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05 14:07최종 업데이트 19.07.05 16:19
'맴맴맴' 매미 우는 소리가 마을 이곳저곳에서 정신없이 날 때였다. "할아부지 안에 계세요?" 아무런 답변이 없자 재차 물었다. 잠시 후 방에서는 대답 대신 '콜록'하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가 뭘 하시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양자는 감히 방문을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소에 '호랑이 할아버지'로 소문난 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잠시 후 전등 세 개가 동시에 꺼졌다. "악" 소녀는 어떨 결에 비명을 질렀다. 전등 나간 것이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머니 백순현이 마실 갔다가 집에 들어오며 "왜 불이 꺼졌니?"라고 물었다. "몰라" 문양자의 입술을 잔뜩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전깃불은 나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몇 시간 째 혼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엄마는 왜 이제야 오는 거야?"하며 투정을 부렸다.


집안 상황을 딸한테 들은 백순현도 안방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옆집으로 달려갔다. 집안 일가 되는 이를 불러 왔다. "형님 안에서 뭐하십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었다. "어허" 문기홍이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1951년 8월 뜨거운 여름 날, 문기홍은 세상과 이별했다.

징역 10년 선고 받았는데... 사형    
 

부역죄로 학살당한 문상국 ⓒ 박만순


땅거미가 마을 초가지붕을 모두 삼켰을 무렵이었다.

"문상국씨 계시오."
"누구십니까?"
"서에서 왔소.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경찰서에 갑시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부하겠는가. 문상국은 아내가 차린 밥상을 받아 막 밥숟가락을 뜰 찰나였다. 평소 겁이 많던 아내 백순현은 마당에 나가지도 못 했다. 소녀 문양자(당시 7세)는 "아부지 어디 가유?"하며 따라갔지만, 경찰 두 명이 문상국의 양쪽 팔을 낚아챘다. 문양자가 뒤를 따라 나서려자 뒤에 있던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 집에 들어가, 며칠 후면 아버지가 오실 거야"하며 등을 토닥였다. 아버지 문상국은 그렇게 눈 쌓인 골목길을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1951년 12월 말이었다.

"피고인 문상국(31세)은 1950년 8월 8일 (충남)대덕군 기성면 장안리 민청위원장에 취임하고~ 이병찬을 위협하여 76만 원을 갈취했다. 위와 같은 죄로 징역 10년에 처한다."

대전지방법원 판사의 선고는 1951년 1월 8일 내려졌다. 연행된 지 불과 10여 일만에 내려진 것이다. 연행 당시 문상국은 31세로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그는 북한군 점령시절 고향에 사는 부친 문기홍의 안부 인사차 몇 차례 장안리에 다녀가기는 했다. 하지만 문상국은 대전에 거처가 있었기에 시골에서 민청위원장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정황은 무시되었고, 중형이 선고됐다.

선고 후 불과 닷새가 지난 1951년 1월 13일경, 그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소위 부역죄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판결은 분명 징역 10년이었지만 집행은 사형으로 둔갑해버렸다. 이런 황당한 형 집행이 20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좌익사상에 반대한 이가 빨갱이?  
 

공무원 시절의 문상국 공주군청 근무시 동료들과 함께(가운데가 문상국) ⓒ 박만순


일제강점기에 공주군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 문상국은 해방 후 대전에서 경찰을 하다가 6.25 전 신문기자로 직업을 바꾸었다. 그가 특별히 좌익 활동을 했다는 자료나 증언이 없는데, 부역 죄로 사형을 당한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판결문에 나와 있는 이병찬에게 괘씸죄에 걸린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병찬은 원래 외지인으로 충남 대덕군 기성면 장안리 산막골에서 살던 이다. 그는 정부로부터 야산을 사 벌목(伐木)을 해 돈을 버는 사업을 했다. 전쟁 전 이병찬이 장안리 장씨 산을 샀는데, 마을 훈장을 하던 문양자 할아버지 문기홍이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 집안에 갈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상국은 평소 좌익사상에 반대했다고 한다. 딸 문양자(1944년생.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는 "해방 직후 아버지는 마을 처녀들에게 '여성동맹'에 참여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셨대요"라고 증언한다. 그의 전력과 당시 직업, 거주지, 언행 등을 살펴봤을 때, 장안리 민청위원장을 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사법부의 판결을 모두 믿는다손 치더라도 10년형을 받은 그가 사형을 당한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상국의 어이없는 죽음은 한 가족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왔다. 문상국의 어머니 장준숙은 아들이 죽고 난 후 화병에 걸렸다.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아들이 죽고 난 지 약 2개월 만인 1951년 3월 세상을 떴다.

