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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뜻으로 2007년 제정된 법정기념일입니다. 12년이 지난 현재, 한 해 10만 쌍 넘게 이혼하면서 전통적인 결혼관에 균열이 나고 있습니다. 2019년 5월 21일, 새로운 부부관계의 꼴로 떠오른 졸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편집자말]
"나중에 아이 좀 크면 따로 살아볼까?"

다섯 살 딸을 겨우 재운 밤이었다. 불 꺼둔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던 남편에게 떠보듯 물었다. 결혼 생활에 큰 결함이나 문제는 없었다. 때마침 틀어둔 연예 프로그램에서 시끌벅적하게 다룬 한 작가의 졸혼 소식 때문이었다. 작가의 사생활보다는, '졸혼'이라는 낯설면서도 신비로운 개념에 호기심이 일었다.

졸혼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되 각자의 삶을 사는 방식이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글자 뜻 그대로 '독립'에 방점을 둔다. 무려 15년 전 <졸혼시대>(원제: 卒婚のススメ)라는 책을 내며 신조어를 만들어낸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는 "졸혼은 틀에 박힌 가정생활을 송두리째 뒤엎는 새로운 삶의 태도"라고 강조한다. 한 곳을 바라보며 하나로 움직이는 게 전통적인 결혼관이었다면, 졸혼은 각각의 개성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따로 사는 것이다.

간혹 결혼 후 주어진 환경이 꽉 끼는 옷처럼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남편이 물건을 쓰고 또 제자리에 두지 않았을 때, 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자식 이상의 도리를 요구받을 때 유독 그렇다. 가족이라는 관계에 치여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이면 물리적으로 혼자 남겨지고 싶다는 열망이 강렬해지곤 한다. 졸혼의 '따로 또 같이'라는 철학은 매력적인 대안처럼 느껴졌다.

"따로 사는 게 꼭 답일까?"

남편은 서운하면서도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중요한 건 가족 구성원 개개인을 존중하려는 마음과 태도이지, 따로 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앞표지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앞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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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 달 전 남편과 나눈 대화다. 지금은 졸혼을 향한 은밀한 호기심이 시들었다. 도리어 남편의 가설을 믿고 네 식구(나, 남편, 아이, 반려견)와의 생활을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즐겨봐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은 상태다. 꼭 졸혼이 아니더라도 늘 예기치 못한 이별의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게 부부라면, 함께 지지고 볶는 현재를 후회 없이 만끽하고 싶어졌다. 이게 다 '동거 전도사'인 두 여성이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 덕이다.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작가 김하나와 황선우가 쓴 동거 이야기이자 '듀엣 응원가'다. 두 사람은 10년 넘게 각자 1인 가구로 지내다 2년여 전부터 넓은 집을 마련해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생활 방식이 180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울고 화해하고 웃으며 일궈가는 일상은 질투 나도록 눈부시다.

한집에서 같이 사는 건 매한가지인데 왜 나를 포함한 많은 기혼 남녀들은 솔로가 되기를 꿈꾸고, 그녀들은 듀엣이 되라고 예찬할까. 그들과 나의 차이는 하나다.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

결혼의 본질이 한집에서 같이 사는 것이라면, 나의 동거가 그녀들의 그것과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두 여성의 동거 노하우를 내 결혼에 적용해보며 함께 살기의 장점과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건 어떨까.
 
하나. 둘만 같이 살아도 단체 생활이다
 

패션 잡지 에디터인 황선우는 보디로션만 종류별로 열두 개씩 놓고 쓰는 맥시멀리스트인 반면, <힘빼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김하나는 최소한의 물건만 두고 사는 미니멀리스트. 게다가 집안 청결의 기준이 달라서 초반에는 집안일의 역할과 배분을 두고 다투기도 했다. 지난 2년여 간 쉼 없이 갈등해오며 두 사람은 깨달았다. 집안일과 생활습관이란 어느 쪽이 옳다는 정답이 없을 뿐더러, 항목을 기계적으로 배분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문제가 아님을.

황선우의 상사였던 < W KOREA > 이혜주 편집장은 결혼 생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둘만 같이 살아도 단체 생활이다." 동거의 성패는 서로 라이프 스타일이 맞느냐보다, 공동 생활을 위해 노력할 마음이 있느냐에 달렸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함께' 노력하기다. 이게 내가 살던 방식이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망부석처럼 버티거나, 네가 틀렸으니 당장 바꾸라며 달려드는 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각자 잘하는 일을 맡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습관을 조금씩 개선해나가며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게 동거의 미덕이다. 황선우가 물건을 덜 사들이면서 김하나의 불안을 잠재우고, 김하나가 집안일의 디테일을 잡아가며 황선우의 빈틈을 채우듯이 말이다.
 
