회가 멈추었기에 시민이 다시 촛불을 든 것이고, 의회가 정쟁에 매몰되었기에 개혁 정치의 시동을 건 것이다. 현재의 광장 민주주의는 파시즘적인 민주주의의 역행이 아니라 참여 민주주의의 점화장치인 것이다.

이 힘으로 다시 정부는 검찰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언론은 스스로 반성과 자정의 자세로 들어가야 하고 의회는 다시 개혁 입법과 민생 입법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의회 정치의 무능을 촛불 시민 탓으로 돌리지 말고, 대의명분을 향한 정치적 열망과 권력투쟁을 향한 정략적 야망을 헷갈리면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성우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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