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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꾼다. 경성제국대학 현판의 제국이라는 글자에 흰 종이를 붙여 경성대학으로 읽도록 했다고. 타이페이제국대학(台北帝國大學)의 경우 일본 패전 이후에도 일부 일본 교직원이 상당 기간 남아 대학 업무와 자료를 인수인계했는데, 경성제국대학 교직원은 대부분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일본인 교직원이 다수를 차지한 상황에서 대학과 도서관 업무가 제대로 인수인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부터 서울대학교 출범 전까지 이어진 경성대학 시절 도서관장은 이인영이다.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전 연희전문 강사였던 그는 해방 후 경성대학 교수와 도서관장, 연희대학 교수로 재임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을 역임한 그는 골동품과 고서 수집을 통해 서지학과 활자 연구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경성대학 도서관장을 맡은 것도 그가 서지학 전문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가 되기까지 
 
구 서울대학교 본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으로 쓰이는 구 서울대학교 본관은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건축 기수로 일한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이다. 김소연에 따르면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이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수가 된 최초의 조선인이다. 조선총독부 최고 기술자인 기사에 오른 것도 조선인 중 그가 처음이었다. 경복궁에 지은 조선총독부 공사에 참여한 걸로 알려진 박길룡은 1943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구 서울대학교 본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으로 쓰이는 구 서울대학교 본관은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건축 기수로 일한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이다. 김소연에 따르면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이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수가 된 최초의 조선인이다. 조선총독부 최고 기술자인 기사에 오른 것도 조선인 중 그가 처음이었다. 경복궁에 지은 조선총독부 공사에 참여한 걸로 알려진 박길룡은 1943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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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남한 지역에 진주한 미군은 휴교령을 내리고 학교와 도서관 같은 교육시설을 점유해서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도서관의 피해가 컸는데, 특히 장서의 훼손이 심각했다. 경성대학도 제308 폭격비행단 미군 장교 숙소와 병영으로 징발됐는데, 이 과정에서 도서관과 이공학부 연구실이 약탈되거나 파괴됐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최호진은 경성대학을 점령한 미군이 상당수 책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고서적상에 팔아넘겼다고 증언했다. 서울대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때 다시 미군에게 점유되는데, 서울 수복 후인 1950년 10월 3일부터 1953년 9월 15일까지 미 8군 사령부가 도서관을 포함한 서울대 건물을 사용했다. 

1946년 7월 13일 미군정은 경성제국대학에 뿌리를 둔 경성대학과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8개 국립 전문학교, 사립이었던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와 경성음악학교를 통합해서 국립대학교를 설립하는 안(국대안)을 발표한다.

미군정의 국립대학교 설립 시도는 각 학교 교수와 학생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통합이 되면 고등교육기관 수가 줄고, 각 학교 고유성이 사라지며, 총장에 미국인이 임명되면서 학교 운영 자치권이 사라진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을 강행하자 국립대학 안 반대운동은 서울대학교 내부뿐 아니라 다른 학교에까지 동맹휴학 형태로 번졌다.

동맹휴학에 참여한 학교 수가 57개에 달했고 시위 참가자는 4만여 명에 이르렀다. 학생과 교수의 동맹휴학에 미군정이 휴교 조치로 맞서며 갈등은 격화된다. 이 과정에서 1947년 5월 서울대학교 학생의 절반에 해당하는 4956명이 제적되고 전체 교수의 2/3인 380명이 해임된다. 

1947년 5월 미군정이 국립대학안에 대한 수정법령을 공포하면서 반대 운동은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제적 학생 중 3518명이 복적 되면서 국립대학 반대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은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서울대학교로 전환한 후에도 도서관은 한참 동안 경성제국대학 시절 서류 양식을 그대로 사용했고, 1952년 무렵까지 경성대학도서라는 인장을 사용했다. 국립 서울대학교 출범 과정에서 여러 관립학교 시절 수집돼 날인된 책이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 장서로 흡수되었다.

국립대학교 설립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던 1946년 9월 18일 서울대학교 8개 단과대학은 개학식을 거행했다. 종합대학으로 서울대학교가 출범했음에도 서울대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은 각각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법문학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이중적 역사 인식'을 지금도 드러내고 있다.