이제 동거인과 같이 산 지 2년이 넘었다. 만족도는 최상급이다. 동거인은 각종 요리와 어지르기, 빨래 돌리기를 맡고 나는 설거지와 청소, 정리, 빨래 개기를 맡아 집안일의 배분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한집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누그러진다. 서로의 인기척에 자연스레 잠이 깨고 집에서 매일같이 인사(잘 잤어? 어서 와. 다녀올게!)가 오가는 게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 김하나 '분자 가족의 탄생' 중에서
 
둘. 건강하게 싸우는 법을 익혀야 한다


가끔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무엇을 위해 싸우나'라는 의문이 피어오를 때가 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비정하고 잔인한 말을 내리꽂는 내 모습이 흡사 목표물을 제거하려는 킬러 같아서다. 반대로 화가 나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묵언 시위를 벌이는 남편을 보면 나와 더 나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한 것처럼 느껴져 서운해지곤 한다.

황선우는 "이 싸움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함께 사는 사람과의 싸움은 결국 잘 살기 위한 과정이지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급소를 내리꽂거나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짓밟아버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싸움을 피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다. 황선우의 말대로 함께 사는 사람과의 싸움에는 도망갈 곳이 없다. 밉고 원망하는 감정들을 흘려보내고 제자리로 잘 돌아오기 위해서는 안 싸우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제대로 싸워야 한다.

그가 김하나와 함께 살며 터득한 싸움의 기술은 이런 것이다. 진심을 담아 빠르게 사과하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입으로 확인해서 정확하게 말하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려 어떨지 언급하고 공감하기.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 황선우 '싸움의 기술' 중에서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 아닐까? 관습과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러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 아닐까? 관습과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러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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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

나는 옷에 밴 담배 냄새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혐연인인데, 남편은 하루에 담배 한 갑 이상 피우는 헤비 스모커다. 간혹 어떤 지인들은 전혀 다른 우리 둘이 어떻게 같이 사는지 궁금해한다. 별다른 비결은 없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을 뿐이다.

담배는 남편에게 기호 그 이상임을 나는 알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게 꼭 백해무익한 담배여야 하는지 지금도 묻곤 하지만, 그렇지만 금연을 요구하진 않는다. 결혼 초기에는 '나를 위해 담배 하나 끊지 못하냐'고 원망한 적도 있지만, 누군가의 삶 한 부분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건 남편의 세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다만 남편도 자신의 흡연이 같이 사는 내 세계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꼭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가서 피우며, 집에 돌아와서는 손을 닦고 양치까지 한다. 어떤 차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곁에 두고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서로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황선우와 김하나에게도 이해의 영역 밖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황선우는 세부 품종까지 꿸 정도로 딸기 애호가이지만 김하나는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황선우는 딸기를 홀로 먹는 동안 의아하다가 조금 슬퍼지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같이 사는 사람이 꼭 같은 걸 좋아해야 하는 법은 없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기. 그들이 깨달은 공존의 첫 단계다.
 
다른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같이 생활하는 일은 여러모로 가르침을 준다. 세상에는 나와 아주 다른 성향과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내던 나의 성격과 특질의 도드라진 부분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배움은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 황선우 '두 종류의 사람' 중에서
 
넷. 의무는 덜고 호의만 남겨야 한다
 

황선우·김하나의 동거와 나의 동거가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은 명절이다. 두 사람은 명절이면 각자 부모님께 다녀오거나 안부를 전한다. 그게 끝이다. 가끔 일정이 맞을 때 서로의 부모님을 만나 함께 식사하곤 하지만 무언가 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다.

구워주시는 고기를 먹고, 채워주시는 맥주를 마시며 초대된 몫을 다할 뿐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치껏 부엌으로 달려가 과일을 깎거나 설거지를 할 필요도, 나아가 효도를 고민할 부담도 없다. 부모님들은 그저 내 딸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두 사람 모두 그 순간을 '즐겁고 따뜻한 시간'이라고 추억하며 묻는다. "관계에서의 의무는 지지 않지만 자식의 옆에 있어주어 든든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위치라면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는 일도 얼마나 산뜻하고 가뿐할까?" 그들 역시 동거인의 부모님을 오랜만에 뵈면 반갑고 베풀어 주시는 호의에 감사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거인의 부모님을 정기적으로 찾아뵈어야 한다거나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일손을 보태야 한다는 의무나 도리 같은 건 없다. 효도는 당연히 셀프니까.
 
호의. 이게 '원래의 마음' 아닐까? 관습과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로 짓눌러버리기 이전의, 좋아하는 친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갖는 친근한 마음.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이 나라 모든 며느리, 사위, 장인 장모, 시부모들의 원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 김하나 '우리는 사위들' 중에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위즈덤하우스(2019)


태그:#여자둘이살고있습니다, #결혼, #졸혼, #동거,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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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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