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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가 한 분씩 떠나고 있다. 지난 14일엔 이영숙 할머니가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영숙 할머니는 지난 4월 29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분이다. 미쓰비시뿐 아니라 일본 정부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상태에서, 또 한 분의 '산 증인'이 운명하게 된 것이다. 

소송대리인단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민족문제연구소·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7월 16일 자 보도자료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올해만 해도 1월 김중곤 원고, 2월 심선애 원고에 이어, 7월 14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이영숙 원고까지 세 분의 원고가 고령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며 "다른 원고들 역시 병마와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2019년 3월 19일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일제강점기 국외 노무동원 피해자를 모아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청구 소송 계획을 밝히고 있다.
 지난 2019년 3월 19일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일제강점기 국외 노무동원 피해자를 모아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청구 소송 계획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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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 할머니는 지금의 광주수창초등학교인 북정보통학교 고등과(중학교급)에 재학할 때인 1944년 5월경 일본제국주의와 미쓰비시중공업에 의해 강제징용됐다. 당시 15세였던 그는 자신이 강제징용되는 줄도 몰랐다. '학교를 책임지고 졸업시켜주겠으니, 돈도 벌 겸 일본 가자'는 말을 듣고 떠났던 것이다.

당시 이영숙 할머니와 함께 전라남도에서 끌려간 여자근로정신대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승우 전남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 여성의 손해배상청구'에 소개돼 있다. 이분들은 할머니와 같은 시기에 같은 전라도에서 징용된 뒤, 일본 최대 재벌인 미쓰비시그룹 산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끌려갔다. 이분들이 징용될 당시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아래의 '갑녀'는 소녀 이영숙이 아니라, 함께 끌려간 다른 피해자다.
 
"갑(甲)녀 등은 1944년 5월경 자신이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초등학교의 교장, 담임교사나 이웃 조의 애국반 반장으로부터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여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시켜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였다. 갑녀 등의 가족들은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근로정신대 지원을 권유한 사람들은 만 13, 14세에 불과한 갑녀 등에게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협박하기도 하였다."
- 한국동북아학회가 2015년 발행한 <한국동북아논총> 제76호.
 
감언이설뿐 아니라 협박까지 동원됐던 것이다. 소녀 이영숙은 고등과 4명 및 후배 10여 명과 함께 일본 중부이자 도쿄 서남쪽인 나고야로 끌려갔다. 기차를 타고 배로 갈아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대(大)이동이었다.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배치된 순간부터 소녀 이영숙은 모든 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시켜주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주경야독 같은 것도 없었다. 있다면, 주경야경이었다. 기다리는 것은 강제노동과 중노동뿐이었다. 그는 비행기 부속품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을 담당했다.

한국 청년들의 눈물을 바탕으로 성장한 미쓰비시
 
 서울시 용산역 광장에서 찍은 강제징용 노동자상.
 서울시 용산역 광장에서 찍은 강제징용 노동자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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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만 힘든 게 아니었다. 정신도 극도로 힘들었다. 인권이 완전히 무시된 노역장이었기 때문이다. 위 이승우 논문은 "갑녀 등은 작업을 하는 도중에 곁을 보거나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고, 화장실에 갈 때도 허가를 맡아야 했고, 일본인 반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면서 "동료 중에는 작업 도중에 절단기에 왼쪽 집게손가락이 잘리는 상해를 입는 등 작업 도중 다치기도 했는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식욕이 왕성한 10대 중반인데도 식사 공급마저 제대로 받지 않았다. "식사의 양이나 질은 현저히 부실"하였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과중한 노동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주거나 여가도 제한됐다. "4평 정도의 좁은 방에서 6~8명이 함께 생활"했으며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도 사전 검열에 의해 그 내용이 제한"되고 "자유로운 외출을 할 수 없었"으며 "단체로 외출하는 경우에도 감시원이 동행"했다고 한다. 공장이 아니라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소녀 이영숙이 겪은 시련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공장 천장 위로 미군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소리도 인내하며 들어야 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도 참고 들어야 했다. 그런 속에서 옆도 돌아볼 새 없이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12월에는 대지진으로 공장 건물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쇠막대기가 옆구리를 관통하는 상해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죽는 것보다 못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봉급이라도 좀 나왔다면, 약간은 위안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 없었다. "원래의 약속과는 달리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임금을 지급받은 사실도 없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갑녀'뿐 아니라 소녀 이영숙도 그랬다. 금전적 대가는 없었다. 사실상 노예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아예 한 푼도 안 받은 것은 아니다. 허광무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심사과장의 논문 '일제 말기 강제동원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에 소개된 강제동원 피해자 김○봉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이분은 미쓰비시광업 다카시마탄광에서 강제노동·중노동을 경험했다.
 
