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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왼쪽부터 첫번째는 빈곤, 두번재는 죽음, 세번째는 모의
 왼쪽부터 첫번째는 빈곤, 두번재는 죽음, 세번째는 모의
ⓒ 파인아트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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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그림. 창백하게 마른 아이가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다. 한구석에서 다른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는 침울한 표정으로 침대 쪽을 바라본다. 아빠 품속 아이도 겁에 질린 표정이다. 앙상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괴로움과 좌절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뒤편에 우두커니 멈춰있는 방직기계는 스산함만 더한다. 죽어가는 아이를 눈앞에 두고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독한 가난은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다.

가운데 그림. 아이의 목을 조르는 죽음의 사신은 기어이 아이를 데려갔다. 퀭한 눈동자의 아이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뒷짐을 진 채 아이를 내려다보는 아빠는 '잘 가'라는 작별의 인사도 차마 건네지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있다.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공간, 넋이 나간 채로 벽에 머리를 기댄 엄마는 이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다. 절망으로 가득 차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다.

마지막 그림. 사람들이 모여든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가는 이 시기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왼쪽부터 첫번째는 행진(미시건 대학 예술박물관), 두번째는 봉기(spaightwood 갤러리), 세번째는 결말(spaitwood 갤러리)
 왼쪽부터 첫번째는 행진(미시건 대학 예술박물관), 두번째는 봉기(spaightwood 갤러리), 세번째는 결말(spaitwood 갤러리)
ⓒ 미시건 대학 예술 박물관, spaitwood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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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행진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셋이 됐다. 주먹을 불끈 쥔 남자, 곡괭이를 든 남자, 도끼를 든 남자, 아이를 업고 나온 여자,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거리로 뛰쳐나왔다. 다들 살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이 도착한 착취한 자본가의 집. 화려한 철문은 굳게 닫혀 있다. 모여든 남자들은 문을 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여자들은 보도블록 바닥을 뜯어내 돌멩이를 나른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이 없고, 엄마를 따라 온 어린 아이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린다.

이 작품을 두고 벨기에 조각가 콘스탄틴 모이니르는 "이런 식으로 묘사된 여자들의 손을 한 점도 본적이 없다"라고 했다. 모두들 살기 위해 악에 받혀 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봉기는 수포로 돌아갔다. 피해자는 희생자가 됐다. 시체들이 하나 둘 가난한 방직공의 집으로 옮겨진다. 멈춰버린 기계 앞에는 이미 시신 두 구가 뉘어져 있고, 그들의 머리맡에는 슬픔에 짓이겨진 여인이 웅크린 채로 있다. 두 손을 늘어뜨린 창백한 여인은 동료의 손에 들려 옮겨지고 있는 또 다른 시신을 바라본다. 슬프게도 결말은 죽음, 그리고 다시 이들을 덮친 가난뿐이다.

하지만 작가는 창과 문 사이에 희미한 빛을 그려 넣어 그들에게 아직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빈곤, 죽음, 회의, 행진, 봉기, 결말. 총 6점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캐테 콜비츠(1867~1945)가 제작한 '직조공의 봉기'(1895~1898)라는 판화 연작이다.

노동자의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다

캐테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다섯째로 태어났으나 위로 태어난 아이 둘이 어린 나이에 사망해 실제로는 네 남매 중 셋째로 자랐다. 아버지는 법관이었으나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법관직을 버리고 목수가 된 급진적인 사회 민주주의자였다. 어머니는 개신교 신학자의 딸로 학식이 깊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종교학과 사회학을 배웠다.

집은 부유했다. 그가 12세 즈음 아버지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만난 노동자나 선원, 농노들을 그렸는데, 당시 프로이센에는 여성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개인교습을 받았다.

17세가 되자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에 있는 여자 예술학교로 보냈다. 그의 스승인 카를 쉬타우퍼 베른은 그에게 회화보다 판화에 더 많은 재능이 있음을 감지하고 친구이자 판화가인 막스 클링거를 알려주며 판화를 권했다. 베른 또한 사회성이 강한 에칭 작업을 많이 했었는데, 이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89년경 막스 클링거의 저서 <회화의 판화>를 읽고 본격적으로 판화의 길로 접어든다.

1840년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직조기계는 가내수공업을 하던 직조공들의 삶을 통째로 흔들었다. 기계로 짠 제품은 손으로 작업한 제품들에 비해 생산비가 적게 들었고, 자본가들은 많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 직조공들의 급여를 최저 생계비 이하로 떨어뜨렸다. 독일 소도시 슐레지엔에서 이런 과도한 임금삭감으로 인해 직조공들이 굶어 죽는 지경이 됐다.

