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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일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났다.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택 565채가 불에 탔고, 1132명이 졸지에 이재민이 됐다. 7월 13일은 산불이 일어나고 꼭 100일째 되는 날. 숫자에 드러나지 않는 천진초등학교 대피소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봤다.[편집자말]
 
 지난 6월 26일 다시 찾은 고성 화재 현장의 모습. 천진초 이재민들은 이제 대피소가 아닌 7평 짜리 컨테이너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지난 6월 26일 함씨 할머니가 고성군 용촌리에 위치한 자신의 집터를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산불에 모두 탄 할머니 집은 이미 철거됐다. ⓒ 한승호
ⓒ 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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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8일 오후 12시 속초시 동명동 한국전력 지사 앞의 버스 정류장.

"여기 천진초 가는 버스가 서나?"
"응, 서요. 할머니도 이재민이야?"
"응, 집이 저기 용촌이야. 다 탔어."
"아이고... 근데 뭔 아직까지 시위야? 뉴스 보니까 다 보상 됐다는 식으로 나오더만."
"되긴 무슨! 하나도 안 됐어."
"아, 그래? 아직도? 미친 놈들이네."

뙤약볕 아래 2시간 넘게 이어진 한전 규탄 시위가 끝난 뒤였다. 며칠 전 딸이 사 들고 온 주황색 추리닝 차림에 난생 처음 '결사 투쟁'이라고 적힌 빨간 띠를 이마에 두르고 시위에 참가한 할머니는 행렬에서 홀로 빠져 나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난히 햇볕이 뜨겁던 그 날은 어버이날이었다. 이재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준비한 카네이션을 가슴에 꼽은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며 연신 얼굴을 감싸면서도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그 여자에게 웃으며 상황 설명을 했다. 천진초에서 차로 겨우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40대쯤 돼 보이는 그 여자는 이재민들 얘기를 잘 모르고 있었다.

"천진초에 텐트 치고 아직도 잔다, 야. 야야 거기 나 같은 사람이 아직도 삼십명이 있어. 얼른 가서 좀 드러누워야지. 미안하긴 뭘. 다들 살기 바쁘니까 모를 수도 있지. 흐흐. 오죽하면 이 더운 날 늙은이들이 나와 있겠누. 아휴 그래도 저기 걸어가는 거까진 도저히 못하겠어. 같이 온 할머니들 다 따라갔는데 나 혼자 나왔다니까. 노인네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것도 해 보고. 하하."

그날 200명 넘는 이재민들은 한전지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속초시청까지 행진을 이어갔지만 할머니는 허리를 짚으며 대피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 차려진 산불 이재민 대피소 맨 오른쪽 줄 앞에서 세 번째 텐트의 함(79, 여)씨 할머니다.

매트
  
체육관 바닥에 비닐 매트와 은박 매트를 겹쳐 깐 위에 세워진 할머니의 삼각 모양 텐트는 2평 남짓했다. 가운데엔 구호품으로 받은 이부자리가 반듯하게 깔려 있었고 가장자리엔 나눠 받은 추리닝과 옷가지, 부식으로 받은 라면 박스만 덩그러니 있었다. 허리가 배긴다는 할머니는 유난히 이불을 여러 겹 깔아놓긴 했지만 세간살이가 모두 타 맨몸으로 뛰쳐나온 이재민들의 텐트 속 모습은 거의 다 비슷했다.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 차려진 이재민 대피소의 모습.
 천진초 대피소 내부 한 이재민 텐트의 안쪽 모습.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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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초 체육관엔 이런 텐트들이 가로 5줄, 세로 10줄로 50개가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이재민들이 콘도나 연수원으로 하나 둘 떠나가면서 나중엔 절반 이상이 텅텅 비게 됐다. 빈 텐트들은 철거됐고 이재민들은 나가라는 눈치를 주는 것 같다며 그마저도 서운해 했다. 주로 큰 차도변이나 외곽에 위치한 콘도나 연수원 대신 대피소에 남는 걸 선택한 이재민들은 집이 천진초에서 가까운 봉포리, 인흥리, 용촌리 주민들이었고 차가 없어 원거리 이동이 불편한 이들이었다. 매일 농사도 짓고 집도 살펴봐야 하는데 멀리 떨어진 콘도나 연수원에선 그럴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함씨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천진초 사람들은 대부분 고령자였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실제로 대피소에선 '58년 개띠면 막내' 축에 속했다. 청년은 중학생 한 명, 20대 한 명이 전부였다. 이 청년 둘이 속한 4인 가족 한 식구를 빼면 대부분은 혼자이거나 부부 단위였다. 할머니도 홀로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은 체육관 안에 하나, 체육관 밖에 간이 화장실이 또 하나 따로 있었고, 그와 별도로 샤워장도 남녀 하나씩 있었다. 대피소 내 거의 유일한 소일거리인 텔레비전이 총 4대가 띄엄띄엄 있었고, 전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밥차는 대개 오전 6시 반부터 7시 사이 아침, 12시에 점심, 6시에 저녁을 줬다. 반찬 서너 가지에 밥과 국이 나오는 게 보통이었다. 세탁차는 세탁물을 갖다 주면 빨래는 물론 건조까지 한 뒤 옷을 개서 텐트까지 배달했다.