"그때 몇 푼씩 줬어. 몇 푼씩 주기는 줬어. 그런데 배가 고프니까 콩 볶아 놓은 거 사먹고 고구마도 찌어 놓은 거 사 먹고 그랬지. 용돈도 안돼."
- 동북아역사재단이 2014년 발행한 <동북아역사논총> 제45호.
 
소녀 이영숙한테도 볶은 콩과 찐 고구마 사먹을 정도의 '용돈도 안 되는 돈'이 지급됐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지급됐더라도, '용돈도 안 되는 돈'이지 봉급은 아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소녀 이영숙은 봉급을 받지 못했다.

신장철 숭실대 교수의 논문 '일본 종합상사의 생성과 발전에 관한 연구-미쓰비시상사의 전후 해체와 재편성 사례를 중심으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래 인용문 속의 '불입자본금'은 '실질 자본금'과 동의어다.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로부터 1945년에 태평양전쟁의 패배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걸쳐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야스다의 4대 재벌 산하기업의 불입자본금은 4.3배로 증가하였다. 이 수치가 일본 회사 전체 불입금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 기간 중에 10.4%에서 24.1%로 증가되어, 전체 불입자본금의 4분의 1이 4대 재벌에 의해 차지되고 있었다."
- 한국경영사학회가 2011년 발행한 <경영사학> 제26집 제3호.
 
미쓰비시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에게 봉급은 주지 않고 '용돈도 안 되는 돈'만 줬다. 전 세계가 전쟁의 열풍에 휩싸였던 1937~1945년 기간에 미쓰비시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여자근로정신대의 모습.
 여자근로정신대의 모습.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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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학교 진학은 고사하고 봉급도 못 받은 채 미쓰비시 그룹의 '불입자본금'을 불리는 데 동원된 소녀 김영숙 등은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경 귀국했다. 이것으로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귀국은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분들은 1945년 10월경까지는 한국인이기에 수난을 당해야 했다. 1945년 10월경부터는 여성이기에 또 다른 수난을 당해야 했다.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근무했던 여성들의 귀국 뒤 상황은 이승우 논문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모두 다 이랬다는 게 아니라 대체로 이랬다는 의미의 글이다.
 
"갑녀는 귀국 이후 주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원을 위안부로 동일시하였으므로 근로정신대원으로 일본에 갔다 온 사실을 숨기고 결혼하였으나 10년 정도 지난 후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가출을 하였고, 다른 동료들은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 사실을 숨기거나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 이혼하였으며 지속적인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정도 시련을 겪었다면 누구라도 일본에 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영숙 할머니는 일본과 미쓰비시를 향한 한을 평생 품고 살다가 지난 4월 드디어 광주지법에 소장을 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말았다.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8·15 해방이 70년이나 지난 뒤에 소송을 제기하는 이영숙 할머니를 두고 일본인들이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왜 이제 와서 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대한민국 역사가 증명하듯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돕지 않았거나 어느 정도는 제지했다.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대법원의 유착에서 드러나듯이, 국가권력이 이분들의 소송을 훼방하기까지 했다. 이분들 앞에서 민법상의 시효 제도를 들먹일 수 없는 이유다.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나지 않았냐고도 항변한다. 하지만 피해자 개인이 포기하지 않은 권리를 양국 정부의 합의로 포기시키는 것은 법리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청구권 협정 어디에도 피해자 개인의 권리가 포기된다는 조문은 없다.

또 대법원의 2012년 5월 24일 자 강제징용 판결에서 강조된 것처럼, 일본이 강제징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배상책임이 소멸됐다'고 주장하는 것도 논리적 모순이다. 강제징용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강제징용 배상책임을 소멸시키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영숙 할머니의 소송 제기는 정당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늦지 않은 일'이다. 이영숙 할머니는 여전히 미쓰비시와 일본으로부터 정당한 배상과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소송을 제기한 지 채 3개월도 안 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은 일은 전적으로 국민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와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에 우리 국민들과 정부와 기업들이 굴복할 수 없는 이유다. 할머니를 편히 보내드리기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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