'일란성 쌍생아' 김일성종합대학의 탄생
 
서울대학교와 나란히 문을 연 김일성종합대학 ‘김대’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10월 1일 개교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 인민이 모은 성금과 쌀, 노동력 제공으로 건립된 걸로 알려져 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다수 농민이 자녀를 교육시킬 대학 건립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 건립 당시 농민이 모은 성금과 쌀은 1억 원에 달한 걸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개교를 앞두고 남한과 소련, 만주에서 저명한 학자를 광범위하게 초빙했고, 파격적인 대우로 당시 탁월한 업적을 지닌 교수를 상당수 확보했다.
▲ 서울대학교와 나란히 문을 연 김일성종합대학 ‘김대’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10월 1일 개교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 인민이 모은 성금과 쌀, 노동력 제공으로 건립된 걸로 알려져 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다수 농민이 자녀를 교육시킬 대학 건립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 건립 당시 농민이 모은 성금과 쌀은 1억 원에 달한 걸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개교를 앞두고 남한과 소련, 만주에서 저명한 학자를 광범위하게 초빙했고, 파격적인 대우로 당시 탁월한 업적을 지닌 교수를 상당수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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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사흘 빠른 1946년 9월 15일 평양에서 김두봉을 초대 총장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개교식이 있었다. 10월 1일 개교를 앞두고 김일성을 포함한 정당 대표가 참석한 개교식을 먼저 거행했다. 북한은 1946년 5월 25일 창립준비위원회를 만들고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공식 결정에 따라 종합대학 창설을 준비했는데, 미군정의 국립 서울대학교 추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남과 북이 경쟁하듯 국립대학 설립을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이학부, 문학부, 법학부, 공학부, 농학부, 의학부, 운수공학부 등 7개 학부, 60여 명의 교수, 1500여 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지금은 15개 학부, 60여 개 학과가 있다).

1947년 3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이 문을 여는데, 서적 기증 운동을 통해 6만 3천여 권의 장서를 마련했다고 한다. 평양공업대학(현 김책공업대학), 사리원농업대학(현 원산농업대학), 평양사범대학(현 김형직사범대학)이 차례로 문을 열어 1949년 9월에는 15개 대학이 개교했고 1만 8천여 명의 학생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교육 분야에서 '현상 유지' 정책을 펴던 미군정은 북한 지역에서 소비에트화가 진행되자 남한에서 정책을 전환한다. 초등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의 6-3-3-4 학제가 도입된 것도 1946년 9월 1일부터다. 이 과정에서 중도 또는 좌파 성향의 교육 전문가가 교육 정책 수립 과정에서 배제된다. 남한에서 '반공'을 틀로 하는 미국 교육이론이 횡행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국립대학 제도가 없는 미국이 남한 지역에서 국립 서울대학교를 출범시킨 것은 왜일까. 명목상으로는 통합을 통해 건물과 시설, 인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경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군정 학무국 부국장으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안을 주도한 오천석은 미국 주립대학을 모델로 국립종합대학을 구상하면서 관공립 고등교육기관에 재직하던 좌익 및 반대 성향 교수를 배제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은 교수 축출 및 교수 재임용 제도의 나쁜 선례로도 기능했다. 

서울대학교 설립으로 귀착되고 말았지만 해방된 나라, 새로운 공화국 시대에 맞는 국립대학교는 왕조 시대 성균관의 부활도,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학의 존속도 아닌 '제3의 길'이 아니었을까. 

대학도서관의 '분단'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 조형물은 미술대학 강찬균 교수가 제시한 안으로 1978년 세워졌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당시에는 '상징을 위한 상징'이라고 학생들의 비판이 심했다. 정문 조형물은 국립 서울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ㄱ', 'ㅅ', 'ㄷ'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서울대 교훈처럼 진리를 찾는 열쇠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 조형물은 미술대학 강찬균 교수가 제시한 안으로 1978년 세워졌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당시에는 "상징을 위한 상징"이라고 학생들의 비판이 심했다. 정문 조형물은 국립 서울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ㄱ", "ㅅ", "ㄷ"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서울대 교훈처럼 진리를 찾는 열쇠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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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갑작스레 터지자 서울대학교 도서관 장서와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귀중본은 그대로 방치됐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연구실은 서울시 인민위원회가 사용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과정에서 북한 교육성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성백선을 임명했다. 

