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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풍경을 지나 한 병실문 앞에 섰다. 엄마의 이름표가 문 옆에 꽂혀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을 지나 한 병실문 앞에 섰다. 엄마의 이름표가 문 옆에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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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어느 날 오후. 봄이지만 하늘은 흐렸고, 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병원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병동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항암 집중 치료실이라 다소 분위기가 무거울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활기찼다. 이름도 외우지 못할 수많은 항생제를 투약받은 몇몇 환자들은 부기를 빼기 위해 분주하게 복도를 오가며 운동 중이었다.

이색적인 풍경을 지나 한 병실 문 앞에 섰다. 엄마의 이름표가 문 옆에 꽂혀 있었다. 문을 열자 엄마가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엄마는 고양이 다섯 마리가 십자수로 촘촘히 박음질 된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암 투병 중인 엄마는 올 2월부터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머리가 많이 빠져 두건을 쓰기 시작한 엄마는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말하고 또 말했다. "네 결혼식 때는 가발 쓸 거야." 딸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는 암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아픈 몸으로 버진로드를 걸어 들어가 화촉을 밝혀야 한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끝낸 그 날도 엄마는 가발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번엔 무언가 단단히 작심한 듯 보였다. 

"진아, 서면에 가발 사러 가자. 엄마 가발 꼭 사야 한다. 미용실 원장님이 거기는 인모도 자연스럽게 잘 한다고 하더라. 원장님이 특별히 가발에 드라이도 넣어주신다고 하셨다. 싼 거 안 하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거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엄마는 그날 나와 함께 가발을 사러 가길 원했다. 나는 "걱정 안 한다. 뭐든 다 잘 어울릴 거야"라고 말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주사 투약이 끝난 터였다. 병원에서는 약의 성분이 몸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외출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간호사 선생님. 나, 우리 딸 결혼식 때 쓸 가발 사야 해요. 우리 딸이 오늘 아니면 다시 부산 오기도 힘들어요. 딸이 이쁘다는 걸로 꼭 사고 싶은데, 시간이 지금밖에 안 되니까..."

말 끝을 흐리는 엄마의 어투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타지에서 일하는 내가 모처럼 부산에 왔을 때 함께 가발을 사러 가야 한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강력한 설득 끝에 마침내 병원에서 외출허가증을 받아냈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부산 지하철을 탔다. 엄마는 교통약자석의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얼른 달려가 털썩 앉으시더니,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셨다. 나는 말 없이 엄마의 손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잠시 후 열차가 서면역에 도착했다. 번잡한 서면역 지하상가를 빠져나와 엄마가 추천받은 가게를 찾아갔다. 엄마는 휴대폰에 저장된 2년 전 언니 결혼식 사진을 가게 점원에게 보여주며 '이와 같은 스타일의 가발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을 유심하게 바라보던 직원은 창고 안으로 들어가 엄마의 요구대로 몇 개의 가발을 찾아왔다.

가발을 착용해보기 전, 엄마는 내게 잠시 밖에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아마 그건 엄마의 자존심이었으리라. 나는 입구 바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심히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척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엄마가 가발 쓴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다. 그때 현관문 유리에 반사된 엄마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두건을 벗은 엄마. 순간 내 머릿속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상상하는 것조차 감당이 안 됐던 그 모습을 현실로 마주하자, 두 눈을 부여잡을 틈도 없이 눈가 주변으로 뜨거운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투병 중인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발끝이 저리도록 애틋함에 사로잡히곤 했던 나는 가발을 써보며 활짝 웃는 엄마가 너무도 애잔해보였다. 그리고 고맙고, 죄송스러웠다.

잠시 후 나는 눈물을 훔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가발을 쓴 엄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걸어 나왔다.

"이거 괜찮지? 이걸로 하는 게 낫겠다."

엄마는 거울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가발을 살펴봤다. 

"뭐든 다 잘 어울리지. 진짜 같아. 너무 자연스럽다."

평소 나의 아부를 낯간지러워 하는 엄마는 오늘따라 한 번 더 '그러냐'는 눈짓을 지으며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진 엄마는 나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말하고 또 말했다. "네 결혼식 때 가발 쓸 거야." 엄마는 아픈 몸으로 버진로드를 걸어들어가 화촉을 밝혀야 한다. (사진은 양희은 <엄마가 딸에게> 뮤직비디오 스틸컷)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진 엄마는 나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말하고 또 말했다. "네 결혼식 때 가발 쓸 거야." 엄마는 아픈 몸으로 버진로드를 걸어들어가 화촉을 밝혀야 한다. (사진은 양희은 <엄마가 딸에게> 뮤직비디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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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일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 메스꺼운 속을 따끈한 국물로 달래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에 따라 지하철 역 근처 우동가게에 들어갔다. 따뜻하게 데워진 그릇에 주문한 우동이 담겨 나왔다.

엄마는 "오늘 같이 와줘서 고맙다"며 본인 그릇에 담긴 우동 면발을 젓가락으로 잔뜩 집어 내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두건을 고쳐 쓰며 안정감 있게 머리를 가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두건에 새겨진 고양이들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뜨거운 국물을 한 입 들이킨 후 창밖을 바라보니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할로겐 조명이 비추는 따뜻한 음식들과 식당 내부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통기타 소리의 선율이 우리 모녀의 미소에 살며시 스며들고 있었다.

태그:#엄마, #가발, #애잔함,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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