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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일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났다.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택 565채가 불에 탔고, 1132명이 졸지에 이재민이 됐다. 7월 13일은 산불이 일어나고 꼭 100일째 되는 날. 숫자에 드러나지 않는 천진초등학교 대피소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봤다.[편집자말]
 
 천진초 이재민 박(62)씨.
 천진초 이재민 박(62)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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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새벽 5시 30분, 체육관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텐트의 지퍼가 '북' 하고 올라간다. 천으로 된 텐트가 반으로 갈라진 사이로 나온 검은 맨발이 밤새 텐트 바깥에서 차가워진 슬리퍼 짝을 더듬었다. 허리를 구부리며 텐트 밖으로 나온 이는 박(62, 남)씨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뒷목에 구호품으로 받은 하얀 수건을 두른 박씨는 추리닝 차림으로 대피소 입구 쪽에 있는 화장실로 가 간단히 세면을 했다. 고성군 인흥리 산골에 사는 박씨는 천진초의 다른 이재민들처럼 이번 산불로 집이 다 탔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박씨의 곱슬머리는 아침에 더 꼬불꼬불했다.

지난 4월 4일 강원도 고성에 큰 산불이 났다. 하루아침에 2명이 목숨을 잃었고 1100명 넘는 사람들이 이재민이 돼 거리로 나왔다. 500채 넘는 집이 불에 탔다. 천진초 체육관은 마지막 남은 이재민 대피소였다. 한때 120명이 넘었던 천진초 이재민은 서른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정부의 인도 하에 대부분 주변에 있는 콘도나 연수원으로 이동한 것이다. 전체로 보면 700명이 넘는 이재민이 주변의 연수원과 콘도에서 가구별로 객실 생활을 하고 있었고, 300명 가량은 친인척 집이나 마을회관 등에서 지내고 있었다.

밥차

6시 10분이 넘었을 때쯤 박씨가 군복 같이 생긴 두툼한 얼룩 무늬 잠바를 걸치고 체육관 바깥으로 나섰다. 낮 기온은 많이 오른 상태였지만 고성의 새벽 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박씨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갈색 가죽 신발을 대충 신고 대피소 앞에 차려진 밥차로 향했다. 산불 대응 초기 대기업이나 종교 단체에서 앞다퉈 차려놨던 각종 부식차와 자원봉사 천막, 핸드폰 서비스 부스로 북새통을 이뤘던 체육관 앞은 이제 밥차와 세탁차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밥차의 아침 시간은 6시 반에서 7시 사이였고 그날 오전도 열명쯤 되는 자원봉사자들이 식사 준비로 한창이었다. 아직 배식 준비가 다 되지 않은 시간이라 쭈뼛쭈뼛하던 박씨가 봉사자들에게 따로 부탁해 밥과 김치, 멸치 반찬을 먼저 받았다. 차로 30분 정도 거리인 속초의 건설 현장까지 시간을 맞춰 가려면 6시 반에는 천진초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퍼 받으며 박씨가 미소 짓는 봉사자들에게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밥차 옆 천막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 홀로 앉아 5분도 안돼 밥을 뚝딱 비운 박씨는 자신의 파란색 1톤 포터에 몸을 실었다. 불에 안 타고 유일하게 남았다고 했다. 차의 시동을 켜자 심하게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가 텅 빈 운동장에 메아리 쳤다.

"30년도 넘었으니까 완전 고물차지. 이 차는 팔고 싶어도 못 팔어. 내가 예전에 농장을 했는데, 그 농장이 망해서 빚을 못 갚았거든. 그때 이게 압류 잡혀버린 거지. 팔아먹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썼어. 그래도 이거라도 끌고 나왔으니 망정이지 이거까지 불에 탔으면 지금 어떻게 먹고 살았겠어. 다행이지, 흐흐."

담배를 낀 손으로 낡은 핸들을 잡은 박씨가 말했다. 박씨는 노가다를 한 지 15년쯤 됐다고 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오후 5시 반이면 대피소로 돌아오던 박씨의 신발과 바지는 늘 허연 흙먼지로 범벅이었다. 박씨는 하루에 10만 8천원 정도 번다고 했다. 60대 이상 고령자가 대부분인 천진초 대피소에서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은 농사 짓는 사람들 아니면 박씨 같이 현장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토바이
  
