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영화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 ⓒ 이정민


"남들은 학창시절이 제일 좋았다고 하지만 유난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들 다른 사람인데 똑같은 머리 길이, 똑같은 옷을 입은 채 이상한 가치를 주입 당하곤 했다."

'빛나는 학창시절'이라는 말이 이 감독에겐 조금 낯설어 보인다. 사춘기의 열병 때문만은 아니다. 1994년,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학생 김보라는 왜 모두가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를 가야 하는지, 가까이서 보면 개성이 다른 독자적인 아이들인데 왜 성적으로 우열반이 나뉘어 따로 수업을 들어야 했는지 매우 궁금했다. 그 사이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왠지 모를 눈물이 나왔다.

궁금증은 희미해졌고 그렇게 약 20년이 흘렀다. 미국 유학생 시절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는 꿈을 종종 꿨다. '아, 내가 학교를 3년 다시 다녀야 하는 건가?' 몸서리를 치다 꿈인 걸 알고 안도하기를 여러 번. "내 과거에 뭔가가 있는데..."라며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자신도 몰랐던 어떤 트라우마를 발견한다. 2012년 무렵 영화 <벌새>의 트리트먼트가 그렇게 세상에 나왔고, 1년 뒤 시나리오로 탄생하게 됐다.

유학 시절 꾼 꿈의 정체

14세 은희는 곧 1994년 그때의 기억을 온몸에 품은 상징적 존재다. 20년이 지나 하나씩 곱씹은 감독의 내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김보라 감독 본인도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가 잊었던 '인간성 상실'에 대한 외침이기도 하다. 영화는 친구와의 잦은 갈등, 그리고 가부장적인 아빠와 오빠, 무관심한 엄마 틈에서 풀이 죽어가던 은희가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거나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온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는 29일 개봉인 <벌새>는 국내에 앞서 세계 여러 영화제에 소개되며 상을 받는 등 25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수상 횟수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벌새>를 본 뒤 "1990년대 한국은 매우 매혹적인 동시에 어떤 나라 누구라도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던 한 메리 해론 감독(<아메리칸 싸이코> 등)의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한국적일 것만 같은 이 영화가 세계 관객도 함께 공감할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다. <벌새>에 앞서 같은 감독의 단편 <리코더 시험>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벌새>스틸컷

영화 <벌새>스틸컷 ⓒ 엣나인필름


- <벌새>의 원형이 된, 미국 유학 시절 꿨던 그 꿈의 정체가 무엇일까. 
"2007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고, 친척, 아는 사람도 없었다. 저로선 뿌리가 뽑힌 기억이자, 학교생활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그때 중학교 3년을 다시 다녀야 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마치 수능을 다시 보는 꿈이라거나 남자가 군대에 재입대하는 꿈을 꾼다거나 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어릴 때 기억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나도 몰랐던 기억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기록을 단편으로 만든 게 <리코더 시험>이다. 1988년이 배경이었는데 보신 분들 반응이 좋았다. 그 이후 은희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하다 해주시기도 했는데 마치 캐릭터가 영화 밖에 살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발전시켰고, 2013년 초고가 나왔다. 2017년 첫 촬영까지 숱한 지원 거절을 경험하는 등 우울한 시기를 보냈지(웃음)."

- 영화는 곳곳에서 따뜻함과 희망을 품고 있다. 개인적으론 은희가 종합병원에 입원한 장면이 인상 깊다. 병실 환자들이 은희를 걱정해주고, 먹을 것도 나눠주는 모습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는지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가족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아이들이 의외의 공간에서 대접받는 경험을 하곤 한다. 저도, 기자님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장소를 병원으로 설정하고 싶었다. 얼마 전 가족 중 한 명이 아파 제가 간호를 했는데 아픈 분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본질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시더라. 환우라는 말이 있듯 아픈 게 기정사실이니 자신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넘나드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더라. 병원이라는 공간이 줄 수 있는 이상한 따뜻함이 있다.