주름
      
 고성 산불 이재민 함(79, 여)씨 할머니가 지난 5월 8일 속초 한전지사 앞 시위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고성 산불 이재민 함(79, 여)씨 할머니가 지난 5월 8일 속초 한전지사 앞 시위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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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많이 굽은 함씨 할머니는 스스로를 '꼬부랑이'라고 불렀다. 꼬부랑 할머니는 조금만 걷더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손으로 뒷짐을 져야 했다. 입가를 따라 곱게 진 주름과 선한 눈매에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할머니였지만 4월 중순 처음 만났을 땐 연거푸 취재를 거부했었다. 늙은이에게 들을 말이 뭐 있냐고, 저기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손사래 치길 몇 번이었다. 겨우 안면이 텄을 때 할머니는 딱 한 마디 했다.

"있는 사람들이야 불이 나도 상관이 없지만은... 우리들 같이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우."
 

늘 웃는 얼굴이면서도 거리를 유지하던 할머니의 인생사는 만난 지 한 달 쯤이 돼서야 더 들을 수 있었다. 고성 토박이로 평생 농사만 짓다가 22년 전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는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혼자가 된 이후 할머니는 남의 땅에서 농사일을 해가며 생계를 이어갔고 미시령 넘어 양구는 물론 설악산 일대 마을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새벽 4시 반에 용역 업체에서 보내온 15인승 봉고차나 25인승 버스를 타고 고개고개 넘어 내리는 곳이 그날 할머니의 일터였다. 상추도 따고 감자도 캐고 무도 심고 파도 뽑고, 매일 같이 일했다고 했다. 그렇게 일당 7만원을 벌면 업체에서 만원씩 떼갔다.

새벽 안개를 뚫고 험한 산길을 따라 일을 나가다 아찔한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3년 전 할머니를 비롯한 일꾼들을 태운 봉고차가 언덕길을 오르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몇 바퀴를 구르다 다행히 차가 돌무덤에 걸리는 바람에 모두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주변에서 일하고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꾸로 뒤집힌 차의 창문을 돌로 깨 할머니와 사람들을 구출했다. 큰 사고였지만 요행히 한 사람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편했을 걸, 하고 서늘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강원도 곳곳의 농촌에도 이젠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져 일자리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까마귀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 차려진 이재민 대피소의 모습.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 차려진 이재민 대피소의 모습.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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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까지도 홍천과 인제를 돌아다니며 고추 따는 일을 했다는 할머니는 올핸 졸지에 이재민이 되는 바람에 용역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할머니는 한 달에 열 번 용촌리 마을회관에 출근해 아침 8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일을 했다.

"나 포함해서 셋이서 돌아가면서 나와서 일을 해. 이렇게 아침에 와서 청소 조금 하고 설거지하고. 가만히 있으면 뭘 해, 일이라도 해야지. 별로 힘든 일도 아니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할만 하지. 흐흐."

