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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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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고등학교 '납부금'이 사라질 모양이다. 지난 9일 정부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고등학교 진학률이 사실상 100%에 달하는 상황에서 고등학교 교육까지 국가가 책임진다니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더욱이 지역별, 학교별로 액수의 차이가 커서 형평성에 어긋나고 교육권 침해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지적받아온 터다. 참고로, 수업료와 학교운영지원비 등을 포함해 일반 인문계고의 경우 1년으로 환산하면 50만 원 넘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는 현행 초중등교육법상 수업료 책정 권한이 시도교육청에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입장에선 까다로운 업무 하나를 덜게 된 측면도 있다. 당장 학부모에게 납부금 독촉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행정실의 업무이긴 하나, 대개 납부금 장기 미납 학생이 있으면 해당 담임교사에게 명단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로서 아이를 불러다 이야기할 수도 없고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가정통신문이나 SNS 문자 등을 통해 납부를 독려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이유든 의도적으로 버티는 경우든 더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학교마다 납부금 미납자에겐 졸업장을 수여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할까. 물론, 어디까지나 엄포일 뿐 실제 졸업을 시키지 않은 경우는 없다.

실제로 납부금을 지원받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태 전 어느 교육연구소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 고등학생의 절반가량이 장학금이나 학비 지원금 등 다양한 명목으로 납부금을 면제받고 있다고 한다.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의 감면 혜택까지 포함하면 어림잡아 60%를 상회할 것으로 여겨진다.

가난을 증명하는 일, 이젠 끝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정작 학비 지원이 절실하고 시급하지만 제도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도 적지 않다. 대개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을 서류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경우다. 나 몰라라 할 게 아니라면, 이는 여전히 교사가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게 된다.

그러한 경우 학교장 추천을 통해 감면을 받도록 하거나, 외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십분 활용해 부담을 덜어주려 하지만 이 또한 결코 녹록지 않다. 학교장 추천의 경우엔 감면 대상자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고, 외부 장학금은 조건이 까다로워 신청 자체가 쉽지 않다. 신청한다고 해도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헛물만 켜다 끝나는 일도 부지기수다.

특히 올해 장학금 관련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눈에 밟히는 아이들이 유독 많다. 장기 불황의 여파에다 부모의 갑작스런 별거나 이혼 등으로 고스란히 아이에게 피해가 전가되는 경우다. 많은 담임교사들이 학년 초 상담의 목적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발굴'해내는 일이라고 이구동성 말할 정도다. 아이가 담임교사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이든, 교사든 한 푼이 아쉬운 '을'의 처지라 장학금을 주겠다는 기업이나 단체가 한없이 고맙다가도,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하나둘 따져보노라면 '갑질'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받는 입장에선 장학금이 '가진 자의 시혜'로 비치기 일쑤다. 교육의 본령에 가까워야 할 장학금 업무가 외려 힘들고 번거롭고 짜증 나는 잡무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흔히 장학금이라고 하면 대상자를 선정해 학비를 지원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지만, 한자 말 번역에 충실하자면 아이들의 배움을 장려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배움을 북돋우기 위한 전제 조건이 돈만은 아닐 텐데, 장학금을 지원해주겠다는 단체에 전화를 걸어 종일 액수와 기한, 서류 등의 문제를 문의하다 보면 본질적 의미가 흐려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물론, 지역 공헌 사업의 일환인 경우도 있고, 조세법상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한 의도도 읽힌다. 그래도 기업과 법인, 기관과 교회 등에서 그들이 거둔 수익의 일부를 미래세대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 자체는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신청할 때 갖춰야 할 온갖 서류다.

많게는 열 가지도 넘는 서류를 챙기다 보면, 종종 일하다 말고 화가 치밀기도 한다. 학교생활기록부와 담임교사의 추천서야 그렇다 쳐도, 월별 의료보험 영수증과 가족관계증명서, 소득 합산과세 증명서, 기초수급자증명서 등을 모두 첨부하라는 건 지나치다 싶어서다. 한번은 겁도 없이 해당 기관에 부러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한 적도 있다.

아무리 주위에서 모르게 조심한다 해도, 가난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건 개인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라는 생각에서다. 교육을 받기 위해 그들 앞에서 구걸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아이나 그들의 부모가 주민 센터나 금융기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에서 용처를 기입하고 관련 서류를 발급받을 때 느끼는 참담한 심정을 그들도 모르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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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 지원으로 경쟁 부추기는 게 더 황당해요"

학년 초 아이와의 상담을 마친 뒤, 학비 지원이 필요하다 싶어 그의 부모에게 부러 전화를 걸면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정중히 사양하는 학부모를 여럿 만났다. 학비 지원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자칫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만치 않은 경제적 부담에도 또래 친구들이 입는 롱패딩을 사주고야 마는 부모의 마음 같은 것이다.

이태 전엔 이런 경우도 있었다. 신청 마감 일자가 다 되도록 서류가 도착하지 않아 학부모에게 독촉 전화를 걸었더니 일주일 전에 등교하는 아이 편에 챙겨 보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는 담임선생님께 도와달라며 손 벌리는 것 같아 창피했다며 서류가 담긴 봉투를 도중에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고 했다.

고백하건대,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그토록 갈망해온 건 2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겪어온 '납부금'으로 인한 갈등과 번민의 결과다. 무상교육이야말로 공교육 정상화의 첫 단추라는 걸 확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난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혜택을 받는 시스템은 명색이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와 병립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족 하나. 아이들은 정부의 무상교육 실시 방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놀랍게도, 분기별로 내는 '납부금' 액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교사도, 부모도, 그 누구도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고 쉬쉬해온 탓이다. 그냥 돈 걱정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며 부러 감춘 것일 게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상교육의 취지와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드물게 '모든 국민은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조항을 들먹이며 무상교육의 당위성을 언급하기도 하고,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며 조롱하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인식을 문제 삼는 아이도 있었다. 무상교육을 헌법의 규정대로 의무교육으로 통일해 부르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중에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솔깃한 내용도 있었다. 실상 이는 기성세대를 향한 날선 죽비였다. '어른들보다 몇 갑절은 성숙한' 일부 아이들의 의견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학비 지원 받자고 누가 더 가난한지 경쟁하듯 따진다는 게 황당해요. 조건에 맞춰 서류 준비하느라 여기저기 발품을 파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고요. 가난한 학생들을 찾아 지원하기보다 모든 학생들의 교육 관련 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부담하도록 하고, 국민들이 십시일반 세금을 더 내도록 하는 게 훨씬 교육적인 방식 아닐까요? 대기업 등 부자들도 장학금으로 거금을 쾌척한다며 생색내지 말고, 그만큼 세금을 더 내도록 하면 되잖아요."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보편화된 나라에서는 시민들의 윤리의식이 높다는 걸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요.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인 쿠바는 의사를 국가의 세금으로 양성한다는데, 졸업 후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공동체를 위해 쓴다는 거죠. 반대로, 의대를 졸업하자면 엄청난 돈이 드는 우리나라에선 의사가 돈을 밝힐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닐까요?"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정부의 고등학교 무상교육 실시 방침을 두고 내년 총선에 대비한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난했다는데, 굳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요. 무상교육이 정치인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널뛰듯 할 수 있다는 게 서글플 뿐이죠. 분명한 건, 포퓰리즘 운운하는 저들은 우리 교육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건 밝혀진 셈이죠."

태그:#고등학교 무상교육, #장학금,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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