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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우유 배달사원입니다. 이 일을 한 지 그리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할 이야기는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할 때는 각 층의 버튼을 누르며 집집마다 넣어야 할 수많은 종류의 우유를 챙기느라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각 동을 이동하는 짧은 시간, 그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생각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수시로 나를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오전 3시 반부터 시작되는 우유배달
  
내게 무서움이 없다면 저기 벤치에 앉아 좀 쉬고 싶단 생각을 종종한다.
▲ 밤의 한가운데 만난 길. 내게 무서움이 없다면 저기 벤치에 앉아 좀 쉬고 싶단 생각을 종종한다.
ⓒ 손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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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일주일은 긴장을 한 탓인지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새벽도 아닌 시간, 밤의 한가운데,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배달을 시작했는데도 말이지요. 오전 6시가 조금 넘어 배달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럴 만한 시간도 되지 못합니다.

힘이 들고 배가 고프니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시 멍하니 앉았다가, 우유와 함께 들어있던 출고증을 차곡차곡 정리합니다. 이래야 월 말에 결산할 때 확인이 가능하거든요.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느라 잠자는 시간이 반이나 줄었는데도 오후가 되면 졸리다든지 하는 게 없을 만큼 긴장을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때부터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를요.

물론 실수도 잦았습니다. 처음 하는 일이니 당연하겠지요. 대리점은 물론 고객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전 배달 사원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내 실수가 잦았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쩌다 일어나는 대리점의 실수마저 생기면 걷잡을 수없이 일이 커졌습니다.

새벽 배달을 마치고 와서 오후에 한두 차례 더 고객 집으로 가 우유를 바꾼다든지 하는 일은 기본이었습니다. 그외 고객과의 통화, 그리고 대리점과의 통화로 온종일 모든 정신을 뺏기고 맙니다.

나는 사과에 서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유 배달을 하면서도 물론 그랬습니다. 하루는 우유를 옆집과 바꾸어 잘못 넣었을 때의 일입니다. 나란히 있는 두 집의 우유를 서로 바꿔 넣었던 거지요.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문자를 받았을 만큼, 나는 고객의 입장에서 정중하고 충분한 사과를 하였습니다. 반면에 소위 말하는 이런 '개무시'도 당해 보았습니다.

"무슨 이런 실수를 하죠?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 시작해서 아직 좀 서툽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것도 일종의 갑질일까요? 그때 그 고객의 어조와 느낌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내게 불쾌한 심정을 마구마구 퍼부으며 쏟아내는 상대방의 말투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니한테 그런 개무시를 당할 사람까진 아닌데. 니가 얼마나 잘나서 그깟 일로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 돈 안 벌면 못 사는 사람이라 이 일을 하는 게 아니거든. 나도 니가 마시는 것보다 더 비싼 우유 마시며 자랐다고!'

'속으로만' 실컷 따지고 말았습니다만,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사이 나도 그런 일은 없었나,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지는 않았던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지난 일이라, 혹은 내가 받은 상처가 아닌 내가 준 상처라 기억을 하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가슴에 두고두고 새기는 반면, 내가 준 상처는, 내가 상대방의 가슴에 꽂은 화살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사람일 듯합니다.

나를 아래 사람으로 대하는 대리점 소장
  
5월 중순이 되니 점점 해뜨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다.
▲ 여명 5월 중순이 되니 점점 해뜨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다.
ⓒ 손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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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은 고객뿐만 아니라 대리점에서도 있습니다. 일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한 업체의 우유만 배달하기보다 여러 업체의 우유를 같이 배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 회사마다 우유의 배달 양이 그리 많지 않으니 한 명의 배달사원이 여러 업체의 우유를 함께 배달하는 것이지요. 어디선가는 신문도 같이 돌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여러 대리점의 소장들과 통화를 해보면, 배달할 우유가 적은 대리점의 소장님은 대부분 지극히 친절합니다. 그리고 배달 일을 하는 제게 감사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배달 양이 좀 많은 대리점의 소장님은 다릅니다. 갑으로서 위치를 분명히 합니다. '내가 너에게 배달료를 좀 준다' 하는 거죠. 배달 사원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 소장님의 성격이 좀 그런 줄 알았습니다. 여러 차례 일을 겪은 후 서서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 이 사람은 나를 아래 사람으로 보는구나'라고요.

최적의 시스템으로 배달사원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점을, 내가 해결하도록 떠넘기는 겁니다. 나는 배달사원으로서 우유 하나하나에 몇십 원부터 몇백 원의 배달료를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받는 임금은 그 노동으로 책정됩니다.

하지만 갑질하는 대리점 소장은 대리점 경리 업무까지 맡깁니다. 우유 배달은 기본이고, 고객들에게 우유대금을 수금해서 대리점에 넘겨야 합니다. 미납된 우유대금까지 배달사원이 먼저 충당해서 대리점에 수납하게 합니다. 수금 명단도 없어서 그것 또한 제가 만들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불합리함을 제기했을 때, 제가 들은 대답은 "지금까지 다 그렇게 했는데 도대체 왜 그랍니까?"였습니다. 나는 일개 우유배달 사원입니다만, 대리점 소장에게 인격적으로 무시 당하는 발언을 수차례 들어도 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하지도 않은 실수에 대해 소장의 무시와 질타를 받을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대리점 소장과의 통화가 두려워 피하고 싶고 이러다 우울증 걸리겠다 싶어질 만큼, 그렇게 무시를 당할 존재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다 그렇게 했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하나요? 다른 업체들은 그렇지 않다면요? 그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이러이러한 문제로 이렇게는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부분을 개선해 주지 않으면, 저는 이번달로 그만두겠습니다."

배달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저도 크게 마음 먹고, 호흡 가다듬고, 용기내어 제 의견을 냈습니다. '대리점의 소장님 나이가 많아 어쩔 수 없다'고 이해를 해도, '내가 별난가?'라고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전 배달사원도 그리 해왔으니 나도 그리 할까?' 수차례 생각해 보아도 아닌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조금 바뀌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월급(배달료)이 책정된 만큼의 일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노동의 시간이 귀한 경험이 되길
 
한밤중에 가로등 아래 벚꽃을 잠시 바라보기도 했다.
▲ 벚꽃 한밤중에 가로등 아래 벚꽃을 잠시 바라보기도 했다.
ⓒ 손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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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유 배달을 한 지 석 달이 되었습니다. 잠을 줄여 일을 하니 힘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도 않을 만큼 많은 일도 겪었습니다. 앞으로 지금껏 겪지 못한 또 다른 일들도 겪게 될 겁니다. 또 수없이 많은 진상 고객들도 만날 것입니다. 새벽에 출근하는데 엘리베이터를 오래 기다리게 만든다고 다짜고짜 욕을 하는 입주민을 또 만날 수도 있겠죠.

그런 경험을 해가며 아직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하며 번 돈, 누군가에게는 '고작 몇십'일 수 있지만 내게는 '고작'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계속 배달 일을 하겠지만요.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있다면, 그런 내 노동의 시간이 진정 귀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역시 내가 어딘가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나보다 아래로 보이는 제3의 누군가에게 퍼붓지 않으며 살려고 합니다.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귀하고,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제 짧은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저보다 오랜 경험자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가볍게, 한편으론 깊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그:#우유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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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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