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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골에 살고 있지만 가끔은 도시의 번잡함, 화려함과 익명성이 그립다. 그럴 때면 시간이 잠들어 있는 간이역에서 기차를 탄다. 칠이 벗겨지고 시트가 낡은 기차는 내게 무채색의 아련한 향수와 약간의 낭만을 선물한다. 여행은 내게 작은 설렘이다. 바쁠 것 없는 기차는 한가롭게 계곡을 지나 들을 지나 강을 건너고 때론 강물과 경주한다. 창밖 정취에 한껏 취해 깜박 졸고 있노라면 어느덧 종착지 청량리다.

나는 전철 타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시설이나 서비스, 운행방법에 있지 않다. 자리에 앉으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마주보게 되는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숨길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이 뚝뚝 묻어나서이다. 그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난감함에 가슴이 저릿하다. 일상은 죽을 것처럼 권태롭지만 변화에 대한 적극적 의지와 용기는 없는...

지루함은 정말 벌일까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제우스의 부당함에 맞서다 저승에 갔으나 하데스를 속이고 탈출한다. 하지만 끝내 제우스의 사주를 받은 타나토스에 잡혀 저승에 다시금 압송돼 하데스로부터 높디높은 바위산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산꼭대기에 이른 바위는 다시금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 밀어 올리고 또 떨어지고 이렇게 영원히 계속되는 형벌...

하데스는 시지프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지옥에서의 여러 가지 끔찍한 형벌이 아니라 극히 단조롭고 고통이 덜한 어찌 보면 특혜에 가까운 형벌을 내린다. 하데스는 어떤 의도로 그랬을까? 나는 여기서 지루함, 권태로움을 떠올린다. 아마도 하데스는 시지프스가 지루함, 권태로움에 가장 크게 고통을 받으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맞춤형 형벌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반복되는 그 무엇에 대해 지루함, 권태를 느낀다. 즉, 변화 없음과 시간의 공백을 싫어하고 못 견뎌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먹는 식사메뉴를 다르게 하며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 옷, 신발 등에도 끝없이 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권태, 지루함은 반복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그때마다 의미가 새롭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더욱 깊게 마음에 다가오기도 한다.

하데스의 창의적인 징벌에 불구하고 하데스는 시지프스에게 부과한 징벌을 통해 의도한 소정의 목표를 이루었을까?

우리가 권태나 지루함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그런 느낌이 드는 즉시 회피하는 것이다. 즉 TV를 켜거나 핸드폰을 꺼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두 번째는 그런 느낌이 들 때 하품을 크게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아! 뭐 기발하고 재밌는 게 없을까?" 또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시작해 볼까나" 또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자는 그 효과가 즉각적이라서 대다수의 사람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전철에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다. 귀가해서는 관계의 피곤함에 찌든 많은 사람들이 가족 간의 관계조차 부담스러워 서로를 애써 외면한 채 TV에 몰두한다. 이런 대응방식이 쉽고 편하긴 하지만 그 대가가 자못 심각하다.

권태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
 
권태, 지루함은 그 의미나 기능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권태, 지루함은 그 의미나 기능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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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의 중요성은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TV나 인터넷은 관계에 부정적이다. 관계를 훼손하거나 소외를 촉발한다. 게다가 일상에서 사고의 기회를 말살시킨다. 이런 현상이 개선되지 않으면 우리의 주체적 삶은 불가능해지고 해결되지 못한 여러 문제들이 축적되어 폭발의 압력이 가중될 것이다. 하지만 TV나 인터넷의 유혹으로부터 초연하기는 무척 어렵다.

후자는 문제를 주체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할 적극적 의지가 있으며 생각이 개입할 여지를 가짐으로써 시간을 지혜롭고 유용하게 쓸 가능성이 열린다. 그를 위해서는 일상에서의 의식과 훈련이 필요하다. 무언가에 허겁지겁 나를 맡길 것이 아니라 온전히 텅 빈 시간에 스스로를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냥 심심하게 빈둥거리는 것이다. 즐길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면 비로소 그동안 간과했던 여러 가지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를 감수하고 추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직장인들은 하루를 빡빡한 일정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나서 열심히 일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이나 회사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한다. 그것이 직장인의 미덕으로 생각해 왔다. 잠시도 심심할 틈이 없다.

일과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는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회사에서 돈을 받기 때문에 근무시간은 온전히 회사 일에만 써야한다고 자타에 의해서 강제된다. 그 시간에 태만히 한다거나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허비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끔 교육 받았고 자동기계처럼 스스로를 자책하기 때문에 감시조차 필요치 않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이 조금의 틈도 없는 빡빡한 일정이 당연한 듯 내면화돼 있다. 그래서 조금만 한가해지면 불안해하고 그 틈을 무언가로 황급히 메우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가한 시간을 죄악시하고 권태롭고 지루해 한다. 구조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없앤 것이다.

빈둥거릴 권리

그렇다면 권태, 지루함은 그 의미나 기능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권태와 지루함의 사전적 정의를 알아보자.

- 권태 :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 지루하다 :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따분하고 싫증이 나다.


우스갯소리로 "발명가는 모두 게으름뱅이다"라고들 한다. 게으름뱅이를 좋은 말로 표현하면 시간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노동이나 노력을 최소화하려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들의 특징은 매사에 싫증을 잘 내고 쉽게 지루해하며 권태로워 한다. 지루함과 권태로움에 대한 민감도가 거의 대마왕이다. 하지만 허겁지겁 다른 것으로 메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즐길 줄 안다.

조금 과장하자면 권태와 지루함에는 정의, 도덕, 윤리, 권력, 부, 명예에 대한 욕망 등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모든 과학적 발견, 철학적 사유, 예술적 창조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류사의 혁명적인 사건의 시발점이 곧 권태와 지루함일 수도 있다.

권태와 지루함의 대척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약, 도박, 알코올, 게임, 요즘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서핑, 온라인 쇼핑도 한몫한다. 이것들은 중독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권태와 지루함을 주지 않는 대부분의 행위는 다분히 중독적이다. 중독은 사람의 관심사를 크게 제약함으로써 시야를 좁히고 상상력을 제한하며 인간관계를 해치고 우리의 정신을 감옥에 가둔다. 중독은 인간의 지성과 인간성에 치명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우리는 나태하고 심심할 때 비로소 창의적이 된다.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를 지루함과 권태에 노출시켜야 한다. 지루함에 노출시키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냥 빈둥거리고 노는 것이다.

어느 땐가 항상 바쁘다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고위직이라서 그가 바쁘면 그 아래 많은 사람이 바빠진다. 바쁘다는 일은 사람을 항상 허둥대게 하고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조직에서 이런 일은 전체의 창의성을 떨어뜨린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는 것은 AI나 컴퓨터면 충분하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의 부속품으로 기능한다면 기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 누구나가 개별성이 확보될 때 그리고 존중될 때 그의 능력과 사고범위는 크게 확장될 것이다.

의사결정의 상층부를 이루는 사람일수록 의도적으로 여유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시각과 느긋함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유도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태그:#권태,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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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50년 넘게 살다 지금은 강원도에서 농사지으며 살고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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