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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야생화 자수 작가 유혜정님과 만나면서, 이 말이 자꾸 생각났다. 작가들은 왜 작품 만들기에 매진하는가? 그에 대한 답변이 저 말속에 있는 것 같았다. 현실에서는 속절없이 피었다 지고마는 꽃들을 붙잡아 두려는 사람. 꽃말을 빌려와 삶의 양식으로 삼고, 땅에서 혹은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일상으로 가져와 형상화하는 행위.

유혜정님은 다른 11명의 야생화 자수 수강생들과 함께 최근 <기억을 수놓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출간 당일인 9월 24일부터 엿새간 야생화자수 48편을 모아 전시도 연다. 나의 작은 방 혹은 우리들만의 공방을 넘어 세상에 나온 아주매(들)의 야생꽃 이야기를 들었다.    


"중대앞 흑석동에 제 작업실이 있어요. 그곳에 자수를 배우러 오신 지도자과정 여성분들과 함께 책 출간과 전시를 준비했어요. 모두 처음엔 손사래를 치시더니, 점점 더 열심을 냈어요. 참 이상할 만큼 아무런 뒷말도 없이, 테클도 시끄러움도 없이 이 대단한 일을 해치운 거예요. 책 출간은 저도 처음이었거든요."

그가 말한 '대단한 일'은 봉선화, 민들레, 개망초, 유채, 동백, 달맞이, 부추꽃들을 실로 새기고, 그 옆에 자신들의 기억을 기록한 일이다. 어릴 적 강원 양구 남면 용하리서 태어나 자란 작가 유혜정도 자신의 유년을 함께 했던 꽃들을 오롯하게 재생시켰다.

유채꽃으로 담갔던 김치, 보리새싹이 새파랗게 돌
때 해먹던 보릿국, 남해 바다가 가까운 집 마당서 붉게 피어나던 동백꽃. 매일매일의 밥을 하고, 그날의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한때 자식들을 '생산'해 키웠던 이들 어머니들은 이제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에서 자신만의 꽃을 창조해 낸 '작가'가 되었다.
 
자수는 규방을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예술 분야로 성장하고, 경제적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 유혜정 자수 작가.  자수는 규방을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예술 분야로 성장하고, 경제적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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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렇게 꽃을 그리고 자수를 놓습니까?
"김춘수님의 시 꽃도 있잖아요. 그분은 꽃 이름만 불러줘도 좋다 그러셨어요. 저도 꽃이 좋아요. 다른 분들은 예쁘게 나비도 넣고, 강아지와 돌도 새기는데, 저는 오로지 꽃만 수놓고 싶어요. 우리가 흔히 보고 지나가는 꽃을 세밀화처럼, 보테니컬 아트처럼 만들고 싶죠. 누가 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정도로…"

- 하고 계신 우리나라 전통자수는 다른 자수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보통 자수는 면실을 쓰죠. 우리 자수는 실과 천을 모두 실크를 써요. 실을 꼬아 쓰죠. 색을 화려하게 섞거나 하지도 않지만, 미세한 변화를 줘 수려하죠. 중국 자수가 실 한 다섯 개쯤 써서 꽃 하나를 표현한다면, 우리자수는 실 두 개로 섞임을 조절해요. 빨강실과 하양실로 분홍까지 만드는 거죠. 단순하면서 풍부하고, 동시에 절제미가 있어요."

- 자수의 세계로 입문하신 계기랄까? 처음 자수와 만난 순간을 듣고 싶네요.
"초등생 전문 학원을 오랫 동안 했죠. 학생수가 120여 명 가까웠는데, 그 일이 어느 순간 버거웠어요. 아이들 성적을 관리하는 거니까. 다른 일을 찾다가, 우연히 퀼트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다 선생님이 결혼을 하고 이사를 가면서, 전통자수를 시작하게 됐죠. 이왕 하려면 명장께 배우자, 그래서 유희순 장인께 간 거였어요. 중요무형문화재 한상수 선생님의 제자. 저는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됐어요."

