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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표지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표지
ⓒ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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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이란 두려운 존재다

장호철 선생의 필생 역작으로 430쪽에 이르는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의 책장을 넘기면서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말이 떠나지 않았다.

그 하나는 논어에 나오는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들이란 두려운 존재이니, 장차 그들이 선배들보다 큰 인물이 될 수 있기에 가히 두렵다)라는 말이요, 또 다른 한 말은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 한 구절인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인간세상 글 아는 자 되기 정말 어렵다)이라는 구절이었다.

내가 장호철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이다. 그 무렵 장 선생은 경북 안동의 교단에 서있었는데 그새 구미고등학교의 교단을 지키다가 아예 구미에 뿌리를 내렸다.

장 선생님을 비롯한 구미의 후배들은 낡은 껍질을 깨트리는 의식 혁명을 주도한 바, 유신의 잔재 철옹성도 마침내 허물어졌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에서 경북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출신 장세용 시장을 배출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충절의 고장이었던 경북 구미는 5·16 쿠데타 이후 벚꽃이 만발한 친일의 본고장으로 잘못 비쳐왔다.

최근에는 구미 출신 독립운동가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현창사업과 남한 출신으로 유일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許亨植) 장군 서훈과 기미상 건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이로서 그 고마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기미독립선언서 전문
 기미독립선언서 전문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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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과 이광수의 친일부역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도록 마음이 무거웠고, 아팠으며, 장탄식을 여러 번 토했다.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 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명문장으로 최남선이 썼다. 일본인조차도 그 문장에 감탄했다는 문호 육당 최남선이 말년에 이르러 일본의 만주국 건설에 대하여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며 "동방의 맹주요, 신세계의 지도자인 일본제국의 용기와 총명과 정의"로 이루어졌다고 찬양하는 대목(-이 책 243쪽)에서는 그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아 아,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

- '모든 것을 바치리' 매일신보 1945. 1. 8 (-이 책 34쪽)

춘원 이광수가 여기서 말한 임금은 일왕으로, 그는 일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자고 웅변하고 있다. 이광수는 1919년 1월에 '조선청년독립선언서(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단에 가입하고, 그해 7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8월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었다. 그런 그가 변절하여 창씨 개명에 앞장서고 모국어인 조선어마저 버리고 일본어를 '국어'로 맞아들임으로써 마침내 황국신민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변절함은 작가로서 자기부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책29쪽)

저자는 이 책에서 이광수, 최남선 외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억, 김종환,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서정주, 유진오, 이무영, 이원수, 정비석, 주요한, 채만식, 최정희, 이인직, 윤해영, 장덕조, 유치진, 최재서, 백철, 이석훈, 김용제, 정인택 등 27인과 나머지 문인들로 곽종원,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영일, 방인근, 오용순, 윤두헌,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혁주, 정인섭,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등 16인의 친일문인의 민낯을 보여준다.

친일은 독재권력 옹호, 민주화운동 반대, 평화통일 반대로

문학평론가이며 민족문제연구소장인 임헌영 선생은 추천사 "친일문학을 아직도 따져야 하는 이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일문학 예술은 단순하게 학도병에 지원하라는 식의 구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발성으로 끌어내는 확고한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갖췄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소멸되지 않기에 계속하여 이식·번식하고 증가한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친일 행위 그 자체만 문제가 아니라 사상적인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게 박혀 그 씨앗이 퍼뜨려지기 때문이다.

친일파 옹호란, 사상사적으로 민주주의 비효율성을 강조하고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며 나아가 부추기기도 하는 극우파적인 이데올로기다. 인종 편견, 신앙 편견, 약소국 억누르기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 침략을 감행해도 좋다는 파시즘적 가치관을 고수한다.

친일파가 '친미파 , 독재권력 옹호, 민주화운동 반대, 평화통일 반대, 개혁과 개방 반대, 노동자 · 농민 등의 관점이 아닌 재벌과 상류층 이익 옹호, 사회복지보다 성장 일변도의 신화 옹호, 해외 파병지지, 박근혜식 국정교과서 지지, 이명박 · 박근혜 등 지지, 태극기부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따라서 촛불혁명과 친일문학은 너무나 궁합이 안 맞고, 남북 민족화해와 평화의 시대와도 걸맞지 않다. (-이 책 9쪽)

 
고향의 후배들이 왕산 허위 선생 순국 110주년 추모제를 묘소에서 가진 뒤 '친일파 청산'을 외치고 있다(2018. 10. 21.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장호철 선생).
 고향의 후배들이 왕산 허위 선생 순국 110주년 추모제를 묘소에서 가진 뒤 "친일파 청산"을 외치고 있다(2018. 10. 21.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장호철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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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장호철 선생은 머릿말 "'문학'을 가르치면서 느낀 갈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 수업시간에 개화기 전후의 우리 현대 문학사를 설명하려면, 개화기와 현대 문학을 여는 첫 작품을 쓴 친일부역 문인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때 태어났다는 것, 그때 살았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친일'은 우리 민족사의 오욕이요, 현실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 35년이 현실이듯, 친일부역의 길을 갔던 이들에 대하여 역사적 단죄가 비켜간 것도 우리 역사 일부다.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몸을 던진 민족시인의 삶과 친일문인들의 삶이 마치 별개의 경로로 전개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이들의 삶과 문학은 동시대에 엇갈리고 있었다. 지난 시대의 역사지만 우리가 친일부역의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 책 16~21쪽 축약)


나는 밤을 새다시피 이 책 책장을 끝까지 넘기면서 매천의 시구 "인간세상 글 아는 자 되기 정말 어렵다"를 되뇌였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이후 모처럼 만난 역저, 이것이 이 책에 대한 내 소감이다.

이 책이 널리 많이 읽혀져서 미세먼지같은 친일의 자욱한 그림자들이 이 땅에서 말끔히 거둬지기를 기원한다.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장호철 지음, 인문서원(2019)


태그:# <부역자, 친일문학인의 민낯>, #장호철, #부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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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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