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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주말, 실로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러 가기로 했다. 얼마 전 새로 가입한 인터넷 카페의 행사인 봄 소풍에 따라가기로 결심한 것.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였다. 초대의 글엔 "봄꽃 향기에 한껏 취해도 보고, 그 꽃그늘 아래에서 아름다움 시도 함께 읊어보자"라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목적지는 최근 새로 단장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곳. 일생에 꼭 한번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회비까지 착했다. 단돈 3만 원. 관광버스를 대절하고 하루 세 끼도 다 준다고 했다.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나들이 당일 아침, 이른 시각이었지만 45인승 버스가 벌써 꽉 찼다. 얼핏 보기에도 참가자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학생처럼 보이는 회원부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까지 연령대도 폭이 넓었다. 기존 회원들은 낯이 익은지 꽤 친숙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수다를 이어갔다. 나를 비롯해 오늘이 첫 모임인 신입 회원들은 딱 봐도 티가 났다. 멀뚱하게 창밖을 보거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틀림없었다.

동호회 전세버스 안, '협찬'의 등장

오전 7시 30분. 약속한 시각이 되자 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출발했다. 시간약속을 이렇게 칼같이 지키는 모임은 생전 처음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간사라는 분이 나와 인사말과 함께 오늘의 일정을 안내해준다. 오전에 '버스를 협찬해 준' 업체에 들러 구경 좀 하다가 점심을 먹는다. 다음엔 '식사 일체를 제공해 준' 또 다른 업체에 잠깐 들렀다가 최종 목적지로 간다고 했다. 아, 스폰서가 있었구나. 그래서 회비가 그렇게 쌌구나. 이해가 됐다.

다음엔 회장님이 나오셨다. 점잖아 보이는 분이었다. 목소리도 중후하니 듣기 좋았다. 당신은 과거 유명한 시인과 동문수학했다며 은근 자기 자랑부터 하셨다.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기원한다며 긴 인사말을 마치셨다.

그렇게 공식 세리머니가 끝나자 앞자리에 앉았던 여성 회원들이 부지런히 무언가를 날랐다. 잡곡밥과 김치 나물 두어 가지를 얹은 접시였다. 그게 아침밥이었다. 제법 맛있었다. 밥을 다 먹으니 이번엔 물과 음료수, 그리고 사탕이며 건어물을 담은 간식 주머니까지 주셨다. 삼 만원짜리 투어치고는 과분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회원들은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고등학생부터 주부, 회사원, 학교 선생님 등 직업도, 연령대도, 사는 곳도 각양각색이었다.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라 그런지 모두 선하고 순수해 보였다. 말투도 차분했고 쓰는 어휘도 고상했다.

그중에는 등단한 현역 시인도 여럿이었다. 시를 지나치게 사랑하시는 몇몇 분들은 성급하게 자기소개 끝에 애송시 한 편을 즉석에서 암송해 주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이런 분들과 함께 오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러는 와중에 버스는 쉼 없이 달렸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버스는 첫 번째 경유지에 도착했다.

산 중턱을 깎아 세운 엄청나게 큰 공장이었다. 공장 규모에 어울리게 커다란 간판에는 '㈜코리아헬스(가명)'라고 적혀 있었다. 건강보조식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에는 참으로 진귀하게 생긴 각종 인삼들을 전시해 두었다. 어떤 건 하도 희한하게 생겨 마치 사람이 일부러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유리창이 나왔고, 그 너머로 작업장이 들여다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작업장 안에 각종 기계와 설비들은 있는데 인적은 없었다. 불도 꺼져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약 달이는 기계 따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슬슬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상무님으로도 안 되자... 회장님이 등장했다
 
 그는 곧바로 자사 제품의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인삼을 비롯한 진귀한 한약재 10여 가지를 섞어 만든, 옛날 궁중비방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거라 했다.
 그는 곧바로 자사 제품의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인삼을 비롯한 진귀한 한약재 10여 가지를 섞어 만든, 옛날 궁중비방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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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십 명쯤 앉을 수 있는 강의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상무님이라 소개받은 한 남성이 들어왔다. 공장 점퍼에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다부진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곧바로 자사 제품의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인삼을 비롯한 진귀한 한약재 10여 가지를 섞어 만든, 옛날 궁중비방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거라 했다. 그걸 진한 농축액 형태로 만들고 먹기 쉽게 일회용 파우치로 개별포장한 제품이었다. 원래 가격은 100포가 든 한 상자에 78만 원이지만 공장에서 직거래하는 만큼 48만 원에 모시겠다고 했다.