서울대학교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국보급 문화재인 규장각 귀중본을 비롯한 서울대 도서관 장서를 평양으로 옮기려 했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북한 인민군은 서울대 도서관에 있던 규장각 도서를 트럭으로 수송하다가 미군 폭격으로 의정부에 두고 가기도 했다.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이나 평양시립도서관을 전환한 국립중앙도서관이 도착지였을 것이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울대 도서관 장서의 평양 반출은 많지 않았으나 창경궁 장서각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본이 북한으로 반출돼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장서를 이어받은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승계한 서울 국립도서관에 비해 1946년 평양에 문을 연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은 장서가 한참 부족한 상황이었다.

도서관의 3요소가 시설, 장서, 사람이라고 할 때, 시설은 짧은 기간에 갖출 수 있지만 장서와 도서관 전문 인력인 사서 또는 사람은 단기간에 갖추기 어렵다. 해방 이후 김일성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도서관에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생각할 때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한 도서관의 장서와 도서관 전문가를 확보하려 했을 가능성은 높다.

'모시기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납북 대상에 도서관 전문가를 포함시켰을 개연성도 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 부관장 박봉석, 경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이인영, 서울대학교 초대 도서관장 김진섭이 모두 '납북'된 것은 우연일까. 

김기석 서울대 교수는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을 경성제국대학이라는 하나의 모태로부터 탄생한 '일란성 쌍생아'로 설명한 바 있다. 대학뿐 아니라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모태로 한 쌍생아의 탄생이 남북 대학도서관에서도 일어난 건 아닐까. 이렇게 탄생해서 나뉜 남과 북 최고 대학도서관은 미국과 소련식 대학 체제를 각각 수용하면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서울대학교가 골프장으로 이전하게 된 사연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리모델링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1967년 8월 26일 문을 연 관악컨트리클럽(관악골프장)은 장마와 험한 산세 때문에 코스가 무너지는 등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대학교가 공릉동이 아닌 관악으로 이전하기로 함에 따라 관악CC는 11억8천만 원에 부지를 넘기고 3년만에 문을 닫았다. 관악골프장 클럽하우스였던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은 서울대학교 건물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다. 교수회관 머릿돌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이전보다 훨씬 빠른 1967년 4월 14일 날짜가 새겨져 있는 건 이 때문이다.
▲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리모델링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1967년 8월 26일 문을 연 관악컨트리클럽(관악골프장)은 장마와 험한 산세 때문에 코스가 무너지는 등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대학교가 공릉동이 아닌 관악으로 이전하기로 함에 따라 관악CC는 11억8천만 원에 부지를 넘기고 3년만에 문을 닫았다. 관악골프장 클럽하우스였던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은 서울대학교 건물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다. 교수회관 머릿돌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이전보다 훨씬 빠른 1967년 4월 14일 날짜가 새겨져 있는 건 이 때문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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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까지 국립 서울대학교는 서울과 수원 곳곳에 단과 대학이 흩어져 있었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종로구 연건동에 의과대학, 간호대학, 치과대학이, 성북구 종암동에 상과대학이, 노원구 공릉동에 공과대학이, 중구 을지로에 사범대학이, 경기도 수원시에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이 있었다. 

1967년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귀빈실 하나 없던 서울대학교의 노후한 시설 개선을 지시했다고 한다. 1968년 8월 26일 공과대학이 있던 태릉 일대 66만평 부지로 서울대학교가 옮길 거라는 계획이 조감도와 함께 발표됐다.

하지만 부지가 좁다는 이유로 1969년 이 계획은 취소된다. 서울대학교가 실제로 이전한 곳은 관악산 아래 '관악컨트리클럽'이라는 골프장이 있던 자리다. 지금도 서울대학교에는 관악골프장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은 관악골프장 클럽하우스를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대통령의 '자상한'(?) 지시로 서울대 이전 부지를 물색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박정희 정권 반대의 선봉에 섰던 서울대 학생들을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격리시키고자 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관악산 아래 새롭게 이전한 서울대 정문 앞에 동양 최대 규모 파출소를 지은 걸 보면 말이다(관악파출소는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에 기동경찰 300여 명의 휴식과 대기가 가능하도록 지었다). 실제로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 캠퍼스는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과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이 모두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에 있던 옛 서울대학교 부지는 공원(마로니에 공원)으로 바뀌거나 일반에 매각됐다. 대학천을 라 세느(세느강)로, 응란교를 미라보 다리로 불렀던 '서울대 문리대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동대문 시장 뒷골목 책 도매상가가 모인 골목을 '대학천'이라 부르는 이유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이곳을 거쳐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 이름이 대학천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문리대의 관악산 이전 후 대학천은 복개된다.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건물은 단 한 곳만 남기고 모두 헐리는데,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 '구 서울대학교 본관'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으로 쓰이는 구 서울대학교 본관은 1931년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1세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경성제국대학 본관(구 서울대학교 본관)은 1981년 사적 278호로 지정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찾아서
 
