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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봄 이후, 나는 천천히 예민해졌다. 서른이었다. 근무했던 단체를 포함한 생명 기증 단체, 구호 단체들은 배가 가라앉자 모든 마케팅을 중지했다. 일시 후원이 가야 할 곳이 있었다. 할 일이 없어지고, 나는 매일 낯선 경험을 쌓았다. 출근하면 뉴스를 보며 습관처럼 울었던 기억, 주말에 종종 안산을 돌았던 기억, 퇴근 후 천막을 서성여 어느 의자나 바닥에 앉아 리본을 만들고 홍보물을 접었던 기억 등. 천막에 앉아있을 때면 애달파하는 운동가나 유가족들이 많은 말을 쏟아냈는데, 다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나의 애도는 바빠지기 전 '충분히' 슬퍼하고, 시간과 돈을 내는 것까지였다. '잊지 않겠습니다' 베란다 현수막을 걸었을 때 이웃으로부터 걱정된다며 괜찮겠냐는 연락을 받았을 정도로, 내 기억 내가 마음대로 하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눈치 보는 사회에 모두가 살았으니까. 그 해 봄까지는 그랬다.

그 해 여름, 휴가의 종착지가 진도였다. 아직 못 올라온 사람들에게 빨리 나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팽목에 긴 편지를 남겼다. 그 날 저녁, 내 마음대로 걸 수도 없는 현수막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끝내 울었고, 술을 많이 마셨다. 서울에서 다시 쳇바퀴 도는 일상을 시작했지만 이미 내 안 어딘가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직장 생활 7년차, 소문난 워커홀릭.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일상을 참을 수 없었다. 배가 가라앉아도 잘 돌아가는 이곳은 언제든 나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죄악까지 짊어진 배가 가라앉았다고 믿었고 참회할 방법을 몰라 쩔쩔맸다. 아, 그렇구나, 나는 예민해져있었다. 휴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정했다.

"죄송해요, 국장님. 더 이상 서울에서 못 살 것 같아요. 퇴사하고 싶어요."
 
빗속에서 기도를 올리는 분들 옆으로 하늘나라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다. 많은 분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전원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기원드렸다. 2014.8.4
 빗속에서 기도를 올리는 분들 옆으로 하늘나라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다. 많은 분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전원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기원드렸다. 2014.8.4
ⓒ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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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내 공간과 커뮤니티를 잃은 지 오래였기에. 내가 나고 자란 하왕십리 달동네에선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쉬지 않고 뉴타운 사업이 진행됐다. 뉴타운은 공간도, 사람도 새롭게 구성했다.

20살, 나는, 나만, 무사히 뉴타운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왜 하나 같이 삐삐도 없이 가난했는지, 왜 하나 같이 이사의 뜻을 아이들에게 미리 알려줄, 마음이 넉넉한 부모를 가지지 못 했는지, 왜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시를 개발해도 되겠냐고 묻지 않았는지 오래 생각했다. 뉴타운이라는 재난에 한 번 뿌리가 뽑히고 나서 10년 동안 재이식되지 못하고 서울에 걸쳐져 살았다. 그리고 배는 한 가닥 남은 실을 끊어냈고, 시스템에 부역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당시 나의 애도였다. 나는 서울을 떠났다.

나는 제주 기억공간re:born을 만나고 나서야 사회적 애도를 시작했다

그 해 가을, 제주에 도착했다. 1년 반 동안 제주시와 서귀포시 직장을 전전했다. 동료들의 말 한 마디, 작은 사건 하나, 부패라고 할 수도 없는 작은 일상들. 어쩐지, 타협할 수 없는 어떤 순간 또는 무언가 부당한 장면을 자주 마주했다. 분명히 머릿속에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좌표가 있는데 목소리는 항상 사고를 거치지 않고 터져 나왔다.

적대와 불신의 늪에서 나는 어느새 싸가지 없는 말썽쟁이가 됐다. 예민함은 나를 날 서고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무런 사회적 자본이 없는 여성 청년이 기댈 커뮤니티도 마땅히 없었다. 여행자 시절 베이스캠프였던 한 게스트하우스를 주말마다 찾아가 스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어디서부터 부유해 온 걸까. 오래 생각했다.

이듬 해 봄, 기억공간 re:born 개관 전시 포스터를 보고 선흘에 갔다. '아이들의 방'이 거기 있었다. 안녕, 너희도 제주에 왔구나.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사람책 프로젝트의 관리자가 되어 일로 만난 황용운의 제안을 받게 됐다.

"은영님 페이스북이랑 카카오톡 프로필이 다 노란 리본이더라고요. 느낌 아니까. 같이 프로젝트 해봐요."
 