한바탕 소개가 끝나자 시식회가 열렸다. 상무님은 한 포씩 뜯어 참가자 모두에게 나눠줬다. 너무 진하니 엄지와 검지로 꼭꼭 눌러 짜가며 먹으라고 했다. 그는 시식제품을 나눠주던 보조 진행자에게 참가자 중 어느 한 분을 지목하며 "저 분은 두 포 드려라. 건강이 참 안 좋아 보이신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개별 판매에 들어갔다. 갑자기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판매원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맨투맨으로 신청서를 들이밀었다. 주로 나이 지긋한 분들이 타깃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 보여 두 포를 드신 참가자 두 분이 제일 먼저 한 박스씩 샀다.

그렇게 얼추 대여섯 상자쯤 산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지 싶었는데 그 상무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연단에 올랐다. "아, 제가 설명을 잘 못했나 보다"라고 자책부터 했다. 그래서 사죄의 의미로 기존 제품 한 박스를 사면 유리 용기에 담긴 제품 5병을 더 얹어 주겠다고 했다. 매우 굳은 표정이었다.

두어 사람이 더 샀다. 상무님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마침 회장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들렀다. 여러분께 선물을 드리겠다고 하신다'라고 했다. 꽤 연로해 보이는 신사분이 등장했다.

그는 대뜸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재벌 회장의 이름을 댔다. 아끼는 후배라 했다. 또 오래도록 몸져누워 있는 또 다른 재벌 회장 이름을 거명했다. 오랜 친구라 했다. 그러면서 '돈이 그리 많으면 무슨 소용이냐. 하나는 비명에 죽었고 하나는 몇 년째 식물인간인 걸.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며 오늘 우리를 만난 기념으로 100포짜리 한 박스에 유리용기 5병과 개별포장 50포를 더 얹어 주겠다고 했다. 베팅하는 포커 플레이어 같았다.

그 말에 혹했는지 서너 분이 더 샀다. 그렇게 우리는 사십여 분 가까이 붙잡혀 있었다. 참 집요한 사람들이었다. 절반 넘는 회원들이 제품을 사고 나서야 그들은 우리를 놔 줬다.

버스 안은 난리가 났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데 다녔느냐"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회장님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결론은 이거였다. '나도 이럴 줄 몰랐다. 하지만 싸게 여행 온 것이고 이 또한 세상살이니 그 성의를 생각해 들어나 주자'고 했다.

마음씨 착하고 순수하기 짝이 없는 회원들은 금방 화가 풀렸다. 여기저기서 "까짓것 갈 데까지 가 보죠", "생각해보니 재밌네요"라고 했다. 나는 그러는 그네들이 더 재미있었다. 속으로 혼자 웃었다.

여행 온 건지, 사러 온 건지

점심시간이었다. 역시 어마어마하게 큰 식당이었다. 우리처럼 반강제 쇼핑투어에 나선 관광객들의 전용 식당이었다. 메뉴는 버섯전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등장한 건 그냥 당면전골이었다. 팽이버섯 조금에 소고기 한줌, 그리고 대파 약간에 당면이 한 가득이었다. 면발도 무척 굵었다.

식사시간은 단 15분. 한두 사람이 일어나면 어느새 직원들이 다가와 그릇을 치운다. 빨리 먹고 자리 비워달라는 시위였다. 신병 훈련소를 방불케 했다.

전쟁 치르듯 점심을 먹고 나서는 부지런히 두 번째 방문지로 갔다. 역시 무지하게 큰 공장이었다. 여기도 오래전에 문 닫은 게 분명했다. 곳곳에 유리창이며 시설물들이 깨진 채 방치돼 있었다. 전시장과 강의실 쪽 외엔 인적도 없었다.

강의실에 들어섰다. 이번엔 전무님이었다. 희한하게 아까의 상무님과 지금의 전무님은 같은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방문한 그 지역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곳의 핵심 아이템은 돌 매트였다. 돌도 그냥 돌이 아니라 그 귀하다는 운석이라고 했다. 운석이면 우주에서 날아든 돌이다. 상무님은 커다란 운석의 원석을 보여주었다. 과연 신비로운 자태였다.

전무님은 전자파의 유해성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살인 무기라고 했다. 그래서 기존의 전자담요를 쓰면 '피가 마른다'는 말이 생겼다는 거였다.

