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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대표 줄리엔 정)'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투두두두둑"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텐트 안은 냉기가 가득하다. 코끝은 땡땡 얼어 감각마저 없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야속하게도 비는 계속 내린다. 크게 내 쉰 한숨은 입김이 되어 눈앞에 흩날린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출발 채비를 한다. 일주일은 채 씻지 못했다. 땀과 비에 절어 몸에서 개 냄새가 난다. 젖은 양말을 신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 한다. 지체하면 비는 곧 눈이 된다. 지난해 9월 중순. 어느덧 이 길에 오른 지 5개월쯤 되던 때다. 이미 수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목적지인 캐나다까지 200km가 남았다.

나조차 멕시코 국경 마을 캠포를 시작해 캐나다 국경인 매닝파크까지 4300km를 걷는 미 서부 종주 트레일, 피시티(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도전'이라며 각 잡고 으스대며 여행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극한으로 자신을 내몰지 않아도 삶은 고통이지 않은가. 난 그냥 재미를 위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행복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소풍'처럼 걸어보려 했다.
    
 Mather Pass(3,671m), 가장 힘들었던 구간 중 한 곳. 매일 같이 고산을 넘는 일은 산을 넘고 있는지 숨이 넘어가고 있는지 모를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도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은 행복에 겨워 환하게 웃고 있었다.
▲ 하이 시에라  Mather Pass(3,671m), 가장 힘들었던 구간 중 한 곳. 매일 같이 고산을 넘는 일은 산을 넘고 있는지 숨이 넘어가고 있는지 모를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도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은 행복에 겨워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장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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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세계여행은 나답지 않아"

피시티를 걷기로 결정을 했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3년 넘게 일과 여행을 병행하며 수십 개 나라를 유랑하고 있었다. 그날은 태국에 체류하며 남미로 가기 위한 일정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긴 여행에 지쳐 있기도 했다. 일종의 매너리즘이었다. 그때 피시티 일부 구간인 존 뮤어 트레일을 걷기 위해 받아놓은 피시티 허가증(퍼밋)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끝도 없는 사막과 수십 개 설산을 넘어야 하는 길. 일찍이 '미친 짓'이라고 규정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길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보다 중요한 척도가 또 있을까. 직관을 믿기로 했다. 피시티 여행을 할까라는 충동에서 비행기 티켓 발권까지 걸린 시간은 일주일. 태국에서 피시티 출발점인 멕시코 국경 마을 캠포에 서기까지 고작 한 달 반이 걸렸다.

정작 결정을 내리고 나니 비자가 문제였다. 피시티 4300km를 걷기 위해서는 평균 5~6개월을 미국에서 체류해야 한다. 장기 여행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 영사관에서 까다로운 심사와 인터뷰를 거쳐야 했다.

긴 여행으로 인해 고정적인 수입도 직업도 없는 내게 가혹하게 느껴졌다. 또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중동 국가를 체류한 기록이 있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자 심사관들 앞에서 면접 보는 것도 싫었다. 일단 3개월 이내로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기로 했다. 그 기간이 일주일이 될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전날 저녁, 캠프사이트에 굶주린 곰 한 마리가 들이닥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하이 시에라 구간은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경과 동시에 야생동물의 위협이 공존했다.
▲ 시에라 구간에서의 흔한 아침 식사 풍경 전날 저녁, 캠프사이트에 굶주린 곰 한 마리가 들이닥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하이 시에라 구간은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경과 동시에 야생동물의 위협이 공존했다.
ⓒ 장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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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맥주를 떠올리며 걷는다

가벼운 마음만큼 길도 순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길은 내 마음과 반비례했다. 피시티 초반은 사막 구간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모질게 뜨거웠고 20kg이 넘는 가방은 어깨를 짓눌렀다. 식도까지 타는 듯한 갈증에 혀를 길게 뺀 개처럼 매일 물을 찾아 헤맸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입안엔 모래가 서걱거렸다.

사막 구간 이후 중부 캘리포니아인 시에라 구간에서는 3000~4000m 고산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넘어야 했다. 켜켜이 쌓인 눈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끝없이 들러붙는 모기, 울렁거리는 고산병이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매일 힘들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광활한 대자연과 변화무쌍한 생태계 속에서 나그네처럼 유랑하고 싶었다. 그저 곧 당도할 마을에서 마실 시원한 맥주를 생각했다. 하루는 마을에서 쉬며 옛 친구와 전화를 했다. 친구가 말했다.

"너 매번 힘들다고 칭얼대면서도 말끝마다 '그래도 행복해'라고 항상 덧붙이는 거 알아? 좋아 보여."
     
