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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획이 하루 만에 틀어진 적이 있다.

2007년 스물 셋의 나는 배낭 하나 메고 홀로 인도로 떠났다. 14kg에 달하는 배낭 속에는 옷과 치약, 칫솔 외에도 '60일짜리 여행 계획서'가 들어 있었다. 떠나는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의 경로와 숙소, 기차 이름과 번호, 일별 예산까지 모두 들어있는 계획서. 내 여행의 처음이자 끝이었던 그 문서는 분량만 해도 A4 용지 24장에 달했다.

하지만 그 한 뭉치의 종이 덩어리는 인도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폐기됐다. 섭씨 46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나는 첫날부터 일사병 증세를 보여서 50도가 넘는다는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로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오래 준비한 계획은 그렇게 무위로 돌아갔다.

김영하 "대부분의 여행기는 이런저런 실패담"
 
 산문 <여행의 이유>를 펴낸 소설가 김영하
 산문 <여행의 이유>를 펴낸 소설가 김영하
ⓒ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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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p.18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펴냄)는 여행기를 '작가의 여행 실패담'이라 말한다. 책 자체도 본인의 '여행 실패기'로 시작한다. 비자 없이 중국으로 떠났다가 공항에서 추방 당한다는, 모두가 한번쯤 상상해봤을 최악의 시나리오.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중국행이 무산된 그는 집으로 돌아와 '한 달간의 내 방 여행'을 떠났고, 소설은 상하이 대신 서울에서 탄생한다. 여행의 시작은 삐끗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소설을 쓰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며 끝맺은 셈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여행 얘기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행의 좌절이 곧 나의 패배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뜻하지 않았던 좌절을 겪으며 새로운 기회를 얻기도 하니까. 김영하에게 여행의 이유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출간 첫 주 만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그의 책은 여행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스물 다섯에 떠난 유럽 배낭여행부터 '여행 아닌 여행'이었던 뉴욕생활기까지...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는 작가의 표현대로 떠남과 머무름의 이야기가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있다. tvN <알쓸신잡>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인문학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책 곳곳에 녹아있다.
 
내가 다녀온 곳은 그 도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중략)...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금강산 유람을 떠난 조선시대의 양반이 높은 봉우리는 하인을 시켜 다녀오게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에는 힘든 여행은 아랫사람을 시키고 지체가 높은 이들은 유람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험은 삼가왔다. 21세기의 우리는 남을 시켜 좋은 구경을 하고 오게 하고 나중에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유럽의 귀족이나 조선의 양반을 비웃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 <여행의 이유> p.111

모든 여행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여행의 이유>
  
 <여행의 이유> 겉표지
 <여행의 이유> 겉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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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그가 겪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이 수많은 작품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별책부록처럼 느껴질 듯하다.

하지만, 가장 와닿았던 건 책 여기저기에서 묻어나는 여행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 <여행의 이유> p.66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 <여행의 이유> p. 80

소설을 읽다보면 평소 내가 느꼈지만 정의할 수 없었던 감정을 작가의 문장으로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오면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고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그런 기분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기억 깊은 곳에서 딸려 올라왔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모든 여행의 순간들이 기억 깊은 곳에서 딸려 올라왔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꿈을 포기하고 떠나야 했던 인도 여행에서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줬던 사람들. 아픈 손발을 스스럼없이 주물러주고 먼 길을 걸어 따뜻한 차를 사오고, 머리 수건을 바꿔주며 간호해줬던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인연들이 떠올랐다. 아프지 말라고 얼른 일어나라고 내 등을 두드려줬던 따뜻한 손길들이 생각났다. 결국 작가의 말을 읽다가 눈물이 났다.  
 
 인도 기차 슬리퍼칸에 앉아 생각에 잠긴 인도인의 모습.
 인도 기차 슬리퍼칸에 앉아 생각에 잠긴 인도인의 모습.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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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여행 이야기가 궁금해 펼친 책이었지만, 책은 결국 내 여행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책 안에 든 건 여행자 김영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자 모두의 이야기였다. 어느 구절이든 당신이 걸었던 길 위에서의 이야기와 만났던 얼굴들이 떠오를 것이다. 10년도 더 지난 여행에서 마주했던 얼굴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여행의 이유> p.148
그래도 특별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바로 긴 여행길에서 나를 참아준 동행들이다...(중략)...이들이 없었더라면 여행은 그저 지루한 고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지구에서의 남은 여정이 모두 의미 있고 복되기를 기원해본다. - <여행의 이유> p.214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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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