이번에는 문상국의 아버지 문기홍이 그해 8월에 자살했다. 평소 한학을 배워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선비가 왜 자살을 택했을까? 그 이유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6.25 발발 직후 일이었다. 충남 대덕군 기성면장이 피난을 가면서 문상국을 데려갔다. 그런데 문기홍이 "우리 아들이 뭔 죄가 있다고 피난 가냐"며 대구로 가는 피난 길 도중에 데려 온 것이다. 만약 아들이 대구로 피난을 갔다면 부역 죄로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문기홍은 자신 때문이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문상국과 그의 부모가 한 해에 모두 사망하고, 다음해 문상국의 아내는 개가(改嫁)했다.

뿔뿔이 헤어진 남매
 

문양자 남매 문양자 삼남매(좌측부터 문순자, 문양자, 문경호) ⓒ 박만순


졸지에 문양자 남매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남매는 뿔뿔이 헤어졌다. 여동생 순자는 어머니가 데려갔지만 남동생 경호는 고아원 신세를 져야 했다. 오갈 데 없는 문양자는 친척 집 몇 군데를 전전긍긍하다가,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외가) 이모 집으로 보내졌다. 학교를 보내준다는 이유였다. 그때까지 문양자는 초등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해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대전시 삼성동에서 국수집을 하고 있던 그 이모네 집에서 한 일이라곤 부엌데기였다. 국수 삶고 음식 나르고 잔심부름하는 게 전부였고, 학교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하루는 이모가 심부름을 시켰다. 시장에서 소를 '야메(뒷거래의 비표준어)'로 잡은 이의 일을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그 일이란 삼성동에서 중앙시장까지 불법으로 도축한 소를 운반하는 것이다. 소다리 하나씩을 큰 대야에 담아 어린 아이 4명이 머리에 이고 나르는 것이다. 3km 거리를 이고 가면 목은 이미 자라목이 되었다. 문양자가 12세 때의 일이다. 이렇게 심부름을 해서 150원을 받으면 진외가 이모가 그 돈을 모두 빼앗았다. 부모 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삼성동 이모 집에서 나와 간 곳은 대전에 있는 대영노트공장이었다. 그곳에서 2~3개월 심부름 하다가, 14세에 대전방직 매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점에서 일하는 이들 밥 해주고, 심부름 하는 일이 그녀의 몫이었다. 월급은 없었다. 1년을 무급으로 일하고 나니 공장에 정식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15세에 취직한 것인데, 당시 가장 어린 나이였다. 대전방직은 노동자 3천명이 다니는 대기업이었다. 이 곳에서 그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으쌰 으쌰" 소리가 약하게 들리더니, 구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앞 구호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뒷 구호는 알 수 있었다. "~노동자는 동참하라" 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순간 고참 노동자들의 '와' 소리에 기계가 꺼지면서, 일하던 동료들이 우르르 공장 정문으로 몰려 나갔다. 문양자도 당연히 뒤를 따라갔다. 시내로 진출 하지는 않았지만 공장정문에서 연좌농성을 했다. 문양자가 겪은 4.19혁명이다.  

아버지를 찾다

문양자가 몸이 엄청 아팠을 때였다. 하루는 꿈을 꿨는데, 트럭에 탄 아버지가 그녀에게 까스명수를 던져주며 "얼릉 먹고 일어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문양자는 순간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어딘가에서 학살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그 꿈을 꾼 2001년까지 아버지가 6.25 당시 학살된 줄 몰랐다. 그 꿈을 꾼 지 며칠 후 TV에 대전 산내에서 합동위령제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편에게 "여보 나 저기 태워다 줘요"라고 해 산내에 부리나케 갔다. 아버지가 학살된 현장을 찾은 것이다.

2003년에는 국가기록원에서 아버지 판결문을 찾았다. 2007년도에는 할아버지의 한 많은 죽음에 대해서도 알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인조사를 하면서 집안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1951년 8월 할아버지가 목메던 날 문양자 집에 왔던 집안 아저씨였다. 할아버지의 죽음사연을 듣고 그녀는 며칠을 울었다.

소녀 문양자에게 "지금은 여자도 공부를 해야 되는 시절이다, 너 크면 아버지가 유학 보내 줄게"라는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겪은 그녀의 상처를 누가 씻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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