 천진초 이재민 박(62, 남)씨.
 천진초 이재민 박(62, 남)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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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 정착한 지 30년 됐다는 박씨는 이곳 토박이가 아니었다. 박씨는 젊은 시절 서울에 있는 밴드에서 건반을 쳤다고 했다. 주로 밤무대를 뛰어서 돈을 벌었고 시간이 비는 낮엔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구석구석을 다녔다. 서울 같이 복잡한 도시는 체질에 안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골목 골목을 방랑하던 박씨에게 어느 날 고성 인흥리의 한 골짜기가 눈에 들어왔다. 산속이라 조용한 건 물론이고 집 앞에서 설악산 울산바위가 한눈에 보였다. 차를 타고 나가면 바닷가도 금방이었고 속초 시내도 가까웠다. 팔도를 샅샅이 돌아다닌 박씨였지만 일찍이 그만한 명당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인적 드문 땅엔 한 노인이 살고 있었고, 박씨가 소주를 사 들고 몇 번 찾아가니 마음이 잘 맞았다. 노인이 혼자 살던 오두막 집은 여름에 비가 오면 부엌에 물이 샐 정도로 낡아서 이따금씩 들른 박씨가 부엌에 들어찬 물을 퍼내줬다. 그럴 때면 노인은 좋아하며 하루 종일 밖에 앉아 술을 마셨다고 했다. "비슷한 사람들끼린 서로 알아보잖아." 박씨는 인흥리에 아예 눌러 앉아 살고 싶어졌고, 노인에게 1200만원 정도를 주고 안 쓰는 집과 땅을 샀다. 1997년경 일이다.

90년대 중후반부터 노래방이 인기를 얻으면서 밤무대는 퇴행길이었다고 했다. 박씨도 비슷한 시기 밤무대 일을 접고 새로 정착한 땅에서 염소 사업을 시작했다. 많을 땐 70~80마리까지 키우기도 했지만 천상 건반만 치고 살다가 뭣 모르고 시작한 사업이 수월할 리 없었다. 주변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판로를 찾기도 어려웠고 사료값 감당하기도 벅찼다.

힘겹게 축산을 계속하던 중 2004년에 내린 폭설에 축사가 무너져 염소들이 깔려 죽는 사고가 났다. 박씨는 염소 일을 접고 그때부터 노가다를 했다. "여기가 너무 좋아서, 그저 술 한 잔 먹고 염소들 밥이나 주고 살았지. 그러다 세월 다 갔어." 말수가 적은 박씨가 수더분하게 웃었다.

피아노
  
 천진초 이재민 박(62, 남)씨.
 천진초 이재민 박(62, 남)씨.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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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의 무대 경력이 천진초 이재민들에게도 전해지면서 하루는 주변 텐트에 있던 사람들이 박씨에게 적적한데 노래나 한 곡 쳐보라고 떼를 썼다. 마침 대피소 뒤쪽 강단 위에 피아노가 한 대 있었던 것이다. 거듭된 요청에 말없이 웃기만 하던 박씨가 텐트 속에서 소형 씬디사이저를 꺼내왔다. 머쓱해 하며 단상 위에 오른 박씨가 피아노 옆에 기계를 설치해 놓고 건반 앞에 살며시 앉았다. 반신반의하는 이재민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잠시 고민하던 박씨가 곡을 골랐다. 첫 곡은 김성환의 <묻지 마세요>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앞만 보고 왔는데
지나간 세월에 서러운 눈물
서산 넘어가는 청춘 너 가는 줄 몰랐구나
세월아 가지를 말어라."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박씨가 능숙한 솜씨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오랜만에 치는 거라며 쑥스러워했지만, 박씨의 새까맣고 뭉툭한 손은 하얀 건반 위를 자유롭고 부드럽게 오갔다. 처음엔 서너 명밖에 없었던 청중은 금세 열댓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어머 어머, 이게 웬일이야. 하하하." 이재민들이 휘둥그래진 눈을 하고는 하나둘 피아노 앞에 모여 들었다. 

노래를 거듭할수록 박씨의 연주도 더 흐드러져갔다. 박씨의 선율이 그의 곱슬머리와 썩 잘 어울렸다. 트로트 가사를 아는 이재민들은 가락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고,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팔을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이재민도 있었다. "야 너 그거밖에 못 춰? 하하하." 이재민들이 무장해제된 서로를 보고 깔깔 웃었다. 평소 가까운 텐트 이웃들과만 주로 수다를 했던 천진초 사람들은 그 날 저녁 박씨의 손끝을 따라 하나가 됐다.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처음엔 난감해 하던 공무원도 모처럼 웃는 이재민들 모습에 굳이 나서지 않았다. 대피소 안이 그렇게 평화로운 웃음 바다가 됐던 건 아마 그 순간이 유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잘못 하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집 잃고 전 재산 다 날린 이재민들이 모인 이곳은 신경이 예민한 곳이었다.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좋다고 지금!" 피아노가 설치된 뒤쪽 강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맨 앞 텐트의 몇몇 어르신들이 항의를 하면서 박씨 연주는 30여분 만에 완전히 막을 내려야 했다. "저 아저씨 그냥 노가다꾼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벼운 소동은 있었지만 넋을 놓고 박씨 연주를 감상하던 이재민들은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가슴을 매만지며 진심으로 위로 받고 감동했다고 박씨에게 고마워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강단을 내려오는 박씨가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무허가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에서 차로 15분 정도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도착한 박씨의 인흥리 집은 완전히 다 타 있었다.
 천진초에서 차로 15분 정도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도착한 박씨의 인흥리 집은 완전히 다 타 있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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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박씨가 2년 전부터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무허가 집이었던 거야." 이런 얘길 하면서도 박씨는 덤덤히 웃기만 했다. 산골 노인에게 산 인흥리 집이 등기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현재 이 일대 땅의 법적 소유자인 한 회사는 박씨를 비롯한 주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지난 2017년 철거 소송을 냈다. 그렇게 소송이 이어지던 와중에 산불이 나버린 것이다.