학교에선 날라리, 집에선 마냥 구석에 있는 막내인데 병실에선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걸 또 은희는 은근히 좋아한다. 제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행위예술가를 좋아하는데 그의 작품 중 병원에 대한 기억을 독백하는 게 있다. 어릴 때 많이 아파서 오래 입원했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한 유년기였다더라. 그게 어떤 맥락인지 저도 알 것 같았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위로받지 못하는 걸 예기치 않은 사람에게 받는 것. 은희가 영화에서 마냥 외롭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사랑을 얻고자 노력하고, 희망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 감독의 개성을 드러내는 몇 가지 대사가 있는데 그중 은희가 오빠에게 매번 맞으면서도 참는 걸 알게 된 영지 선생님(김새벽)이 '다음부턴 맞지만 말고 어떻게든 저항해'라 하는 게 기억난다. 어쩌면 지금 시대 여성을 향한 독려일 수 있다고도 느꼈다.
"물론 여성도 그렇고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때 그것을 참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어쩌면 영지 선생님은 은희 인생에서 중요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지."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가족이나 친구에게 위로받지 못하는 걸 예기치 않은 사람에게 받는 것. 은희가 영화에서 마냥 외롭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사랑을 얻고자 노력하고, 희망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 이정민

 
- 영화 속 오빠는 은희와 형제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가치를 그대로 답습한 끼인 세대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영화에서 여성이 아닌 아빠와 오빠 이 두 남성만 크게 울며 통곡한다.  
"전 가부장제에서 승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게임이지. 폭력을 합리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빠와 오빠가 억압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들도 억압당하고 있다는 걸 생각했다. 물론 피해를 입는 이가 여성이기에 전 항상 여성 서사를 말하고 싶다. 그 의도는 영지 선생님의 대사로 전달했고, 감독으로서 전 영화 속 모든 캐릭터를 사랑하기에 아빠와 오빠 또한 나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 이면을 들여다 보고 싶었지.

전 여성보다 남성이 오히려 연약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백인 남성이 너무나 많은 걸 갖고 있지만 실패한 시민으로 존재하듯 가부장제 우위인 남성이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동안 피해자인 여성이 오히려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걸 가진 것처럼 보이는 남성이 뒤틀린, 연약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오빠는 은희를 괴롭히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괴롭힌 건 아닐지. 아빠도 자신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은희는 그걸 되게 낯설게 혹은 여러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드러내는 데 실패한 사람들. 제대로 울어보지 못했으니 종종 맥락에서 벗어난 눈물을 보이는 것이지. 작가로서 전 그들도 보듬고 싶었다."

- 은희 역의 박지후와는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서로 개인사를 얘기하며 영화에 접근했다고 알고 있다.
"자세한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러 삶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 얘기하며 배우들과 함께 많이 울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보시고 배우들이 자신의 얘길 했고, 저 역시 삶을 얘기했다. 그런 대화의 연속이었다. 엄마 역의 이승연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고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하시더라. 마음이 아픈데 희망적이라서 벅찬 감정이 들었다고 하셨다. 또 한 선배는 미팅 때 말씀하시다 눈물을 보이셨다. 감사했지. 어떤 식으로든 깊은 감정을 건드렸으니. 캐릭터가 아닌 삶의 이야기로 확장돼 가는 게 좋았다."

은희의 묵념, 그리고 일상의 위대함
 

 영화 <벌새> 관련 사진.

영화 <벌새> 관련 사진. ⓒ 콘텐츠판다


- 성수대교 붕괴를 바라본 은희의 묵념. 사실 어른들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혹은 피했던 애도를 은희가 대신해 준다는 느낌이었다.
"맞다. <벌새>는 애도의 성격을 가진 편지 같은 영화라 생각했다. 만들면서 힘든 시간도 꽤 길었는데 그때마다 절 다잡을 수 있던 건 이 영화로 편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기억이 있는 모두에게 위로의 편지였으면 했다. 외로운 밤 방에서 혼자 울어본 사람들에게 말이다. 동시에 은희 같은 사람을 위해 국가적 애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참 다이내믹하게 달려왔잖나. 그런 의미에서 <벌새>는 은희의 성장영화면서 국가의 성장영화기도 하다. 둘의 성장통을 담는다고 생각하며 작업했다. 

