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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청주시 오송읍 상봉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은 약산 김원봉과 함게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배경사진은 일제가 만든 감시카드)
 충북 청주시 오송읍 상봉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은 약산 김원봉과 함게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배경사진은 일제가 만든 감시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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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21일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법정에 한 남자가 피고석에 앉았다. 재판장이 피고에게 행동 경위를 물었다. 피고는 재판장의 물음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재작년 7월에 만주 길림성으로 갔었는데, 갈 때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국내에 되도록 많은 폭탄을 반입하는 일이요, 둘째는 해외의 독립운동 현황을 시찰하고자 함이었다. 이와 같은 취지를 정한 본래의 동기는 재작년 3월 이래 조국독립운동을 입과 붓을 갖고 구할 대로 구하고 원할 대로 원하였으나 피를 갖고 구하지는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혈전(血戰)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함도 대포도 없으며 폭발탄·육혈포 밖에 구할 것이 없었다"

이날 조선총독부의 검사는 피고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재판장은 구형보다 2년 적은 징역 8년을 언도했다.

피고는 7년이 지난 1927년 1월 22일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했다. 피고는 의열단에 가입하기 위해 만주로 갔던 것처럼 다시 3년 뒤인 1930년 다시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의 이유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조국의 땅으로 돌아온 것은 1945년 11월. 그제 서야 독립운동에 온 몸을 던졌던 40년여의 고단한 시간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국에서의 삶은 짧았다. 귀국 후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그는 1952년 1월 10일 향년 60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1893~1952)
 
 곽재기 선생의 피체 사실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곽재기 선생의 피체 사실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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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법정에 섰던 피고의 이름은 곽재기. 1893년 충북 청주시 오송읍 상봉리 75번지(옛 주소, 청원군 강외면 상봉리 75)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 돌아와 청남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09년 청소년들이 모여 조직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입당해 국내외의 독립 지하공작에 관여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그해 7월 중국 길림성으로 떠났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곽재기 선생과 의열단과의 인연인 여기서 시작된다. 곽재기 선생은 약산 김원봉, 이성우, 황상규, 윤소룡, 김기득 등과 같이 의열단 결성에 참여했고 제1차적 행동을 맡고 나섰다.

알려진 대로 의열단은 실력투쟁‧직접행동을 통해 독립을 전취한다는 기본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방침에 따라 의열단은 전국에 걸쳐 일제의 기관 파괴와 교란, 암살 등을 대적으로 실천하려 했다.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와 조선총독부의 기관신문인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 그리고 각지의 경찰서가 파괴대상 1호 목표로 설정됐다.

의열단은 대대적인 파괴와 암살 행동을 벌여 일제에게는 공포감을 주고 민심을 격동시키려 했다.

곽재기 선생은 의열단은 제1차 행동을 맡고 나섰다. 파괴와 암살에 필요한 폭탄과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1919년 곽재기 선생은 이를 위해 행동에 나섰다. 폭탄제조에 능한 김성근에게 제조법을 익혔고 1920년 3월에는 직접 상해로 건너가 폭탄 16개, 권총 3자로, 탄환 1백발을 확보해 국내로 반입했다. 국내로 들여온 무기는 밀양과 경남 창원 모처에 은닉했다.

1920년 5월 13일 곽재기 선생은 거사를 위해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 시내 모처에서 동지들과 회합하며 목표물 파악에 나섰다. 밀양과 부산에 있던 폭탄을 서울로 가져오게 하고 날마다 숙소를 바꾸면서 폭탄을 투척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정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조선총둑부 경찰의 탐지망에 파악됐고 1920년 6월 결국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된다.

곽재기 선생은 비록 검거됐지만 투쟁은 멈춰지 않았다. 1920년 9월에는 부산에서, 12월에는 밀양에서 두 곳의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됐다.

일제라는 적을 상대로 교섭과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의 결과였다.

"그 사람이 누구에요?"
 
 의열단원 곽재기선생이 태어난 청주시 오송읍 상봉리 마을 전경
 의열단원 곽재기선생이 태어난 청주시 오송읍 상봉리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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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기 선생의 생가
 곽재기 선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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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기 선생이 태어난 곳은 청주시 오송읍 상봉리. 고즈넉한 시골 풍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마을이다. 지난 11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라 조용한 시골마을은 더 조용했다. 논과 밭에 나와 있는 농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을 경로당의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 조차 들리지 않았다.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나무그늘 밑에 앉아 있는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이 마을에서 40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에게 곽재기 선생에 대해서 물었다. 어르신은 "그 사람이 누구에요?"라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는 "일제 때 빨갱이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곽재기 선생의 생가를 방문했다. 보통의 시골농가 살림집이었다. 곽재기 선생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곽재기 선생 생가 옆집에 거주하는 임정자(81) 할머니를 만났다. 임 정자 할머니는 이곳에서 60년을 살았다고 했다. 임 씨도 곽재기 선생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는 "몇 해 전에 낮선 사람들이 와서 여기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살았던 집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며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상봉리 마을 어느 곳에도 곽재기 선생의 흔적은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에도 마을 표지석, 생가터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청주시도 비슷했다. 청주시 관계자는 "독립운동 유공자의 생가를 지자체가 별도로 관리하지 않는다"며 "보훈처에서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생가는 보통 유족들이 관리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혼처에서 지원하는 것"이라며 "곽재기 선생과 관련된 별도의 데이터가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2년 1월에는 보훈처가 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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