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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에서 다시 만난 '심청가'

20일 오후 KBS 2TV '불후의 명곡'은 '내 친구' 특집으로 방송됐다. 젊은 명창, 유태평양과 민은경이 듀엣으로 부른 '아버지'는 인순이가 부른 원곡에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더해 재구성되었다.

네 명의 소리꾼이 도포에 갓을 쓰고 북을 치며 배경 소리를 더해 대중음악과 전통예술 음악의 입체적인 콜라보를 형성하는 구성은 독특하고 신선했다. 가요와 판소리는 구강내 발음 지점, 공명의 위치, 호흡의 복압 부위 등의 발성법 차이로 순간적인 전환이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유태평양과 민은경은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동시에 두 가지 창법을 오가며 수준 높은 열창을 보여 감동을 자아냈다.

이 깊고도 장중한 작품 구성은 토요일 저녁시간대에 TV 앞으로 모여든 시청자들의 품격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는 어려운 도전이다. 그 만큼 우리 대중음악과 시청자들의 높은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인순이의 '아버지'와 함께 어우러진 '심청가' 중 눈대목(판소리 한 바탕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을 들으며 지난 6월에 있었던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중 창극, '심청가'가 다시금 떠올랐다. 극중 심봉사 역을 맡았던 유태평양과 어린 심청 역을 맡았던 민은경, 두 젊은 소리꾼의 열창과 호흡이 TV 화면 속에서 잠시나마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본질에 다가간 국립창극단의 '심청가'
 
2019년 6월 5일부터 16일까지 공연된 국립극장 창극단의, '심청가' 주요 장면
▲ 국립창극단 "심청가" 공연 주요 장면 2019년 6월 5일부터 16일까지 공연된 국립극장 창극단의, "심청가" 주요 장면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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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공연된 국립창극단의 '심청가'는 극단 미추 대표이자 예술감독인 손진책 감독의 대본과 연출로 신선하면서도 판소리의 본질에 과감히 다가서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재탄생 하였다.

이는 손진책 감독의 배우자이기도한 김성녀 교수(현 중앙대)가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 재임 시 판소리 5마당의 현대적 재해석에 대한 포부를 품고 기획한 작품이다.

김 교수는 30여 년간 '심청가'를 연구하며 이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선보여 왔던 손연출을 적임자로 보고 '심청가'의 대본과 연출을 맡겨 작년 4월 25일부터 5월 6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성황리에 초연한 바 있다.

손 연출은 초연작품을 플랫폼으로 기억하며 약간의 심화를 더한다는 각오로 다시 올해의 무대를 준비했다. 올 6월 5일부터 6월 16일까지 국립극장(달오름)에서 열띤 성원 속에서 작창자 안숙선, 음악감독 이태백, 예술감독 유수정과 더불어 유태평양(심봉사), 민은경(어린 심청), 이소연(황후심청) 등 국립창극단원들과의 팀워크로 12차례의 공연을 이어갔다.

기존의 창극들에서 화려한 무대 세팅, 조명, 소품 및 무대의상을 통해 화려한 시각적 색채로 음악을 지원했다면 이번 창극, '심청가'는 시각적인 지원을 최소화하여 오로지 소리에 몰입할 수 있도록 무대를 단순하게 디자인 했다. 가옥이나 시설물을 대신하는 구조물은 단색의 원목으로된 평상, 의자, 이동식 벽면 몇 개가 전부였다. 배우들의 의상도 화려한 소재와 장식으로 한복의 원형을 가리는 최근의 추세에 반하여 은은한 색채에 단아한 디자인으로 정통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미니멀한 현대적 감각에도 충실했다.

사실 본격적인 몰입에 들어가기 전 초반까지는 이 믿을 수 없는 단조로운 구조에 빠르게 녹아들지 못하고 '혹시 공연단의 리허설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점차 단순한 시각 디자인이 주는 의미를 스스로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 고유의 수준 높은 예술음악, 판소리에 대한 제작진의 높은 자존감이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부채 하나를 들고 홀로 서 일인다역으로 온갖 다양한 인물의 심정과 소리를 표현하며 몇 시간이고 눈과 귀를 사로잡는 전통 판소리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지고지순한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시각 디자인 뿐 아니라 여러 장면의 눈대목에서 관현악단의 화려한 반주를 최소화하고 오직 북장단만으로 소리의 마디마디가 그대로 살아 꿈틀대는 장면들을 시시각각 만나볼 수 있었다.

심청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공연을 관람 후 함께한 여러 분들과 감상 후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창극으로서의 참신하고 전위적인 시도나 높은 수준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극본의 내용적인 면에서 여러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과연 개연성이 충분 한가'대한 엇갈린 소견들이 있었다.

심지어 '뭘 믿고 목숨을 바쳐? 심청이 너무 순진한 거 아냐?' 라든가 '눈 못 보는 심정이 괴롭다지만 효심 지극한 딸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공양미 삼백 석에 눈뜨게 해준다는 화주승의 말을 그대로 전한 심봉사의 주책없는 태도'를 나무라기도 했다. 대체로 '조선시대의 유교와 불교의 문화적 배경에서 써진 심청의 '효' 의식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바탕에 짙게 깔려 있었다.