기억공간 re:born의 개관 전시였던 '아이들의 방' 포스터
 기억공간 re:born의 개관 전시였던 "아이들의 방" 포스터
ⓒ design by 일상의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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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없는 이유로 낚였는데, 결국 노란 리본이 묶어준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함께 2주기 청소년 토크콘서트를 기획했다. 내가 기획한 생애 첫 시민 활동이었다. 희생자 형제자매들과 제주 청소년들을 패널로 세웠다. 대안학교 볍씨 학생들과 제주평화나비 대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꼼꼼한 문화예술 기획자와 제주 청년들이 구멍 난 행사 곳곳을 메워줬다. 노란 리본에 눈물지을 줄 아는 친절한 모금, 대관 담당자를 만났다. 그 과정 전반을 황용운, 기억지기들이 함께했다. 그리고 나는 작은 인연들을 조금씩 가꿨다.
 
세월호 참사 2주기 청소년토크콘서트 '하이헬로하와유'를 마치고
 세월호 참사 2주기 청소년토크콘서트 "하이헬로하와유"를 마치고
ⓒ 고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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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남은 기억공간, 사람을 키우는 기억운동

이후 나는 선흘에 회의를 하러, 기억지기들을 만나러, 누군가를 안내하러, 밥을 먹으러, 놀러, 그냥, 자주 갔다. 그렇게 하릴 없이 모이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다. 인연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당시 막 시작한 녹색당 활동과도 포개졌다.

이어진 사람들과 제주 곳곳에서 특조위의 중요한 국면마다 서명 활동과 퍼포먼스, 토크 콘서트를 했다. 이어진 사람들과 촛불을 들어 책임자를 탄핵했다. 이어진 사람들과 제주x시민평의회를 7개월 동안 15회 진행했다. 이어진 사람들을 취재했고, 선흘에서 기억공간이 쫓겨난 이야기를 울며불며 웹진에 담았다. 이어진 사람들과 제주퀴어문화축제를 만들었다. 이어진 사람들과 제2공항 반대 선전전으로 제주도 곳곳을 누볐다.

그게 그 당시 나의 최선의 애도였다. 마침내 나는, 나의 예민을 자책하는 것을 그만뒀다. 예민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으므로, 어깨를 펴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제주 플리마켓 '벨롱장' 서명운동 중 기억지기들과 함께
 제주 플리마켓 "벨롱장" 서명운동 중 기억지기들과 함께
ⓒ 정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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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플리마켓 ‘벨롱장’ 서명운동 중 기억지기들과 함께
 제주 플리마켓 ‘벨롱장’ 서명운동 중 기억지기들과 함께
ⓒ 정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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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려 오라관광단지(제주시와 한라산 국립공원 사이 5조8천억원 규모의 관광지 개발사업) 환경영향평가를 동의해준다면 낙선운동을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놨다. 선거구 획정 과정에 비례대표를 축소한다는 지역 국회의원들을 규탄하는 '여름의 촛불'을 올렸다. 국토부 장관을 찾아가 제주에 제2공항을 반대하며 42일 굶은 사람이 있는 것을 아느냐며, 왜 우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 때 왜 묻지 않았냐'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을 위정자들에게 던졌다.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는 저들에게 따져 묻는 것이, 나의 서사와 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깨시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다.

그리고 나는 2018년 지방선거 제주도지사 후보를 거쳐, 국가폭력에 책임을 묻고 생명을 말하는 녹색 정치인이 되었다(낙선했으니, 정치인으로서 나의 애도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굳이 밝힌다).
 
2018년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 당시 시민 상주를 치르는 필자
 2018년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 당시 시민 상주를 치르는 필자
ⓒ 박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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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가라앉은 지 5년 4개월이다. 2019년 8월, 이 글을 쓴다. 기억공간re:born이 간첩조작 사건을 기억하는 '수상한 집' 3층을 얻은 기쁜 달이다. 선흘에서 쫓겨난 후 파편이 되었던 사람들이 이 수상한 공간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간첩조작 피해 가족들, 기억지기들, 제주 4·3 유가족, 제2공항과 제주동물테마파크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 환경 운동하는 청소년들... 온갖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 기억공간re:born은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야호!)

우리가 직접 만들 진짜 애도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제주 '수상한 집'
 제주 "수상한 집"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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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안다. 지금 우리는 부정의를 바로 잡고, 법과 제도를 만드는 사회적 애도를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특조위 운영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방치하는 자유한국당과 위정자들을 규탄하고 5년 4개월 전 진상 규명, 보도 참사, 인권 모독에 대한 전 방위적 책임을 부정의한 사회 곳곳에 묻는 것이 기억공간에 남은 사람들의 애도다.

2020년 4월 15일을 세월호 심판의 총선으로 만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 사회 모두가 바쳐야 할 진짜 애도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고은영 기자는 제주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입니다.


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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