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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일 대장과  미국 대표 해리슨 중장
▲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광경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일 대장과 미국 대표 해리슨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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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교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만 그 사실을 잘 몰랐을 뿐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겐 전쟁의 교착이란 게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7세기 경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한반도문제에 개입한 이래, 전쟁의 교착은 협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복적으로 발생해온 상당히 익숙한 패턴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결정적 시기마다 한반도 역사의 주요행위자로 등장했다. 바로 그 중국이 19세기 말 이후부터 한반도문제의 또 다른 주요행위자로 등장한 미국과 전쟁터에서 마주하게 됐으니 교착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500년 전 발생한 임진왜란 때 그랬듯이 전쟁이 시작된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되기 시작했다. 미중 양국은 전쟁의 교착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사태를 원치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생한 지 꼭 1년만인 1951년 6월부터 미국과 중국은 휴전협상을 개시했다. 협상은 장기화됐다. 그러다가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휴전협정을 조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휴전협상은 이렇게 장기화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협상 당사자들은 할 말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 가운데 협상에 임하는 미중 양국의 접근법 상의 차이를 주된 이유로 꼽은 키신저의 설명방식이 가장 눈에 띤다.

키신저는 협상전략에 접근하는 방식이 서로 대립한 것으로 간주한다. 미국식 견해에 따르면 전쟁과 평화는 정책의 각기 다른 단계였다. 따라서 협상이 시작되면 무력 사용은 중단되고, 외교가 주도권을 차지한다는 시각이다. 무력은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하지만 협상이 시작되면 한쪽으로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협상 결과는 상호신뢰에 입각한 우호적 분위기에 의해 좌우되는데, 이때 군사적 압력은 좋은 분위기를 해칠 수 있었다. 이런 의도에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방어적 조치만을 취하고 대규모 공격은 개시하지 말라는 명령이 미군에 내려졌다.

"중국의 시각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전쟁과 평화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었다. 협상은 전쟁터의 연장선이었다. 고대 중국의 전략가 손자가 쓴 『손자병법』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싸움은 심리전이다. 즉 상대의 계산에 영향을 미치고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적의 단계적 축소는 자신의 군사적 이점을 압박하여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의 징후였다. 공산주의 측은 교착 상태를 이용하여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에 대한 미국 대중의 불편한 심기를 키웠다. 실제로 협상 중에 미국은 공격에 치중하던 단계만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고통을 겪었다"(Kissinger, 2014:294).

그래서였을까? 협정에 서명한 후 12시간이 지나야 휴전 효력이 발생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은 그때까지 교전을 계속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지상에서 전선을 맹공격했다. 미군은 공군폭격과 함대사격으로 대응했다. <뉴욕타임스>의 편집장으로 저명한 시사평론가였던 제임스 레스턴은 "인류전쟁 역사 상 그처럼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휴전을 맺은 적은 없었다"고 논평했다(Stueck, 2005:233).

미중 양국은 휴전을 통해 소기의 전쟁 목표를 달성했다. 미국은 최초에 설정한 작전계획대로 38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몰아냈다. 중국은 확전을 막아냄으로써 북한을 완충지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최대 피해자는 한반도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남북한은 행동의 자유를 상실했다. 남북의 정치적 결정은 상당한 대가를 치루지 않는 한 어떤 의미 있는 효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반도, 정확히 남북한은 냉전의 포로가 됐고, 분단은 한층 고착화됐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만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었던 게 아니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이 표현이 전략적 가치라곤 거의 없는 주변지역 분규에 휘말려들어 전략적 핵심지역인 유럽에서의 소련봉쇄라는 '봉쇄정책' 본래의 목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심각히 우려한 것이었다면, 한반도에 살아가는 남북 민중의 입장에서도 한국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었다. 그 이유는 상당부분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

전쟁이 발발한 1950년의 시점에서 한반도 정세를 평가해보면 북한은 물론, 남한 역시 안정화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사회 안정의 시금석은 토지개혁 등 시급한 사회경제 개혁과 공정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준수 여부였다. 1950년 6월이 되었을 때, 남한에서는 그간의 위기를 딛고 적어도 국내적 요인에 의해서는 체제 붕괴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을 만한 새로운 상황이 조성됐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이 내전이었다는 커밍스의 주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946년 2월,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남한 역시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고 이듬해인 1950년 5월에는 전체 농지 가운데 70-80% 가량 분배가 진행됐다(김성호 외, 1989:601-602). 두 체제 모두 남미 등 기존의 제3세계국가는 물론, 2차 대전 이후 갓 독립한 신생국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속하게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이다(유용태 편, 2014).

절차적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헌법이 명시한 1950년 5월 국회의원 선거를 11월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4월에 시작되는 회계연도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시간을 국회에 주어야 한다는 게 명분이었다. 하지만, 선거패배를 우려한 꼼수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승만에게 선거연기 문제를 시정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경제, 군사원조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는 미국의 원조는 "남한 내 민주제도의 존립과 발전을 전제로 한 것"이며 "헌법과 법에 따르는 자유선거는 민주적 제도의 토대"라고 지적했다(FRUS. 1950. vol.7, pp.35~40). 자신의 경고가 단지 말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무초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기까지 했다.

애치슨의 압박은 즉각 효력을 발생했다. 이승만은 애치슨의 경고서한을 국회의원 전원에게 돌렸다. 국회는 4월 말,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위한 조세와 가격조치를 승인했다. 이승만은 국회의원 선거를 5월말로 정했다. 선거운동과 투표는 유엔 한국위원회와 미국고문단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지역구 당 열 명이 넘는 후보가 등록했다. 이 가운데 70% 가까이 무소속 후보였다. 정당에서 공천 받은 후보자들 중에서도 절반 정도만이 친정부 성향을 띠었다.