하지만 자기네 회사가 원재료로 쓰는 귀사문석은 전자파를 철저히 막아준다고 했다. 전자파 측정기를 대 보니 다른 회사 제품엔 바늘이 요동치는데 그 회사 매트에서는 꿈쩍도 안 했다. 앉은 사람들은 "오~" 하며 감탄했다. 예상치 못한 호응에 전무님이 탄력 받은 것 같았다.

전무님은 좌중을 향해 "돌 매트 쓰시는 분 있냐"고 물었다. 어느 여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느 회사 제품이냐 물었다. 그녀는 N사 제품이라 대답했다. 얼마 주었냐고 물었다. 380만 원 줬다고 했다.

전무님은 아이쿠 싸게 잘 사셨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그 절반도 안 되는 150만 원에 모시겠다고 했다. 2인용이 그랬고, 1인용은 70만 원, 그냥 깔고 앉아 찜질하는 작은 매트는 30만 원이라고 했다. 아까 대답한 그분이 '정말 싸네'라며 혼잣말처럼 했다. 사전에 맞춰보기라도 한 것처럼 둘은 죽이 척척 맞았다. 그 덕인지 대여섯 분이 샀다.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는지 전무님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팔찌였다. 오늘 구입하시는 분에게는 운석조각으로 만든 팔찌를 특별 사은품으로 주겠다고 했다. 시중가가 12만 원짜리라고 했다. 너덧 분이 더 샀다.

전무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에게만 특별히 무이자 12개월 파격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서너 분이 더 샀다. 그렇게 몇 차례 파격적인 프로모션이 이어지고 우리 회원의 절반 가까이가 구매하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마치 굴속에 갇혀 있다 나온 것처럼 햇살이 눈부셨다. 묵은 숙제를 다 한 것 같은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이제 드디어 그 '핫하다'는 관광지에 갈 일만 남았다.

나는 왜 그 매트를 사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작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는 '하나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쉬움 비스름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는 "하나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쉬움 비스름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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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신이 났어야 할 그 다음 코스부터는 아무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재미는커녕 탁 하고 맥이 풀렸다. 다리 힘도 쑥 빠졌다. 어깨도 축 처졌다. 몇백 억 원을 들여 조성했다는 관광단지도 그저 그래 보였다. 이런 걸 보러 내가 여기까지 그 고생해가며 왔나 싶었다.

저녁 특식으로 나온 불고기도 그냥 간장에 설탕 푼 맛이었다. 이걸 먹으려고 그 험난한 고지들을 넘어 왔나 서글퍼졌다. 회원들이 온 정성을 다해 낭송하는 시도 무슨 곡소리처럼 들렸다. 한없이 처연하기만 했다.

두 군데 공장 쇼핑을 다녀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애초부터 절대 사지 않겠다고 수십, 수백 번 다짐하며 들어간 덕이었다. 평소에 어깨가 아픈지라 찜질용 돌 매트에 살짝 관심이 갔지만 굳세게 참았다.

그런데 정작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는 '하나 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쉬움 비스름한 심정이었다. 뜨끈뜨끈했던 돌 매트의 온기가 아직 엉덩이에 남은 것도 같았다. 건강식품은 작은 거 한 세트만 사서 지난해에 수술하신 엄마에게 드릴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궁중명약에 진짜 진귀한 약재들이 들어 있는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냄새만 그럴싸한 싸구려 한약재에 설탕물을 넣어 만들었다 하더라도 한 세트 샀어야 했다.

전자파를 막아준다는 기적의 돌이 어디 들어가 박힌 건지, 왜 그 귀한 돌을 하필이면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둘러쌌는지는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게 그냥 흔한 자갈이고, 전자파 테스트기가 실은 전무님의 영험한 손길에 의해 바늘이 움찔거렸다 하더라도 작은 거 하나는 샀어야 했다. 무슨 영화 보겠다고 그걸 그렇게 뿌리쳤는지, 물건 하나 사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인지 스스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거기서 일하는 모든 분들께도 죄송하기 그지없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목이 잠기도록 제품 설명을 하는 간부님들은 물론이려니와 분주하게 관객들 사이를 누비며 구매를 권하는 판매사원들이 수십 명이었다. 누구 말대로 그건 그들의 직업이고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존중해 주어야 마땅했다. 그 정성을 생각하면 하나쯤은 사주는 게 예의였다.

그런데 나는 속으로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의 영업에 마음이 움직여 돈을 쓰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이고 혼나도 싼 경거망동이었다. 다시 버스를 돌리고도 싶었다.

후유증이 길게 남을 것 같은,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참 특별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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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