"철거하냐 마냐 하는 소송인데, 집이 다 불에 타버리고 철거할 것도 안 남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참."

천진초에서 차로 15분 정도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도착한 박씨의 인흥리 집은 완전히 다 타 있었다. 집 안이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살림들이 바닥에 녹아 붙었다. 나무로 된 침대는 매트리스 속에 있는 철제 스프링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불에 그을려 완전히 구부러지고 휘어져 있었다. 어지러이 깨져 있는 녹색 소주병만이 잿더미가 된 박씨 집터에서 간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저 멀리 불은 보였는데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지." 박씨가 무너져 내린 집을 뒤로 한 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멋쩍게 웃었다. 인흥리 안쪽 완만한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던 박씨 집 앞마당에선 정말로 울산바위가 가깝고 선명하게 보였다. 집 뒤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도 다 타서 아직도 숯 냄새가 진동했지만, 박씨는 눈을 감으며 나무들이 푸르렀을 때 이곳을 상상해 보라며 또 조용히 웃었다. 간간이 들리는 산까치 울음 소리가 박씨의 미소와 조응했다.

"이번에 불이 나긴 했지만 여기가 나랑 잘 맞았던 거지. 나같이 방랑벽 있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붙어 살았으니. 처음엔 부인이랑 딸들도 여기 같이 있었어. 근데 이렇게 구석에 처박힌 데서 여자들이 얼마나 버티겠어. 한 10년도 안 돼서 집을 나갔지. 그러고 어머니가 암에 걸리셔서 여기 내가 살던 집에다 어머니를 모셨어. 난 옆에다 컨테이너로 집을 하나 더 지어 살았고.

근데 참 신기한 게 이번에 그 난리가 난 통에도 저기 저 어머니가 놓고 가신 장독대만 안 탔지 뭐야. 봐봐 저거 안 탔잖아. 불 꺼지고 와서 보니까 저것들만 딱 안 타고 남아 있더라고. 어머닌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저 장독대에 장을 담그셨지. 만약 장독대에 장이 비어 있었으면 다 타고 깨져 버렸을지 모르겠는데, 어머니 가시고 나서 나도 계속 된장이랑 고추장 담가서 채워 놨었거든.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쨌든 안 탔잖아. 흐흐."


타고 기울고 쓰러져버린 박씨의 컨테이너 집과 어머니가 머물던 집 사이엔 열개 정도 되는 장독들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하게 서있었다.

돈 뭉치
  
 박씨 집에서 유일하게 안 타고 남은 어머니의 장독대.
 박씨 집에서 유일하게 안 타고 남은 어머니의 장독대.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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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현장 일에서 돌아온 박씨가 어느 날 나를 따로 불렀다. 학교 귀퉁이 나무 그늘 밑에 홀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박씨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깨끗하게 반으로 잘 접힌 상품권 뭉치였다. 고성군에서 이재민들에게 지급한 만원짜리 상품권이라고 했다. 다발째라 몇 장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5장은 족히 넘었던 것 같다. 박씨가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밥도 잘 못 챙겨 먹을 텐데 고기라도 사먹어. 여기 고성 안에선 다 쓸 수 있대." 박씨는 사양하는 내 손을 피해가며 그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를 거듭 내밀었다.

"혼자인 거? 편하지. 외롭진 않아. 딸 둘도 다 잘 커서 잘 살고 있고. 안 본 지는 오래 됐지. 연락은 오는데 오히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해. 나야 이젠 저들한테 짐만 돼지. 흐흐. 힘든 것도 딱히 없어. 집이 다 탔지만 요즘은 이렇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잖아. 다 친절하고 다들 잘해줘. 밥 해주는 것만도 고맙지. 난 여기서 더 필요한 것도 없어. 이럴 땐 그냥 이런가 보다, 하고 몸 사리고 쉬는 거지 뭐. 아무 생각 없이 쉬면 돼. 괜찮아."

박씨가 또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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