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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아빠는 부당해고 노동자이다. 직장 폐쇄를 반대하며 공장을 점거하는 농성에 가담해 구속됐었다. 단순가담자로 밝혀져 한 달 만에 나왔지만. 그런 아빠는 풀려나자마자 "되도록 멀리, 회사와 상관없는 곳으로 이사 가자"라고 한다.

엄마에게 '이제 새 출발 하려나 보다'라는 희망을 준 아빠는 이사를 하자마자 회사 앞으로 간다. 그리고 이번엔 농성 적극가담자가 된다. 그후 석 달도 더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재희는 아빠에게 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많다. 그래서 막연하게 짜증이 나고 불안한 날들이다.
 
중학교 마칠 때까지 필요한 정도의 돈은 내 통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정도면 될 거라고 엄마가 확인시켜 줘 아예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 체험 학습 장소와 날짜, 경비 내역이 적힌 안내문을 엄마한테 보여줬다. 처음이라 그런지 장사가 안 된다는 엄마 말은 들었지만, 많이 심각한가? 

"돈이 없으니까 그랬겠지. 있는 데도 안 빠졌겠냐? 대한민국 전산을 뭘로 보고." 

느닷없이 뭔 나라? 나라와 민족 앞세우는 사람치고 진짜 믿을 사람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일수록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고 아빠는 강조했다. 어쩜 회사의 해고자 문제에 세상이 조금만 빨리 관심을 보여줬어도 이 믿음은 폐기처분 됐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세상을 삐딱하게 보진 않았을 거다. 아빠의 말에 동조하듯 나는 공책을 책상에 거칠게 내려 놓는다. 누구에겐지 모르지만 열이 확 뻗쳤다. 반장은 다른 분단으로 건너갔다. 나 말고도 다른 미납자를 찾는 건지 두리번거렸다. - '일 달러, 움켜진 희망'에서 

재희는 얼마 전 전학 왔다. 아빠의 해고로 부쩍 궁핍해진 것이나, 뉴스의 주인공이 되곤 하는 농성 중인 아빠 등, 자신의 사정을 새로운 친구들이 몰랐으면 싶다. 그런데 반장은 시시콜콜 아는 체 하려 든다. 오늘따라 더욱 얄밉다. 며칠 후로 다가온 현장체험학습비가 밀렸음을 확인해주며 자존심까지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짜증나고 불안해진 재희는 방과 후 수업까지 빼먹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유일한 밥줄이라 이사 온 후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엄마의 분식집이 굳게 닫혀 있다. 게다가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손대지 않던 스쿨뱅킹 통장에서 얼마 되지 않는 돈까지 인출해버린 후 아무런 연락이 없다. 

그 밤 재희는 이사 오며 멈췄던, 환영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힘든 악몽에 다시 시달린다. 회사 정문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농성중인 아빠에게 방패를 든 경찰들이 달려들자 그런 경찰을 붙잡고 늘어지는 엄마.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자욱한, 꿈일 뿐인데 매캐하고 가슴 답답해지는 그런…. TV에서 본 장면들이었다.
 
<우리들의 DNA> 책표지.
 <우리들의 DNA> 책표지.
ⓒ 바람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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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DNA>(바람의 아이들 펴냄)는 단편집이다. '심연의 물고기, 하늘거린다', '꽃잎이 된 교복', '굽은 소나무' 등 모두 여섯 작품이 수록됐다. 재희가 주인공인 '일 달러, 움켜쥔 희망'은 '쌍용자동차 노동자 정리해고 그 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절망'을 배경으로 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정리해고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정리해고 2년 만에 노동자와 그 가족 20명이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22번째 자살 사망자와 30번째 사망자를 추모하던 기사도 생각난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80%가 우울증이 심각'하다거나 '자살률이 3.7배 높다', '해고노동자 아내들 대부분 죽음을 생각했다'는 내용의 기사 등도 생각난다. 

소설 속에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가족의 죽음이 나온다. 해고근로자인 그는 일자리를 찾아 이사를 했지만 블랙리스트에 걸려 변변한 일을 구할 수 없었다. 일 때문에 이틀째 집에 돌아오지 못한 그날, 아이들의 엄마가 죽는다. 그런 엄마의 주검 옆에서 아이들은 이틀 밤을 잤다던가. 그것도 집안에 먹을 것이 전혀 없어 발견되었을 당시 몇 끼나 굶어 늘어진 채로.

같은 뉴스를 한 공간에서 함께 봐도 저마다의 처지나 시각 등에 따라 달리 받아들이거나 기억하게 된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처럼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농성 같은 노사 관련 뉴스를 보게 되면 그들의 가족들이 더 걱정되곤 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직장을 잃고 부재중인 가장 대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무게로 훨씬 고단하게 살아내고 있을 그들의 아내들과, 불운한 부모의 사정을 헤아리며 수많은 바람과 꿈들을 스스로 꺾어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럼에도 어찌 도움 되지 못하는,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아쉬워지곤 하는 그런… 정도로 표현하면 될까.

'일 달러, 움켜쥔 희망'은 아마도 해고노동자 가족이라면 누구나 겪을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것으로 노동자 가족의 불안한 삶과 비극에 깊이 공감하게 한다.
 
최저 임금 인상 문제를 놓고 시끌시끌하다. 몇 가지 까닭을 들어 기업들은 어렵다고 항변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 노동자의 소득이 증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임금이 더 올라가면 마치 나라 전체가 거덜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이도 있다. 그뿐만 아니다. 노동조합 결성을 금지하거나 정당한 노조 활동들을 죄악시하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노동을 귀하게 여기고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마땅함에도 전혀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굽은 소나무」의 '마리'와 「DNA」의 '신이' 엄마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믿음, 대학을 위해서라면 현재의 행복쯤은 내팽겨 쳐도 된다는 태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건네주는 '민혜'와 수행평가를 대신 해줬다고 고백하며 편법에 맞서는 아이들, 실수가 실패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독여 주는 활동가 형 같은 분들 덕분에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삶의 DNA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짧은 이 여섯 편의 글이 공부를 왜 하는지,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참 좋겠다. - '저자의 말'에서.  

여섯 작품 모두 주인공이 중학생인 <우리들의 DNA>에는 이 소설 외에도 다른 학생에게 수행평가를 대신 시키는 교사인 아빠를 둔 아이( '심연의 물고기, 하늘거린다)', 오직 공부를 위해 혼자 나가 살겠다는 잘난 언니를 둔 동생인 나('굽은 소나무'), 아빠의 장례식 날에도 장사를 하겠다는 엄마가 싫지만 남들이 비난하자 엄마를 감싸는 아이('DNA')등, 현실성 강한 소설들이 실려 있다. 저마다의 입장과 역할에 대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 살갑게 와닿고, 깊이 공감하게 한다. 중학생 주인공들의 성장통, 그 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DNA

양인자 지음, 바람의아이들(2019)


태그:#우리들의 DNA, #양인자(소설가), #쌍용자동차 해고, #청소년 문학,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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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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