'공공그라운드'로 바뀐 옛 샘터사 사옥 서울대학교과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동숭동에 있던 대학 건물을 허물 때 일본 사람들은 그 벽돌의 일부를 구입해서 도쿄로 날라 '경성제국대학 기념관'을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있던 곳에는 아르코예술극장과 옛 샘터사 사옥 같은 건물이 들어서서 이곳에 식민지 조선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기 어렵다. 건축가 김수근은 '멀리서 건물을 볼 때 입구가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없으면 실패한 건물'이라고 자주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르코예술극장과 옛 샘터사 사옥은 한눈에 입구를 알아볼 수 있다.
▲ "공공그라운드"로 바뀐 옛 샘터사 사옥 서울대학교과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동숭동에 있던 대학 건물을 허물 때 일본 사람들은 그 벽돌의 일부를 구입해서 도쿄로 날라 "경성제국대학 기념관"을 지은 걸로 알려져 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있던 곳에는 아르코예술극장과 옛 샘터사 사옥 같은 건물이 들어서서 이곳에 식민지 조선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기 어렵다. 건축가 김수근은 "멀리서 건물을 볼 때 입구가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없으면 실패한 건물"이라고 자주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르코예술극장과 옛 샘터사 사옥은 한눈에 입구를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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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최대 규모를 자랑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부속도서관은 마로니에 공원을 가운데 두고 경성제국대학 본관, 지금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했다. 그러면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있던 도서관 건물은 어떻게 됐을까.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건물은 해방 이후 국립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30년 가까이 쓰였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있던 도서관 건물은 헐리고 부지는 매각된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이전 후 이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세우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반대 여론으로 무산되고 마로니에 공원과 문화공간의 조성이 추진됐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어 서울대 도서관 건물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대표적인 건물은 '옛 샘터사 사옥'(지금의 공공그라운드)과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옛 샘터사 사옥과 아르코예술극장은 모두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박정희 시대를 호령한 바로 그 김수근 말이다.  

옛 샘터사 사옥은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은 건물로 붉은 벽돌 외관을 담쟁이넝쿨이 덮고 있어서 대학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수근은 샘터사 사옥, 아르코예술극장(옛 문예회관 공연장), 아르코미술관(옛 문예회관 전시장)을 모두 붉은 벽돌로 지으며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60년대 건축 재료로 노출 콘크리트를 주로 썼던 김수근은 1970년대 들어 '벽돌'을 즐겨 사용했다. 김수근은 건물을 지은 후 건축주에게 담쟁이넝쿨을 심으라고 권유하곤 했다는데, 그의 자연주의 건축관을 드러내는 요소다. 

샘터사 사옥은 김수근이 소유주 김재순과 친분으로 1977년 설계했다. 공간의 기능적 측면에서 김수근의 대표작 '공간 사옥'과 유사한 건물이다. 김수근은 초기에는 검은색 전통 벽돌을 즐겨 썼다. 경사면에 검은색 벽돌로 지은 공간 사옥과 평지에 붉은 벽돌로 세운 샘터사 사옥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샘터사 시절 지하에는 파랑새 극장장이, 1층에는 화랑과 카페, 3층에는 샘터사 사무실이, 4층에는 승효상과 민현식이 쓰던 건축 사무소 이로재가 있었다. 

아르코예술극장은 김수근이 영국 국립극장의 올리버 시어터(Olivier Theatre)를 참조해서 설계했다. 열 지어 선 기둥으로 상징되는 세종문화회관이나 국립극장의 권위적 모습과 달리 그가 지은 아르코예술극장은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공연장 내부도 객석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무대와 객석을 가깝게 배치해서 관객이 무대와 일체감을 느끼도록 꾸몄다. 