국가주의자가 되고 싶진 않지만 국가에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건 한편으로 애정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애정을 '우리나라 최고!'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뭘 간과했는지 들여다보고 같이 행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자는 걸로 표현하는 것이지. 다시 은희 개인으로 넘어가면 영화 첫 장면에서 은희가 자신의 집을 못 찾지 않나. 그런 은희가 집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사랑받으려 했다가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하다." 

-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진 않지만 1994년은 문민정부, 즉 독재정권 이후 자칭 민주정부가 들어선 초기였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런 정치 사회적 상황엔 전혀 영향받지 않아 보인다.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요소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가장 개인적인 게 가장 정치적'이라는 유명한 구호가 있잖나. 아주 개인적 일상부터 어떤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린 굉장히 정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인 이름을 떠올리거나 특정 사건을 언급하는데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정치이지 않을까. 영화에서 은희의 절친이 '시험 잘 보면 엄마가 켈빈클라인 사줘요' 하지 않나. 대치동 문화를 함축적으로 보이는 거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어떤 보상으로서 사랑을 받아왔고, 학업 성취도로 부모에게 보답하는 그런 게 과연 맞나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 정말 일상 곳곳에서 우린 정치적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 2005년 직후, 2011년 <리코더 시험>을 발표한 이후 경력 면에선 다소의 공백이 보인다. 어떤 시기였는지.
"2005년 대학을 졸업하고 과연 내가 영화를 할 수 있나 고민하다가 2007년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단편을 만들고 2012년 귀국해서 여러 곳에서 강의하며 생계유지를 했다. 틈틈이 <벌새>를 쓰다가 시나리오를 다 완성했을 무렵엔 하던 일을 다 그만뒀지. 대학원 졸업 후 몇 년간은 영상 모임 등을 하며 내 삶을 들여다 보는, 또 여성적 관점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계기를 맞았다. 자매애를 나누는 경험을 했고, 그것들이 여성으로서 나의 삶을 사랑하도록 했다. 그런 경험과 한국을 벗어났던 경험이 <리코더 시험>과 <벌새>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가장 개인적인 게 가장 정치적’이라는 유명한 구호가 있잖나. 아주 개인적 일상부터 어떤 큰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린 굉장히 정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이정민


- 예전 인터뷰에서 '여성이 이미 소수자이기 때문에 여성 감독은 사회에 꼭 필요한 의미 있는 시선을 작품에 담아낼 수밖에 없다'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이 말에 의하면 이후로도 쭉 여성 서사를 이어나갈 것 같은데.
"여성만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살면서 남녀가 다 같이 존재하잖나. 연령도 다 다양하고. 그걸 여성의 시선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서사들 대부분이 백인 남성 혹은 남성 시선으로 돼 있는데 외국에서도 백인 중심 서사에서 어떻게 하면 소수 인종 서사를 만들어 낼 것인가. 할리우드에서도 흑인 서사, 아시아 서사 등이 나오고 있고 미국에서 특히 그런 물결이 강하게 일었는데, 남성 서사만 있던 한국 영화 안에서도 여성 서사가 판의 균열을 내는 건강한 역할을 할 것이라 본다. 

저도 물론 남성 캐릭터를 함께 다루겠지만 그 시선에 있어서 좀 다르게, 그러니까 여태까지 말해지지 않은 목소리와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여성의 눈으로 본 역사, 여성의 눈으로 본 SF 영화 등 여성이 흔히 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장르를 다뤄보고 싶다." 

벌새 김보라 박지후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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