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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었다'는 뜻으로 세상이 몰라보게 변했을 때 흔히 인용하는 사자성어다. 그런데 전북 군산(群山)에는 '벽해상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 몇 년 사이에 상가가 밀집된 시가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거룻배가 오가던 금강 지류는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4차선 도로가 됐다. 지금의 대학로다. - 기자 말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했다. 개항과 함께 조계장정에 의해 각국 거류지가 조성되고 일본 영사관이 들어선다. 일본 영사관은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고 업무를 처리했고, 일본인들은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주인 노릇을 했다. 그 중심에는 영사관이 있었다. 일제는 수덕산에 있던 군산진(群山鎭)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군산을 지배했다.
 
군산 개항 10주년 기념엽서 사진
 군산 개항 10주년 기념엽서 사진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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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경술국치 1년 전(1909) 군산 천엽상점(千葉商店)에서 발행한 홍보용 우편엽서 사진이다. 이 엽서 사진은 개항 당시와 10년 후 군산(금동, 영화동, 장미동 일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왜놈들이 들어오기 전 군산은 거의가 뻘탕(갯벌)이었고 갈대밭이었다'는 옛 노인들 말이 뜬소문이 아니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엽서 오른쪽 고무인에 '명치 42년(1909) 5월 1일'이 찍혀있는 것으로 미뤄 보아 일제가 자신들의 치적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다양한 그림과 사진이 들어간 엽서를 제작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같은 이데올로기 선전에 이용했다.

120년 전 군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엽서 속 첫 번째 사진은 고즈넉한 어촌과 갯벌, 샛강, 거룻배 등이 보이는 개항 당시(1899) 모습이고, 두 번째 사진은 시가지가 조성된 10년 후 모습이어서 대조를 이룬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지금의 동령길(빈해원) 부근으로 추정된다. 아담한 두 개 봉우리로 이뤄진 수덕산 위치와 좌우로 나란히 뻗은 전주통(구영길), 본정통(해망로)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사진의 특징은 금동·영화동·장미동 일대가 고즈넉한 어촌과 갯벌이었던 시절을 조망할 수 있고, 구 시청 옆으로 흐르던 샛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물길은 진즉 복개됐고, 도로 밑에는 열두세 살짜리 아이들이 뛰어다닐 정도로 큰 하수관이 묻혀 있다. 대부분 집이 초가지붕이고 일본식 가옥이 가끔 눈에 띈다. 이는 개항 전부터 일본인이 다수 거주했다는 실증이기도 하다.
 
개항 10년 후 군산 시가지
 개항 10년 후 군산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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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10년 후 사진에서 왼쪽 도로는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가장 번화했던 전주통이다. 도로 양편에 즐비한 일본식 건축양식의 상가들은 건물주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측 도로는 본정 1정목으로 나가사키18은행, 조선은행, 미두장(미곡취인소), 미곡창고 등 대형 건물이 들어서기 전이어서 거리가 한산하게 느껴진다.

전주통과 본정통은 '군산의 심장부'로 땅값도 가장 비쌌다. 수덕산 해안 쪽 봉우리 아래에 자리한 군산세관이 고풍스러운 지붕 모습을 살짝 드러내고 있다. 선박 입출항을 감시하는 망루와 물품 창고도 보인다. 군산세관 본관(1908년 신축)은 국내 유일의 개항장 건물로 그동안 지방문화재였으나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제545호로 지정됐다.

사통팔달의 세관 앞 도로는 본정통 출발점이었다. 본정 1정목에는 조선은행 군산지점(1922년 완공)을 비롯해 나가사키18은행 군산지점(1907) 등 다양한 금융기관과 미곡검사소(1907)가 자리했고, 부근에 우체국(1901), 경찰서(1901), 이사청(훗날 부청: 1906), 일본인 거류민회(1899), 미곡취인소(1920) 등이 들어앉아 '관공서 거리'로 불렸다.

엽서를 발행한 1909년 당시 군산 모습은 제3차 축항공사 기간(1926~1933) 동안 몰라보게 바뀐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데, 구 조선은행 근처까지 닿았던 물줄기가 샛강과 함께 매립되고, 토석 채취 작업으로 수덕산 해안 쪽 봉우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부잔교 3기와 상옥창고 3동을 지으면서 부두가 바다 쪽으로 100m 이상 확장된 것도 놀라운 변화이다.

시민의 혼이 깃든 수덕산(水德山)

 
수덕산 중심의 군산 전경(1901년 촬영)
 수덕산 중심의 군산 전경(1901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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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01년에 찍은 사진으로 군산진성(사진의 중앙, 수덕산 내륙 쪽 봉우리) 모습이다. 천리를 흘러온 금강이 서해와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굽이치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조선 시대 군산진(한옥)과 개항 후 경무서(경찰서), 우편사(우체국), 해관(세관) 등도 아슴하게 보인다. 일제는 군산이 개항하자 군산진을 가로채 그곳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조선 시대 군산 지역은 군산진성을 비롯해 임피읍성, 옥구읍성, 오성산성, 창안토성, 박지산성, 남산산성 등 10개가 넘는 읍성과 산성이 해안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봉수대 흔적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처럼 군산은 고려 시대 이전부터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였던 것. 군산진성은 '노인성'으로도 불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진은 세종 8년(1426) 설치된다. 군산진은 지금의 영화동 부근에 진성(鎭城)을 갖춘 병영으로 해상 방어업무와 군산창 관리를 겸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군산진에는 전함 8척(중선 4척, 별선 4척)과 수군 461명이 상주했다. 기록에 나타나듯 조선 시대 군산은 조운선과 군부대가 주둔하는 수군 기지였다.

군산진성은 수덕산의 자연 지세를 이용한 삭토법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군산에서 유일하게 해자(성 주위에 수로를 파서 만든 방어시설)를 갖춘 산성으로 알려진다. 군산진에는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창을 비롯해 조세 업무를 담당하는 봉세청, 조군을 관할하는 조복청 등 군사적 경제적 임무를 수행하는 다양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덕산(60m 남짓)은 월명공원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었다. 조선 시대 수군진이 설치되고, 개항 후 행정 업무가 처음 시작된 역사의 현장으로 시민의 혼이 깃든 산이기도 하다. 정상에 제1정수장(배수지)이 있었고, 바다를 지키다가 순직한 수군과 조군들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제를 지내던 곳이어서 수륙산(水陸山)으로도 불리었다.

일제는 수덕산 북쪽 바닷가에 등대감시소를 설치했다. 부청과 등대감시소 사이에는 오포(午包)라고 하는 대포가 놓여있어 정오에 포를 쏘아 시각을 알려 줬다고 한다. 오포는 외형상 시간을 알리는 기구였지만, 속내는 피지배 민족에게 지배자의 힘을 과시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고도의 심리적 지배 수단이었다. 오포는 1930년대에 사이렌으로 대체된다.

군산은 일제 식민지 역사와 전통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다. 따라서 일제식민지 생채기도 원도심권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구 세관을 비롯해 나가사키18은행, 구 조선은행, 히로쓰가옥, 동국사 등이 대표적이다. 기억하기 싫은 흔적들. 그러나 군산은 이러한 콤플렉스를 역사체험과 문화관광의 대표 콘텐츠로 변모시켰다.

태그:#군산 개항 , #일제강점기, #생채기, #수덕산, #군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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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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