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혹자' 전미선, 변함없는 미모 배우 전미선이 8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열린 MBC월화드라마 <위대한 유혹자>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위대한 유혹자>는 아름다고 도발적인 청춘들의 사랑이야기와 농염하고 현실적인 어른들의 농염한 삼각멜로를 그린 작품이다. 12일 월요일 오후 10시 첫 방송.

배우 전미선(자료사진) ⓒ 이정민

 
"내 이름이 과연 힘이 있나? (솔직히) 주인공은 자신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설령 맡는다 해도 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1987년 아역 배우 출신으로 데뷔한 지 20년 가까이 돼서야 영화의 첫 주연을 맡은 전미선이 한 취재진에게 한 말이다. 이미 드라마, 영화, 연극을 포함해 서른 편 이상의 작품을 쌓아온 그는 자신을 낮추며 그렇게 작품에 한 걸음씩 들어가곤 했다. 

첫 주연작 <연애>를 위해 그는 촬영지였던 부산에 3개월간 머물며 극 중 인물인 어진이 되어 갔다. "여자의 감성을 놓치고 살아온 여자가 스스로 여성으로 성장해가는 성장영화"라는 그의 정의처럼 오롯이 캐릭터를 품었다. 실제의 전미선 또한 그런 배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작품으로 성장하는 배우 말이다. 

지난 6월 29일 전주의 한 호텔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의 죽음을 두고 영화계는 물론 각계에서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나에겐 봉순(1987년 그의 출연작 <토지> 속 배역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나이 지긋한 팬들의 고백을 비롯해, '탁구 엄마, <오작교 형제>의 미숙 등 드라마에서 자주 만나며 친한 언니 같은 배우였다'는 골수 시청자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철저히 작품으로 말하는 배우였다.

화려하지 않아도 소중했던
 
 영화 <봄이 가도> 중 한 장면. 배우 전미선의 모습.

영화 <봄이 가도> 중 한 장면. 배우 전미선의 모습. ⓒ (주)시네마달

 
한 영화인은 전미선을 두고 '물과 공기 같은 배우였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소중한 것들. 그러니까 없어지면 절실하게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들. 이를 연기에 비유하면 스스로가 밝게 빛나진 않아도 작품의 깊이와 질감을 더하고, 동료 배우를 살게 하는 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경중, 캐릭터의 존재감을 떠나 전미선은 그랬다. 자신이 왜 그 작품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고, 스스로를 납득시켜 가면서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배우였다는 뜻이 아니다. 1993년 <거짓말하는 여자> 이후 17년 만인 2009년 <친정엄마와의 2박3일>로 연극 무대에 선 그는 "무대 위에 설 때 제가 살아서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작품에 몰입하는 속도는 느려 보여도 오히려 누구보다도 연기를 사랑했고, 열정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온라인에서 그에 대해 찾을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기사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다. 이 영화는 1989년 여름방학 무렵 개봉해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켰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후속편이었다. 입시지옥, 부모의 압박, 사회적 편견 속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당시 전미선은 은경 역을 맡아 주인공 캐릭터와 함께 갈등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이틴 스타는 아니었어도 전미선은 당대 10대의 표상으로, 사랑과 삶에서 고뇌하던 청춘으로, 또한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 우리 앞에 섰다. 그 매체가 TV든 연극무대였든 혹은 스크린이었든 그는 꾸준했고, 성실했다. "18세에 연기를 시작했지만 그때는 (연기가) 절실하지 않았다"던 그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직후 "연기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고 했다. <연애>로 첫 주연을 경험하며 "앞으로 얼마나 연기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비중이 크건 작건 의미가 느껴지는 배역이면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도 했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 뚝심이 있었다. 한 예능 프로에서 "1993년 예능 출연 후 내키지 않는 걸 해야 하는 이쪽 일이 싫어졌다"며 5년 간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그는 "수첩에 내 인생을 적으려 했는데 이름 말고 쓸 게 없었다. 아까워졌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1998년 이후 우리가 그의 많은 출연작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며 걸어온 그 고군분투의 결과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건 '단독 1보', '단독'이라는 표현을 붙이면서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까지 묘사한, 마치 그의 죽음을 장사하듯 전달했던 유사 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의 보도 행태다. 고인과 유족에 대한 일말의 예의, 보도 윤리 강령을 떠올렸다면 나오지 않았을 기사들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하려는 그 생리야 이해하겠지만 한 소중한 인생의 죽음이다. 유명인의 죽음을 차분하게 그리고 제대로 조명하는 기사를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한 바람일까.

만약이라는 가정이 이 순간 무의미하지만 조심스럽게 덧붙여본다. 만약 그가 그리 허망하게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몇 시간 뒤인 6월 29일 저녁 연극 <친정엄마와의 2박3일>을 무사히 끝마쳤다면 어땠을까. 10년 전 그에게 "살아서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바로 그 작품 말이다. 분명 그는 웃으며 해당 작품의 감상을 관객과 나눴을 것이다. 나아가 "뻔한 여성 캐릭터가 아니기에 매력을 느꼈다"던 영화 <나랏말싸미> 속 소헌왕후로 뭇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됐을 것이다. 

두고두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자신의 이름을 수첩에 적으며 두려움을 느꼈던 배우 전미선은 우리에게 이름뿐만이 아닌 수십 편의 작품을 남겼다. 하나씩 곱씹으며 그 소중함을 되뇔 일이다. 그리고 좀 더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변 사람을 대할 일이다.
 
 7월 개봉하는 <나랏말싸미>에 출연한 고 전미선 배우.

배우 전미선의 생전 모습. 지난 6월 30일 진행된 영화 <나랏말싸미> 제작보고회 당시. ⓒ 이정민

 
전미선 나랏말싸미 영화 연극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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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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