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취업 준비를 위해 2년 전 서울에 올라온 정수정(27‧가명)씨는 지난 설 명절에 이어 추석에도 고향에 가지 않기로 했다. 친척들이 대놓고 '취업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지만 자리 자체가 부담스러워서다.

"취업 준비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친척들이 약속이나 한 듯 취업 이야길 안 꺼내세요. 하지만 취업 준비생이 누가 눈치 줘서 주눅 드나요? 스스로 자존감이 떨어지다 보니 '죄 지은 사람'처럼 구는 거죠. 집에 다녀온다는 친구도 친척들이랑 안 마주치려고 짧게 갔다 온대요."

"'명절 잔소리 메뉴판' 대로 수금했다면 부자 됐을 것"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둔 9월 7일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 이날 노량진에서 만난 학원 관계자와 수험생들 모두 "연휴 때 노량진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둔 9월 7일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 이날 노량진에서 만난 학원 관계자와 수험생들 모두 "연휴 때 노량진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 장은미

관련사진보기

 
정씨는 가족들에게 하반기 채용이 시작돼 준비할 게 많다는 핑계를 댔다. 실제로 그는 자소서 첨삭과 면접 대비 스터디 등 개인 공부 계획을 세웠다. 또 아르바이트하는 학원에서 명절 기간에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 자원했다. 정씨는 "고향을 오가면 교통비 등 이래저래 지출이 많다. 한 푼이 아쉬울 때라 이번 명절은 공부와 일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정씨처럼 명절에 고향을 가지 않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이 올초 설 연휴를 앞두고 성인 남녀 195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명 중 1명이 '명절에 친척 집에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모임에 불참하는 이유는 '현재 내 상황이 초라해서'가 전체 응답자의 36.1%로 1위를 차지했다. '취업 및 이직 준비'도 31.8%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노량진에서 임용 고시를 준비하는 이혜진(28·가명)씨는 지난 설 연휴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친척들이 '시험 준비 잘 되냐'부터 '다른 거 할 생각 없냐' '친구 자식은 이렇게 해서 합격했다더라'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선택했냐' 등 한마디씩 훈수를 두는 터에 '약속 있다'며 쫓겨나듯 집을 나왔다.

친척들은 선의로 한 말이겠지만 이씨에겐 '상처'로 남았다. 그는 인터넷에 떠도는 '명절 잔소리 메뉴판'을 직접 검색해 보여주며 "이 가격대로 돈을 받았으면 부자 됐을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부모님은 별말 안 하시지만 동생이 취업한 상태다 보니 (명절만 되면) 나 스스로 동생과 더 크게 비교하게 된다. 자리가 주는 정신적 소모가 너무 크다"고 털어놨다.

노량진 탈출 위해 추석에도 '열공'
 
 노량진에서 임용 고시를 준비하는 혜진씨는 지난 설 연휴에 들은 친척들의 잔소리 때문에 이번 추석 고향에 가길 포기했다. 이씨는 "인터넷에 떠도는 '명절 친척 잔소리 메뉴판'에 나오는 대로 용돈을 받았으면 부자됐을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지난 설 명절 손석희 앵커도 진행하는 뉴스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잔소리 메뉴판을 언급하기도 했다.
 노량진에서 임용 고시를 준비하는 혜진씨는 지난 설 연휴에 들은 친척들의 잔소리 때문에 이번 추석 고향에 가길 포기했다. 이씨는 "인터넷에 떠도는 "명절 친척 잔소리 메뉴판"에 나오는 대로 용돈을 받았으면 부자됐을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지난 설 명절 손석희 앵커도 진행하는 뉴스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잔소리 메뉴판을 언급하기도 했다.
ⓒ JTBC

관련사진보기

 
소방직 공무원을 준비하는 강병영(29)씨에게 추석은 더는 특별한 날이 아니다. 강씨는 "공시생이다 보니 친척 모임은 부담만 된다. 학원도 정상 수업을 하니까 평소처럼 공부할 생각"이라고 했다. 함께 소방직 공무원을 준비 중인 최길주(28)씨도 "굳이 친척들 만나 스트레스받을 필요 있나"라면서 "추석 연휴 때도 개인 공부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노량진 탈출'이 목표이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한다"며 각오를 다졌다.