오롯이 생존에만 특화된 길 위에서의 삶에 특성상 위생은 딴 세상 이야기와 같은데, 하이커들 사이에선 해진 신발, 구멍 난 양말, 더러운 발과 냄새를 훈장처럼 과시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내 발은 역대급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 하이커의 발 오롯이 생존에만 특화된 길 위에서의 삶에 특성상 위생은 딴 세상 이야기와 같은데, 하이커들 사이에선 해진 신발, 구멍 난 양말, 더러운 발과 냄새를 훈장처럼 과시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내 발은 역대급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 장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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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단순함'이었다. 단순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지나온 삶에서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길에서의 삶은 더없이 간단했다. 걸을 것인가, 멈출 것인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에 머물 틈이 없었다.
   
60대 하이커의 하얀 거짓말

피시티 하이커들은 대부분 적은 예산으로 여정을 이어 나간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수입 없이 6개월을 여행한다는 건 경제적으로 힘든 일이다. 나는 가난뱅이 하이커 중에서도 유독 더 가난했다.

이미 3년 넘도록 여행을 하고 있었고 피시티 이후에도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리띠를 더 졸라맸다. 하이커들이 이따금 마을에 들어가 모텔에서 잠을 청할 때 나는 캠핑장에 갔다. 다른 하이커들이 식당에 가서 만찬을 즐길 때 난 1달러짜리 햄버거 서너 개로 주린 배를 채웠다.

미국인 하이커 제로드 아저씨와 재미난 일이 있었다. 60대 초반쯤 되던 제로드는 군 복무 시절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로드와 캘리포니아주 액톤(Acton, 운행 24일째, 운행거리 711km)의 유료 캠핑장에서 함께 묵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인스턴트 파스타에 땅콩을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제로드 아저씨가 나를 불러냈다.

"헤이, 진.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먹을 걸 좀 사 왔는데 욕심을 부렸는지 너무 많이 사버렸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좀 먹어줘. 남으면 버려야 되는데 아깝잖아. 하하."

그렇게 말하고 펼쳐 보인 음식은 중식당에서 사 온 계란국과 청경채 볶음, 볶음밥, 탕수육 등이었다. 누가 봐도 2인분 이상을 사온 것이었다. 심지어 아시아 음식! 그가 나를 생각해 고른 게 다분했다. 비록 내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피시티에서의 사람들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긴 사막을 지나 시에라 구간에 들어서 처음으로 만난 호수 치킨 스프링 레이크(Chicken Spring Lake). 신이 나 수영을 하겠다고 들어갔다가 고산의 눈이 녹은 얼음장 같은 찬물에 몸만 헹구고 빠져 나와야 했다
▲ 수영을 빙자한 목욕재개 긴 사막을 지나 시에라 구간에 들어서 처음으로 만난 호수 치킨 스프링 레이크(Chicken Spring Lake). 신이 나 수영을 하겠다고 들어갔다가 고산의 눈이 녹은 얼음장 같은 찬물에 몸만 헹구고 빠져 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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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끝에서 맛본 소주의 맛

운행 42일째. 기나긴 사막 끝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adows, 운행거리 1130km)에 도착했다. 이곳은 하이커들이 사막 구간에서의 고생을 격려하고 눈이 쌓인 하이 시에라 구간을 진입하기 전 고지대 설산 산행을 준비하는 장소다. 이 때문에 하이커들은 이곳 보급지에 미리 물품을 택배를 발송해 놓는다. 물론 나도 택배 박스 하나를 보내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내 상자 안에는 동계 장비가 아닌 한국 라면과 고추 참치, 1ℓ 소주였다! 나는 자타가 공인한 애주가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바로 가게로 들어가 18캔짜리 맥주 한 박스부터 집어 들어 대낮부터 그걸 물처럼 부어라 마셨던 나다. 미국 친구들은 그런 나를 고주망태라는 뜻의 '위노(WINO)'라고 불렀다.  

택배 상자에서 꺼낸 소주는 흰 페트병에서 영롱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하이커들과 칠흑 같은 사막 밤하늘 아래서 병째 입을 대고 돌려 마셨다. 병이 한 사람씩 돌아갈 때마다  '크으~'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밤하늘 별을 안주 삼아 마시는 소주는 지나온 갈증을 모두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달큰하게 취해 바라본 셀 수 없이 많은 별은 오직 이 순간, 나를 위해서 빛나고 있었다.
 
반복되는 텐트에서의 생활은 고됬지만 황혼의 석양, 새벽녘 밤하늘에 모래를 뿌려 놓은 듯 많은 별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할 때면 오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 뜨거운 사막에서의 낭만 반복되는 텐트에서의 생활은 고됬지만 황혼의 석양, 새벽녘 밤하늘에 모래를 뿌려 놓은 듯 많은 별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할 때면 오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 장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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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장진석, #PACIFIC CREST TRAIL, #피시티, #P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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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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