그 지점에서 '고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품게 되었다. 과거와 확연히 다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고전은 과연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작품 속에서 심청은 자신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눈 못 보는 한을 풀고자 한다. 그 마음을 갸륵하게 여긴 옥황상제는 서해용왕에게 명하여 물속에 뛰어든 심청을 다시 연꽃에 띄어 환속하도록 한다. 왕후가 된 심청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잔치를 열었고 우여곡절 끝에 딸과 상봉한 심봉사가 눈을 뜨자 덩달아 다른 맹인들도 모두 눈을 뜨는 기적이 펼쳐진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권선징악적 구조다. 그러나 개연성이 희박해 보이는 지점들에 초점을 맞춰 '심청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를 헤아려 보자 점차 새로운 시선이 열렸다.

왕후가 된 뒤에도 아버지의 안녕을 염려한 심청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은 '맹인 잔치'였다. 인당수에 몸을 던지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에도 이미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심청은 왜 굳이 목숨을 건 모험'을 하려했던 것일까? '심청의 행위가 한낱 어리숙한 치기에서 비롯되었다면 오늘날까지 심청의 이야기가 고전으로 읽히고 불리는 게 가능했을까?'

오늘의 우리에게 심청은 누구인가?

이야기를 현대 속으로 가져와 보았다. 곧 세상을 향한 오랜 열망과 바람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강한 열망을 드러내고 생을 마감한 여러 인물들과 연결되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뱃머리에 합장하고 몸을 던진 심청이 어디 한 둘 이었던가? 그들은 세상이 한 방에 달라질 거라는 기대에 선뜻 고귀한 목숨을 내어 준 것이 아니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강렬한 바람이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파장을 일으키며 영속케 하겠다는 처절한 기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목숨을 버리지 않았으되, 자신의 안위와 편익을 버리고 공의로움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삶을 통째로 바친 산 제물 같은 숭고한 삶은 또 얼마나 많은가. 더불어 의도치 않게 시대의 희생물이 되고만 수많은 영혼들과 그들을 보낸 뒤 세상을 질타하며 떠난 이의 바람을 이어가는 가족과 이웃의 처절한 절규는 또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곽씨 부인을 보내는 심봉사의 애절한 심정, 딸을 떠나보내는 아비의 애끓는 심정, 뱃머리에 몸을 던지는 심청의 처절한 심정까지도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있었지만 심봉사를 비롯하여 모든 맹인과 눈먼 짐승들까지 눈을 떠 광명천지를 보고 요순천지를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그만 울컥 울음이 터졌다. 결국 존재와 세상을 향한 절대적 사랑이 이루게 될 꿈과 미래를 극은 피토하듯 힘차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도창(창극이 진행되는 동안 극중의 인물이 아닌 자가 무대 옆에서 판소리나 아니리로 관객의 흥을 돋우는 해설자의 역할)과 합창으로 이어간 마지막 대목은 심청가가 주는 오늘에의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무심한 인당수야 요내 한말 물어보자.
검은 구름 자욱이 먼 고향땅 바라보며, 뱃전에 울며 가시던 고운이가 몇이던고.
물 깊어 천길이면 그대 원은 만길이라,
다 못한 그 마음일랑 꽃이 되어 돌아오소.
푸른 저 물결 위에 연꽃 되어 눈을 뜨소.

천천 만만세를 누리소서.
이 노래가 그치어도 고운님은 영세(永世) 불망(不忘)이라"


관람을 마치고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마지막 대목이 가슴 속에 남아 세상을 들여다보는 돋보기 구실을 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도처에 심청이 있고, 화주승이 있다. 만경상인과 뺑덕어미 또한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눈 못 뜬 심봉사들은 스스로 화주승의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남경장사 선인들의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눈 못 뜬 이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심청이가 되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누군가는 스스로 진실에 눈 뜨려하지 않고 심청이들의 헌신과 구원에 기대어 살아간다. 또 누군가는 그 와중에도 눈 어두운 이들의 마음까지 후려쳐서 한 밑천을 챙기기도 한다.

각자도생의 경쟁사회에서 '나 살기 급급하여 누군가의 어이없는 희생에 제대로 눈 맞추지도 못하고 뺏고 뺏기며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심청가'가 보여주고 싶은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지 시대착오적 '효'가 아닌 존재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사랑이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뜨거운 외침이라고 생각한다.

꽃 같은 아이들마저 천길 만길 바다 속으로 떠나 보낸 우리시대에 과연 누구에게 눈 맞추며 우리네의 삶 속에 지속되고 있는 바람들을 이어갈 것인가?

'심청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금 묵직하게 물어오고 있는 것이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의 1주기를 기리며...

태그:#창극, 심청가, #불후의 명곡, #유태평양, 민은경, #노회찬, #고 노회찬 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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