시위를 한 다음날인 5월 9일 오전 9시께, 할머니가 굽은 등을 두드려가며 용촌리 마을회관 싱크대에 쌓인 컵과 그릇들을 닦았다. 일을 나가는 날이면 할머니는 아침 7시 50분쯤 대피소를 나서 버스를 탔다. 할머니의 월급은 27만원이라고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마을회관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아직 설거지 중인 함 할머니에게 한마디씩 했다.

"얼마나 됐지?"
"한 달."
"거긴 지낼 만 해?"
"지낼 만 하지 뭐. 처음엔 좀 정신 없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내가 바깥 일을 안 하니까 글쎄 얼굴이 다 뽀얘졌잖아. 하하하. 원래는 시커먼 게 까마구하고 똑같았는데. 흐흐. 대피소에선 맨 티비나 보고 햇빛을 안 쬐니까나..."

할머니의 농담에 마을회관이 웃음바다가 됐다. 할머니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평생 하던 바깥일 조금 안 했다고 할머니 피부는 정말로 날마다 하얘져 갔다.

어른
  
 함씨 할머니가 대피소 앞에 차려진 세탁차 앞을 지나가고 있다.
 함씨 할머니가 대피소 앞에 차려진 세탁차 앞을 지나가고 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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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로 잿더미가 된 할머니 집은 그냥 집이 아니라고 했다.

"'우사(할머니는 태풍 루사를 계속 이렇게 불렀다)'가 2002년이거든? 그때 물난리에 집에 물이 들어와서 집을 새로 지었어. 돈이 어디 있어. 대출 내서 지은 거지. 그 빚 다 갚고 나니까나 이젠 또 집을 태워버리네. 하하, 참. 우사 때 진 빚이 만기가 되니까네 올해 2월에 우리 집 논을 팔아 갚았거든. 근데 4월 달에 또 불이 났잖아. 하하."

할머니는 이제 땅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집을 지으려고 빚을 내려 해도 바꿔먹을 땅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할머니는 허허 웃기만 했다. 따사로운 볕을 맞으며 할머니는 자기 앞으로 온 1만 1천 몇 백원 짜리 건강보험료 지로용지를 구부려 그늘을 만들었다.

자식이 다섯인 할머니는 아들 둘, 며느리 한 명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대피소 텐트에선 혼자였다. "젊은 사람들은 콘도로 가야지... 나는 여기가 편해." 할머니는 오십 넘은 큰 아들이 허리가 안 좋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걱정했다. 올해 서른 아홉이라는 막내 아들은 불이 나기 직전인 올 3월 베트남 사람과 결혼했다고 했다. 신혼인데 콘도에서 지내야 하지 않겠냐고 할머니는 또 웃었다. 덤덤하게 웃기만 하는 할머니에게 힘든 건 없는지 물었다.

"나만 힘든가? 온 동네가 다 힘든데. 내 팔자를 탓해야지 뭐 별 수 있어? 내 팔자가 그런 걸, 그 놈의 팔자가. 흐흐. 동네 사람들도 내가 없이 사는 거 아니까나 다들 나를 걱정해주지. 도깨비불이라 어느 집은 타고 어느 집은 안 탔는데 해필 우리 집이 탔다고들. 아, 외지에서 온 부자네 집은 안 타고 어떻게 할머니네 집만 탔냐고 옆에서들 나보다 더 해 아주, 허허.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우. 아, 이 정도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나. 여기도 내 집만 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렇게 밥 해주고 재워주고 빨래까지 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지. 우리 땜에 저렇게 땀 뻘뻘 흘리면서 봉사해주는 사람들이 힘들지, 우리들이 지금 뭐가 힘들어? 오히려 나는 이 담에 집 가서 밥 해먹을 일이 더 큰일이다야, 아이구. 맨날 여기서 해주는 밥만 착착 받아 먹다가 말이야, 하하하."


'꼬부랑' 할머니는 늘 그렇게 미소지으며 내게 말하곤 했다.

"밥은 먹고 다니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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