강씨의 말처럼 명절 당일을 제외하고 노량진의 대다수 학원은 정상 수업을 진행한다. 추석 연휴에 단기로 진행하는 특강도 있다. 몇 년째 명절 특강을 진행하는 한 강사의 온라인 카페에는 몇 달 전부터 추석 특강을 문의하는 게시글 50여 개가 있을 정도로 수강생들의 관심이 높다.

공시생들은 수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연휴에도 학원을 오가며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문각 남부고시학원 김소라 주임은 "추석 연휴 때 특강을 진행하는 수업이 이미 공지가 됐고 학생들도 평소처럼 공부할 것으로 안다"면서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는 정상 수업이 이뤄져 평소와 같다"고 했다.

노량진에 위치한 유명 대형학원 자습실 관리자도 "추석 연휴에도 문을 닫지 않고 운영한다"면서 "이번 추석에도 지난 명절과 마찬가지로 노량진을 떠나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명절 '정상근무'
 
     서울 한 마트에서 추석연휴 영업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서울 한 마트에서 추석연휴 영업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 장은미

관련사진보기

 
그런가 하면 추석 연휴에 아르바이트 등 일을 하는 청년들도 있다. 커피전문점 할리스에서 2년 6개월째 일하고 있는 김미지(24)씨는 이미 몇 번의 명절 근무를 경험했다. 노량진에 위치한 24시 카페인 이곳은 명절에도 정상 영업한다. 김씨는 "카페에서 일을 하다 보면 지방에서 올라온 공시생들을 많이 만난다"면서 "연휴에 집에 안 내려가는 수험생들이 공부하러 카페에 많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신정은(24·가명)씨는 "연휴 중 이틀을 근무하기로 근무 스케줄을 짰다"면서 "출근하지 않는 시간엔 하반기 취업을 위해 토익학원에 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인·구직사이트 잡코리아가 추석을 앞두고 아르바이트생 765명을 대상으로 한 '추석 연휴 근무 현황'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전체의 64.7%가 '연휴에 정상 근무를 한다'고 답했다. 정상 근무의 이유로 매장이나 사무실이 정상 운영한다는 답변이 57.1%로 많았고, '추가수당 등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출근한다'는 답변도 44.6%에 달했다.

롯데시네마 커뮤니케이션팀 홍보팀 우승완 사원은 "연휴 동안 많은 방문객이 찾을 것을 예상하고 근무 인원을 확대하는 편"이라며 "몇몇 직원들은 오히려 고향에 내려가 겪는 명절 스트레스보다 연휴 근무를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년들의 명절풍경, 어떻게 봐야 할까


달라진 청년들의 명절 풍경은 개인화된 가치관의 변화가 한몫한다. 돈과 시간을 써가며 친척들을 만나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합리적으로 시간을 쓰자는 거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가족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집단적 규범 대신 자기의 사생활이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개인주의 성향이 젊은 세대의 중심 문화"라면서 "하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공동체 기반을 약화할 위험이 있어 우려도 든다"고 했다.

윤 교수는 달라진 세태를 반영하는 새로운 가족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과 가족 공동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면서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바탕으로 원활한 소통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으로는 경쟁 사회로 치달으면서 위로받아야 할 가족 관계가 친족 간 비교 등으로 청년들에게 상처를 주는 면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자리를 피하게 된다.

권경우(49) 문화평론가는 "나 역시도 중년 세대라 청년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하기엔 자칫 '꼰대'처럼 느껴질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서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때문에 주눅들고 가족들과의 자리를 피하는 상황이 안쓰럽다"고 했다. 권 평론가는 "주어진 상황들이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 시대적 맥락과 상황에서 오는 것이니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위축되지 말고 이 시기 역시 긴 인생의 한 지점으로 지날 것이니 편히 마음먹고 이 같은 명절도 잘 보냈으면 한다"고 청년 세대를 응원했다.

댓글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올바로 전달해주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