혹자는 일제 시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어 해방 후 서울대학교 도서관, 그리고 출판사인 샘터사가 있던 이곳이 책과 출판에 어울리는 '지력'(地歷)을 지닌 곳이라고 얘기한다. <오우가>(五友哥)를 지은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점, 이공계 전문도서관인 학산도서관이 1977년부터 2002년까지 동숭동에 있었던 사실까지 상기하면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한국 근현대 대학도서관의 출발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관정관 건축가 이승우가 설계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외벽은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했고, 유리창이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지는 리본윈도(ribbon-windows) 방식으로 창을 냈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대칭의 권위적 외관을 지녔다. 2010년 건립된 명지대학교 방목학술정보관 같은 건물과 비교하면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얼마나 투박하고 권위적인 도서관 건물인지 실감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 2월 5일 기존 중앙도서관을 ㄱ자 모양으로 감싸안은 관정관을 개관했다. 새 도서관 신축에는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비롯한 학생과 동문, 교직원, 외부인사 930명이 건립에 참여했다. 600억 원을 출연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 기부로 도서관 신축이 추진됨에 따라 관정관으로 명명했다.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관정관 건축가 이승우가 설계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외벽은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했고, 유리창이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지는 리본윈도(ribbon-windows) 방식으로 창을 냈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대칭의 권위적 외관을 지녔다. 2010년 건립된 명지대학교 방목학술정보관 같은 건물과 비교하면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얼마나 투박하고 권위적인 도서관 건물인지 실감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 2월 5일 기존 중앙도서관을 ㄱ자 모양으로 감싸안은 관정관을 개관했다. 새 도서관 신축에는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비롯한 학생과 동문, 교직원, 외부인사 930명이 건립에 참여했다. 600억 원을 출연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 기부로 도서관 신축이 추진됨에 따라 관정관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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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조선의 국립대학 도서관인 성균관 '존경각'을 승계한 것이 아니라 식민 시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승계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과 관립학교 도서관의 시설, 장서, 사람이 그대로 이어져 출범했다. 1956년 <오스트볼트(Ostvold) 보고서>가 작성되고 '미네소타 프로젝트' 가동을 통해 미국식 도서관 체제를 도입하기 전까지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일본 제국대학 도서관 체제를 존속하고 유지했다. 

식민 시대는 우리의 '청산' 과제인 동시에 우리가 이어받은 '유산'이기도 하다. 좋건 싫건 한국의 근현대 대학도서관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대학도서관의 역사가 여기서 비롯됐으며, 근대 대학도서관의 '원형질'이 이곳으로부터 탄생해서 퍼져나갔다.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지 시대 조선에 존재했던 '유일한 대학'이지만 해방과 동시에 '잊힌 대학'이다. 시설과 장서 면에서 식민지 조선 최대 규모 도서관이던 부속도서관 역시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이어졌으나 곧 '잊힌 도서관'이 됐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거쳐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이제 어떤 도서관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표석도 흔적도 없지만 이곳은 한국 근현대 대학과 도서관이 탄생한 곳이다. 옛 샘터사 사옥과 아르코예술극장 건물은 대학로의 명소가 되었지만, 이 자리에 반세기 넘게 도서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은 식민 권력에 복무하는 인재를 양성했고, 한때 서울대학교는 독재 권력 유지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육사와 함께 '육법당'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기공식에 부쳐 서울대학교 국문과 출신 시인 정희성은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고 노래했다. 관악이 조국을 이끈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지만 박종철부터 우병우까지 '다양한' 인재를 배출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시민의 세금으로 대학을 세우고 운영하는 이유는 시민과 공동체를 위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국립' 서울대학교와 그 도서관은 이제 공화국의 권력자 시민에 복무하고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대학과 도서관으로 거듭난 걸까. 

[공공그라운드 : 옛 샘터사 사옥]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16 (동숭동) 
- 이용시간 : 09:00~23:00 
- 휴관일 : 매주 일요일
- 이용자격 : 자격 제한 없음. 시설 대관은 유료
- 홈페이지 : http://00ground.kr
- 전화 :  02-744-0015
- 운영기관 : 공공그라운드

[아르코예술극장]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8길7 (동숭동) 
- 이용시간 : 화요일-일요일 10:00~19: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이용자격 : 자격 제한 없음. 유료
- 홈페이지 : http://www.koreapac.kr/Pages/SpaceInfo/Space_01.aspx
- 전화 :  02-3668-0007
- 운영기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한국 대학도서관의 뿌리에 해당하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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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