그런데 친정부적 정당만도 4개나 되었기 때문에 한 지역구에서 여당 성향의 후보끼리 맞대결하는 웃지 못 할 광경도 벌어졌다. 선거유세는 유권자들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선거에 대한 높아진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듯 투표율 역시 92%로 아주 높았다. 선거결과는 대체로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가 공정하게 표현된 것으로 여겨졌다.
현역의원 210명 가운데 31명만이 재선에 성공했다. 무소속 의원이 126명으로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우익 정당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한민당 후신인 민국당은 154명의 후보들 중 24명만이 당선되었다. 물론, 민국당 계열 무소속 당선자를 합산하면 40석 내외였지만, 제헌의회 당시의 76석에 비하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우익과 이승만 세력의 패배가 분명했다. 이승만의 정치적 패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이 총리후보로 지명한 무소속 오하영 의원이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단 46표의 찬성을 얻는데 그쳐 국회인준을 받지 못했다(Stueck, 2005:252~253).

5.30 선거결과를 커밍스처럼 무슨 혁명전야라도 되는 양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그 평가만큼은 상당히 타당하다. 커밍스에 따르면, 5.30 선거결과는 "이승만 정부에게 재앙에 가까운 손실을 안겨주었다. 국회 안에 이제 중도파와 중도좌파의 강한 결집체가 생겨났다. 그들 중 일부는 여운형 노선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대다수는 통일을 바라고 있었다"(Cumings, 1981:484).  그러므로 5.30 총선결과가 하등 새로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체제를 오히려 강화시켜주었다는 김일영(2004:126)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불과 2년 전의 5.10선거와 비교해도 5.30선거가 지닌 중대선거로서의 의미는 뚜렷하다.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 결과, 단정과 우파의 양대 축인 이승만의 독촉과 한민당이 전체의석 가운데 2/3를 차지했다. 이는 5.10 선거가 치러진 당시의 정치지형, 곧 전쟁 전 냉전 반공체제에 조응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뒷받침한 권력집단의 형성을 의미했다(박찬표, 2007:394~395). 이것과 비교한다면 5.30 선거결과는 정부수립 단 2년만에 성취된 이승만 반대세력의 놀라운 약진이었다.

진보파가 전체 의석의 1/4에 지나지 않았다는 맥도널드(MacDonald, 1978:282)와 메릴(Merrill, 1989:171)의 보수적 평가를 수용한다 해도 전체 210석 가운데 53석이라는 적지 않은 의석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2년 전 제헌의회 선거와 비교했을 때 우익세력의 패배와 진보세력의 괄목할만한 원내 진출은 경향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한 민중들은 보통선거를 도입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흔히 '종이짱돌Paper Stones'로 알려진 투표용지를 이승만 체제에 저항하는 무기로 활용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여기서 애치슨 선언의 또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는 '문호개방과 자유민주주의'로 요약되는 미국식 국제주의 문법이 효력을 발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에 대한 군사적 관점에서의 평가절하가 정치·경제적 무관심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영도하는 민주당 행정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창한 전후 국제주의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반도문제 해결에 있어 최상은 아니었는지 몰라도 트루먼과 애치슨 조합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정치적 조건을 형성했다. 특히, 애치슨 국무장관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따르던 국제주의 노선의 견결한 신봉자(Acheson, 1962;Stupak, 1969)였을 뿐만 아니라 덜레스 류의 우익반공주의자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남북한, 미국 모두에게 '잘못된 시기의, 잘못된 전쟁'이었다.

남과 북은 분단 상황에서도 정당성 있는 국가 건설에 나름 성공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양 체제의 사회경제적 간극은 정치체제의 그것과 달리 그리 크지 않았다.

1948년 5.10 선거에서 남한의 거의 모든 정파들은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제헌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분배 방식과 소유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토지개혁의 대원칙을 천명했다. 조선공산당 간부 출신의 조봉암이 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격인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남북한 간의 사회경제적 간극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정치적 차이가 사회경제적 대립을 규정하도록 만들었다. 상부구조와 토대, 정치와 경제의 이러한 전치는 어쩌면 일시에 그쳤을지 모를 분단을, 체제유지를 위한 항구적 전쟁의 성격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북 간 대립이 더욱 격해지고 격멸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까지 발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요컨대, 1950년 6월의 정세는 동족 간 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 까지는 없던 그런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시급한 이유는, 남북 모두 반면교사의 자세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김성호 외. 1989. 『한국농지개혁사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일영. 2004. 『건국과 부국: 현대한국정치사 강의』. 생각의 나무.
박찬표. 2007.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냉전 자유주의와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 후마니타스.
유용태 편. 2014. 『동아시아의 농지개혁과 토지혁명』.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Acheson, D. G. 1950. Strengthening the forces of freedom: selected speeches and statements, February 1949-April 1950. Washington : U. S. Govt. Print. Off.
Cumings, B. 1981.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Kissinger, H. 2014. World Order. New York: Penguin Press.
MacDonald, D. S. 1978. Korea and the Ballot: The International Dimension in Korean Political Development as seen in Elections. Ph. D. dissertation.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Matray, J. M. 1989. 『한반도의 분단과 미국: 미국의 대한 정책, 1941-1950』. 을유문화사.
Merrill, J. R. 1989. Korea: The Peninsular Origins of the War. London and Toronto: Associated University Press.
Stueck, W. W. 2005. 『한국전쟁과 미국 외교정책』. 서은경 역. 나남.
Stupak, R. J. 1969. The Shaping of Foreign Policy: The Role of the Secretary of State as seen by Dean Acheson. New York, N.Y. : Odyssey Press.
 

태그:#한국전쟁, #정전협정, #농지개혁, #애치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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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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