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각의 제국>(1976) 포스터

영화 <감각의 제국>(1976) 포스터 ⓒ 조이앤클래식

 
일본의 극우세력이 경제전쟁의 포문을 연 지난 7월, 서울의 극장가엔 문제적 영화 <감각의 제국>이 상영됐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발표한 시기는 1976년이다. 4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감각의 제국>이 2019년 서울의 예술영화극장에서 상영됐는데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았다.

성에 대한 표현의 수위는 여전히 높은 제한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품 자체는 포르노그래피를 표방했음에도 에로물이라기보다는 현재 상황에 예리한 메스를 대는 한편의 부조리극으로 보였다. 영화는 감각적이라기보다 초감각적인 방식으로 '상실한 시대'를 호명해 시대를 뛰어넘어 반복되는 '상실의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1970년대는 냉전을 추동하던 이데올로기 투쟁이 주춤하고 국가 간의 이익이 추구되던 시기였다. 이 시대를 역사는 데탕트의 시대로 부른다. 1975년, 미국과 동서유럽국가 35개국은 헬싱키에 모여 주권존중과 전쟁방지 및 긴장완화를 약속한다. 이 협약으로 화해의 무드는 정점을 찍었다. 이로써 30년간 지속됐던 전후 냉전체제는 종식되는 듯했다.

과거 반공을 국시로 한 우리나라의 유신정권도 이 시기만큼은 북한에 특사를 보내고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역시 중국과 평화조약을 맺는 등 미국이 주도한 평화무드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를 맞은 나라들이 예의 그렇듯이 일본 내부의 정치 환경은 보수적으로 흘러갔으며 사회·문화는 허무주의경향을 띠게 된다.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사건의 의미
 
1970년 겨울 초엽에 있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사건은 이와 같은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패전 후 허무주의와 탐미주의를 오가며 일본 문단에서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던 그는 자위대 간부들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다가 군국주의 부활을 부르짖으며 엽기적인 공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할복사건은 일본이 우경화로 방향을 선회하는 일종의 포문이랄 수 있다. 그가 죽음으로써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부르짖은 것은 일본이 주권국가를 넘어 궁극적으로 대일본제국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1925년생으로서 45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미시마의 마지막 뇌리엔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향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데탕트의 분위기가 최고조였던 헬싱키협약 바로 이듬해에 영화 <감각의 제국>이 발표됐다. 세계적인 평화의 무드와는 반대로 <감각의 제국>엔 당대 일본사회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극우의 준동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불안한 정서가 녹아있다.

주변국의 평화는 일본의 보수정치세력에겐 동요를 일으키는 요소인 듯싶다. 재난이 끊이지 않는 기구한 땅의 기운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적을 설정하고 내부의 결속을 도모해야 하는 열도의 속성상 주변국 간의 화해무드는 일본 극우 사회에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요소로 작동하기에 충분하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일부 세력에 의해 미시마 사건은 영웅시됐다. 이후 일본사회엔 점차 극우세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오시마는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있었던 성 스캔들을 소환해 감독이 직면한 당시대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집착을 넘어 도착적인 극단적인 성애 
 
 영화 <감각의 제국>(1976) 스틸 컷

영화 <감각의 제국>(1976) 스틸 컷 ⓒ 조이앤클래식


이처럼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30년대와 70년대, 두 개의 시대적 맥락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이해 불가한 성기 집착, 절단 등과 같은 극단적 표현 속에 숨겨진 저의에 접근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가히 포르노그래피를 표방한 것처럼 외설적이다. 극단적인 성애는 집착을 넘어 도착적이다.

두 남녀가 만나 서로의 성기에 집요하게 천착한다는 설정 외에 딱히 내러티브랄 것도 없다. 정사 장면이 지루하기까지 하다. 극의 결말 부에 가서야 두 남녀의 교접은 마침내 끝이 난다. 여자가 남자의 목을 졸라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을 맞게 하고 성기를 잘라내기 때문이다.

사실 극 중에선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잠깐 등장할 뿐이다. 남자주인공 기치가 이발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조우하는 일본 황군의 행진은 은유적이다. 거리에 있던 군중들이 군대를 연호할 때 기치는 움츠러들고 기죽어 보이는 모습으로 그들을 피해간다.

이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파시즘체제로 전환한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의 일본사회의 분위기를 징후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이와 같은 설정을 위해 감독은 1938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호명한다. 두 연인의 엽기적인 성애와 도피행각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 사건은 당대 군국주의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던 일본지식인사회의 니힐리즘(허무주의)적인 분위기를 담아내기에 매우 주효한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시마 감독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포르노그래피 수준의 표현 수위를 높이며 성기의 노출은 물론 실제 삽입 성교, 가학과 피학적 성행위의 묘사, 남성 성기 절단 등과 같은 이미지 등 모든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제작 당시인 1970년대 우경화되는 일본사회에 대해 냉소로써 비판을 시도한다. 이러한 이유로 영화 상영 후 외설성 시비로 이어지는 오랜 법정공방은 영화 내러티브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군대와 무장으로 거대하게 발기된 국가 
 
