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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를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알마티 릭소스 호텔에서 열린 동포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왼쪽은 금일 유해봉환되는 계봉우 지사 손녀이자 독립유공자 후손회 부회장인 계이리나 씨.
 중앙아시아를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알마티 릭소스 호텔에서 열린 동포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왼쪽은 금일 유해봉환되는 계봉우 지사 손녀이자 독립유공자 후손회 부회장인 계이리나 씨.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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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를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모델(카자흐 모델)'을 언급하면서 이 방식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모델은 비핵화 이후가 아니라, '비핵화'와 동시에 '보상 및 경제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21일 오후(현지 시각) 카자흐스탄 옛 수도인 알마티에 도착한 직후의 동포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은 "모범적인 비핵화 국가이기도 한 카자흐스탄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을 '모범적인 비핵화 국가'로 지칭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물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과도 만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생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소비에트연방(구소련) 시절 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의장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뒤, 1991년 12월 독립한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28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는 1990년 4월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했지만, 독립 이후부터 계산하면 28년간 수행한 셈이 된다. 그가 퇴임한 것은 지난 3월이다. 

문 대통령이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만나는 것은 그의 정치적 비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비핵화에 관한 경험담을 듣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포 간담회에서 카자흐 모델을 언급한 데 이어, 전직 대통령의 경험담을 듣는다는 것은 이 모델을 북한 비핵화 방식 중 하나로 부각할 의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 비핵화보다 진일보한 넌-루가 프로그램  

카자흐 모델은 1991년에 미국 상원의원들인 샘 넌과 리처드 루가가 공동 발의한 이른바 '넌-루가 법'에 기초한 것이다. 카자흐뿐 아니라,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벨라루스(백러시아)'와 터키 북쪽의 '우크라이나'에도 적용된 방식으로 '넌-루가 프로그램'으로도 불린다.

카자흐스탄·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 적용된 이 모델은 지난 2018년 6월 제1차 북미정상회담 직전에 한·미 양국 간에도 거론된 적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상당한 관심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2002년 시작된 제2차 북·미 핵위기 중에도 미국 측에 의해 거론된 일이 있다. 2004년 7월 15일 애슈턴 카터(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예방 방어 프로젝트 책임자)가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이 모델을 조심스레 추천한 적이 있다.

애슈턴 카터는 그 뒤 오바마 행정부 때 국방장관을 지냈다. 2004년 청문회에서 그는 '넌-루가 방식이 북한에 적용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북한 핵을 해체하는 합리적 당근이 될 수도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관련 링크).

카자흐 모델은 핵 폐기와 동시에 보상 및 경제 지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선(先) 비핵화'에 비해 진일보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문 대통령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도 이 모델을 의중에 두고 있다면, 미국이 종전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설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표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델이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소비에트 출신 국가들의 특수한 사정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나라들과 북한 사이에 중대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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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출신 국가들과 북한, 무엇이 다른가

1991년 12월 구소련 해체 당시, 이 나라들은 핵보유를 이미 완성한 국가들이었다. 1969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의해 핵을 합법적으로 보유하게 된 구소련의 핵무기를 나눠 가진 나라들이었다. 북한처럼 핵개발 과정에서부터 미국과 충돌한 나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는 이란이나 리비아를 상대하듯이 이 나라들을 함부로 상대할 수 없었다. 이 나라들의 핵 보유가 이미 공인된 것이었기 때문에, 무리한 요구 조건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선 비핵화'를 요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카자흐스탄·벨라루스·우크라이나가 북한과 달랐다는 점은, 이 나라들의 비핵화를 추동하는 핵심 당사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핵심 당사자는 미국이다. 일본도 북한 비핵화를 원하고 중국도 내심 바라지만, 일본이나 중국은 미국처럼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이 미국과의 일대일 구도를 선호하는 것도,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핵심 당사자가 될 자격이나 역량 혹은 이해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카자흐스탄·벨라루스·우크라이나의 경우는 달랐다. 이 나라들의 비핵화에 관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사활적 이해관계를 가졌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 비핵화 협상에 관한 아래 논문에서도 표출된다. 채규철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의 '핵문제의 해법: 기존 모델과 북한의 사례 비교'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함께 1994년 1월 리스본 의정서를 체결하여 경제적 보상 등을 제공하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NPT 가입과 핵시설·무기의 폐기 및 러시아 이관에 합의했다. 이후 핵 카드의 활용 가능성을 의식한 우크라이나가 추가 원조와 대(對)러 안전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진통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 미국 등의 설득과 유인책 제공이 주효하여 핵문제는 원만히 타결되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2009년 발행한 <한국정치외교사 논총> 제30집 제2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한테 안전보장을 요구한 사실로부터 느낄 수 있듯이, 소비에트 출신 국가들의 비핵화에서는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미국의 행동반경이 상대적으로 좁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오로지 자국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무리한 요구를 내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소비에트 출신들이 처음부터 핵보유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미국 못지않게 러시아의 이해관계도 컸다는 점은 미국의 협상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됐다. 지금 설명할 세 번째 차이점은 소비에트 출신들의 협상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된다.