유혜정 작가는 블로그 '풀꽃공방'을 운영한다. 그곳에 들러 그의 작품들과 일상을 엿봤다. 지난 5월에 그녀는 비바람에 떨어진 감꽃들을 그러모았다. 출근길에 배낭과 수틀은 담벼락에 기대고, 우산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쪼그려 앉아서 그러고 있자니 지나던 할아버지가 물었단다.

"뭐 하러 그걸 주우슈?"
"감꽃 목걸이 할 거예요."
"쯧쯧. 애들도 아니고…"

그래도 그녀는 끝내 감꽃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었다. 일상에서, 일상의 것으로, 드디어는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야말로 예술가의 그것이다. '전통의 전승'을 과거의 복제로 여기지 않고, 작가의 개성을 한껏 담고자하는 뜻도 내비쳤다. 새로운 전통이 될 창작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 그런 일상이 그의 '풀꽃자수' 블로그에는 빼곡하다. 유 작가는 여기에 더해 '사업가'로서의 본성도 버리지 않았다.


- 이번 전시 참여자 중에 한 분을 '사업가'로 데뷔시키셨다고요?
"강태인이란 분이 계세요. 따님이 화가이신데, 함께 작업해서 '소녀자수' 작품을 몇 개나 내셨어요. 원단에 천연염색을 한 천하고, 자수를 놓을 수 있는 실, 액자까지 함께 넣은 패키지를 만들어 파시도록 했어요. 물론 도안을 함께 넣어서 직접 소비자들이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전국적으로 인기가 굉장히 많아요."

- '자수'가 그렇게나 많은 수요자가 있으신가요?
"제겐 그 곳만 보이니까, 실제로도 많죠. 제가 공방에서 하는 일은 도안에 따라서 자수를 놓도록 하는 거예요. 270여 가지의 도안이 있고, 이 도안을 따라할 수 있도록 하는 패키지가 있어요. 액자에 넣거나 패브릭을 하는 게 다르고요. 패브릭은 팔찌나 가방, 베개 커버나 파우치, 거울뒷면 등 무궁무진하게 쓰임새가 있어요. 지도자 과정은 약 50여 개의 자수를 완성해야 하니까..."

예전에 자수를 배우며 돈을 받기도 했다. 요즈음은 돈을 주면서 배운다. 자수를 가르치는 공방들도 곳곳에 있다. 이곳서 지도자 과정을 통과하면 자격증을 받고, 자신의 공방을 열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

'일을 하고 생활에도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은 그 뜻이었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늘고, 문화를 향유의 폭이 넓어지고, 차근차근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이들이 확산하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프랑스자수, 전통자수, 퀼트의 배양지였다.

"자수가 명상하는 거랑 통해요. 굉장히 고요한 순간이 찾아와요. 일상의 복잡함을 벗어나서 혼자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일이에요. 저 스스로도 굉장히 차분해지니까. 좋아하니까 하는 건데, 정말 좋아들 하시거든요. 마음이 어지러우면 수는 절대로 못 놔요. 그 마음을 다스리는 일, 그게 자수거든요."

자수는 바늘 하나와 실 한 줄로 빈 천을 꿰뚫는다. 그 처음 순간의 파열음 이후 그 작은 존재는 차근차근 선과 면을 완성해 간다. 그 지난한 과정에 나의 온 존재가 투여되고, 매듭을 짓고나면 드디어 작품이 완성된다.

한때 아이를 '생산'하여 키우는 기쁨을 누리고, 매일매일을 밥짓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며 성취를 이뤘지만, 그것들은 모두 떠나버렸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남들에겐 하찮아보일지 모르나, 자수였다. 내 삶에서 흐릿하던 것들은 이제 자수 속에서 한땀한땀 제자리를 찾는다.

짧은 바늘로, 긴 실을 엮어 만든 이들의 전시는 9월 24일부터 29일까지 종로 한옥청에서 열린다. 
 
전시가 이뤄지는 한옥청은 중요무형문화재 한상수 자수장의 작업공간이자 박물관이었다.
▲ 책 <기억을 수놓다>를 들고있는 유혜정 작가. 전시가 이뤄지는 한옥청은 중요무형문화재 한상수 자수장의 작업공간이자 박물관이었다.
ⓒ 유혜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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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혜정, #자수, #자수신세계, #한옥청, #기억을수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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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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