기자회견하는 아베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 자리에서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 기자회견하는 아베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 자리에서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 연합뉴스


같은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영화를 관통하는 발기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랄 수 있다. 남자주인공 기치는 유곽의 주인이다. 군대와 무장으로 거대하게 발기된 국가 외에 유일하게 발기가 허락된 곳은 유곽뿐이다. 그리고 극 중 등장하는 남자들 중 주인공 기치만이 내러티브 내내 발기돼 있다. 그리곤 발기가 가능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극의 초반부에 나온 행려 노인은 궁지에 몰린 자신을 도와준 여자주인공 사다에게 대뜸 그녀의 음부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노인의 성화에 마지못해 사다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 노인에게 음모를 보여준다.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드러났음에도 노인의 성기는 발기불능이다. 애처롭기까지 한 표정을 짓는 노인을 뿌리치고 사다는 제 할 일을 한다. 코믹해 보이기까지 한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이 장면은 극 전체에 대한 일종의 환유장치다. 발기와 발기 불능의 이미지를 반복함으로써 발기된 군국주의에서 발기가 허락된 장소가 어디인가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사다가 기치와의 도피행각 중 돈이 필요해 그의 은사인 교장을 만나면서 정사를 시도하지만 그 역시 발기불능이다. 사다는 삽입 성교를 시도조차 못하는 교장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명령한다. 마지못해 사다를 때리지만 교장은 난처한 듯 관계에 집중하지 못한다. 이처럼 기치를 제외한 모든 남자는 성교가 불가능한 이들이다. 현명한 노인 혹은 사회윤리를 가르쳐야 할 선생과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게다가 욕정과 같은 동물적 감각마저 잃어버렸다. 사도마조히즘을 강요하는 사다의 도발을 통해 당대 시민이나 지식인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조소와 조롱을 가한다. 오직 발기를 유지한 자는 유곽의 주인인 기치뿐이다. 그는 특유의 공허한 웃음소리로 주변에 대한 인식을 차단한 채 오로지 삽입 성교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시한부의 운명으로 끝을 맺는다. 발기가 허용된 것은 유일하게도 전체주의로서 국가라는 거대한 남근뿐이기 때문이다.

발기를 멈추는 순간은 죽음을 의미 
 
 영화 <감각의 제국>(1976) 스틸 컷

영화 <감각의 제국>(1976) 스틸 컷 ⓒ 조이앤클래식


거대하게 발기된 국가와 군대를 직시할 힘을 잃고 외면하는 시민, 지식인 사회에 허락된 것은 부조리로서 무의미한 도착적 성애뿐이다. 영화에서 발기불능의 이미지는 재갈을 물린 사회에 대한 은유이다. 유곽 역시 현실도피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는 군국주의시대에 성에 개방적인 분위기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잔뜩 발기된 총포의 탄환으로 사정되지 않기 위해선 유곽에 숨어 살과 살에 탐닉해야하기 때문이다.

발기를 멈추는 순간은 죽음을 의미한다. 전쟁의 화포에 실려 총탄으로 사정될 군인들에게 그들 식으로 정신대라는 이름의 위안소에서 어린 여성들을 상대로 사정을 권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전장에서조차 유곽을 설치해 피지배국여성들을 유린한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의 민낯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유곽의 주인 기치에게 발기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주인공 사다의 주문은 역설적이다. 외부로 뻗어 발기된 군국주의와 같은 야만은 상식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뭉개고 균형감과 건강함을 잃은 시민사회를 도착에 빠지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극의 말미에 그녀가 거세한 성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일본의 극우가 준동하는 상실의 시대, 역설로서 일본 시민사회의 혀다.
 
생각해보면 오시마 나기사의 니힐리즘과 미시마 유키오의 허무주의는 상실한 대상이 정반대에 위치한다. 후자의 것이 국가와 동일시된 망상에 가까운 정체성으로서 군국주의라면, 전자가 잃어버린 대상은 흩어진 주체로서 시민들의 연대와 저항의 몸짓이다. 일본이 화(和)를 강조하는 것은 그 사회가 화하지 못함에 대한 반증이다.

혹독한 자연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 자체가 미덕인 땅에서 이의나 이탈이란 것은 허락되지 않고 전체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일본이다. 이와 같은 강요된 조화를 좋은 것으로 믿는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전체주의가 용이한 나라가 일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본 극우에겐 자신들의 패악성에 대한 반성은 물론 자각조차 있을 수 없다. 결국 그들은 더욱 악랄해져 간다. 따라서 일본의 건강한 지식인사회와 시민연대는 우리보다도 더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싸우는 전사들이랄 수 있다. 우리의 시민사회는 일본의 도발에 분연히 맞서면서도 일본의 깨어있는 시민들과 끊임없는 소통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그들 역시 상실한 시대를 되찾고 싶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문화평론가이자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감각의 제국 거세의 역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로 재직중이며, 현재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문화정치에 관한 칼럼을 아시아투데이에 연재중입니다. 출판한 저서로는 영화로 읽는 우리시회- 역설과 아이러니의 대한민국, 문화정치로서 영화읽기가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