그 차이점이란 것은 경제적인 대외 의존도를 가리킨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강조하는 것처럼, 북한은 자력갱생을 경제 운영의 핵심 축으로 내세운다. 중국이 북한 경제의 목줄을 쥐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북한 경제에서 북중 무역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박종철 경상대 통일평화연구센터 소장이 2017년 8월호 <통일한국>에 기고한 '석탄 금수조치로 김정은 셈법 바꿀 수 없다'란 글은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북중무역이 불과 60~70억 달러 수준이라는 것은 북한의 대외의존도가 그만큼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북한 대외무역에서 중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북한 경제에서 대외무역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매우 낮으므로 북한 경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에 비해, 소비에트 출신들의 대외 의존도는 북한을 훨씬 초월한다. 소비에트연방은 1922년 결성된 뒤 근 70년간 유지됐다. 공산권은 물론 소련 전체의 상호협력 속에서 경제를 운영했으니, 구소련 해체 직후인 1990년대 전반에 이들이 곧바로 경제적 자립을 시도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제시한 보상 및 경제지원을 이들이 쉽게 받아들인 이유를 설명한다.

문 대통령이 방문 중인 카자흐스탄의 경우에는 대외 의존도가 특히 높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핵심 먹거리가 석유산업이기 때문이다. 이 산업에 의존하는 나라들은 미국과의 협력 관계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무역학자 황윤섭·김경희·김수은의 공동 논문 '카자흐스탄 경제발전에 대한 실증 연구'는 카자흐스탄 석유산업의 비중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체 공업에서 원유·천연가스 채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현재 52.17%로 제조업(37.82%)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역시 대외 의존도가 높다. <동유럽 연구> 제24권에 실린 김상원 국민대 전임강사의 논문 '글로벌 금융위기와 우크라이나 경제환경 변화'는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대립에 따른 파벌 갈등, 정당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등으로 시장경제체제 구축을 빠르게 이룩하지 못하였고, 러시아 경제에 대한 높은 의존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1990년대 전반에 무역 의존도가 높은 신생국들이 특히 유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바로 미국이다. 구소련 붕괴 뒤에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설립을 추진하면서 세계 무역의 규칙을 만들어냈다. 그런 미국과 갈등을 빚고서는 정상적 무역 활동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은, 카자흐스탄 등이 넌-루가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석유산업 의존도가 높은 카자흐스탄으로서는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고강도 압박을 받는 것은, 석유 수출국가이면서도 반미 성향을 띠기 때문이다. 석유 시장만큼은 반드시 통제하고 싶어 하는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석유 무역을 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이 선택한 길은 미국과의 타협이었다.

CVID에 반발하는 북한, 카자흐 모델엔 어떻게 반응할까

이처럼 카자흐스탄·벨라루스·우크라이나와 북한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은, 카자흐 모델을 북한에 적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이 '선 비핵화' 요구를 철회하는 수준으로만 카자흐 모델을 적용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나라들의 비핵화 프로세스를 북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점과 관련해, 카자흐 모델이 북한을 자극할 소지가 없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 때 애슈턴 카터가 이런 발언을 했다.

"CVID를 수반하는 넌-루가 (프로그램에 의한) 지원은, 합중국이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합리적 당근이 될 수 있습니다."

애슈턴 카터는 '넌-루가 프로그램을 통해 카자흐스탄·벨라루스·우크라이나를 CVID 방식으로 비핵화시켰다'고 설명한 뒤 위와 같이 발언했다. 그런데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며(Verifiable) 불가역적인(Irreversible) 핵폐기(Dismatlement)'를 의미하는 CVID 방식은 조지 워커 부시(아들 부시) 행정부가 수립한 것이다.

북한은 "패전국한테나 강요하는 굴욕적인 것"이라며 CVID에 강하게 반발했다. 카자흐 모델 속에 숨어 있는 CVID 방식에 대해 북한이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할 만하다.
 
크림반도의 위치.
 크림반도의 위치.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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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모델이 북한을 자극할 소지가 없지 않다는 점은 2014년에 있었던 우크라이나-러시아 갈등에서도 유추된다. 이 해에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일원인 크림자치공화국이 러시아연방에 합병됐다. 크림공화국 주민투표를 거친 것이기는 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흡인력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남진 루트 중 하나다. 그런 전략적 요충지를 우크라이나가 손쉽게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카자흐 모델에 입각한 비핵화로 인해 힘의 시소가 러시아 쪽으로 훨씬 더 기울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북한이 카자흐스탄 모델에 경계심을 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모델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애슈턴 카터가 '넌-루가 방식이 북한에 적용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고 말할 만했던 것이다.

태그:#카자흐 모델, #카자흐스탄 모델, #우크라이나, #비핵화,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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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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