격분한 직조공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실을 토대로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직조공들>이라는 작품을 써서 무대에 올렸다. 하우프트만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콜비츠는 1893년 이 작품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직조공의 봉기' 연작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다.

연극의 내용과는 다르게 이 판화 작품 속에는 직조공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탈출구 없는 비참한 생활과 분노에 찬 저항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현실의 문제점을 확실히 부각시켰고, 이 작품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예술의 본보기가 됐다.

이 작품이 처음 베를린 미술대전에 출품된 1898년 당시 엄청난 파장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금상을 주려고 했으나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거부당한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 이래 정치, 사회, 예술적으로 변혁의 시기였다. 황제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말만으로도 혁명을 찬양하는 것으로 간주해 이런 의미를 내포한 모든 작품을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전시는 성공했고, 이에 힘입어 콜비츠는 베를린 여자 예술학교로부터 강의 의뢰를 받는다. 다음 해 이 작품은 드레스덴에 전시돼 금상을 받고 런던에서도 상을 받는다. 이후 그는 또 다른 걸작인 '농민전쟁'(1902~1908년, 7편 연작)으로 명실상부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혁명적인 예술가로 입지를 굳힌다. 자신이 내놓는 작품들의 주제에 대해 그는 이 같이 답했다.

"나는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단순하고 솔직한 삶이 이끌어 주는 것들에서 주제를 골랐다.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부르주아의 모습에는 흥미가 없었고 중산층의 삶은 현학적으로만 보였다. (중략)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이끌린 이유 가운데 동정심은 아주 작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삶이 보여주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나치도 막을 수 없던 예술혼

1891년 그는 칼 콜비츠와 결혼하고 베를린에 정착한다. 칼은 의사로 의료보험조합에서 운영하는 무료진료소에서 평생을 빈민들을 치료했다. 캐테는 이곳에서 가난과 고통의 참상을 목격한다.

둘 사이에서는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캐테는 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에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싣기 시작했다. 대도시 생활의 힘든 삶, 혼자인 여자의 고단함, 실직, 배고픔과 절망, 원치 않는 임신과 같은 불행을 그만의 섬세한 터치로 가슴 뭉클하게 묘사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캐테의 두 아들은 전쟁에 지원한다. 칼은 반대했지만 캐테는 두 아들의 뜻을 존중했다. 얼마 후 캐테는 전장으로부터 한 통의 통지서를 받는다. 그날, 캐테는 일기장에 통지서 속 문장 단 한 줄만 옮겨 적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둘째 아들 페터(18세)의 죽음은 캐테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대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다면, 아들의 죽음으로 과연 고귀한 희생이란 무엇인지를 회의했다.

그는 오랜 시간 슬픔을 승화시켜 페터를 기념하는 조각 작품 '비통한 부모'(1932)를 만들고 반전 운동의 하나로 전쟁 시리즈를 제작한다. 희생, 지원병들, 부모, 과부1, 과부2, 어머니들, 민중 총 7편으로 만들어진 이 연작은 너무도 강렬한 슬픔이 뚝뚝 떨어져 보고 있으면 묵직한 아픔에 압도당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절망이, 어머니의 심정이, 남편을 잃어버린 아내의 슬픔이 애가 끓도록 녹아 있다. 그는 일기에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나의 예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구제받을 길 없는 사람들,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이 필요한 동시대인들을 위해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36년 나치는 그가 어떤 전시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혼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위대한 예술가는 오늘날 침묵을 선고받았지만 그 작품은 점점 극동에까지 퍼지고 있다.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 루쉰

2차 대전으로 손자인 페터가 참전해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손자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페터라고 지었건만 그마저도 사망한 것이다. 케테는 전력을 다해 마지막 작품을 만든다. 괴테의 글에서 제목을 따왔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게 곧 내 유언장이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전쟁에 반대한다!>처럼 간절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자 요구이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1942)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1942)
ⓒ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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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점의 판화, 50여 점의 초상화, 1300점의 소묘를 남긴 콜비츠는 1945년 종전을 며칠 앞두고 눈을 감았다. 1951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동베를린 뵈르터 광장 공원에 세워졌다.

[참고서적]

<캐테 콜비츠>(도서출판 운디네, 전옥례 옮김)
<캐테 콜비츠와 노신>(열화당 미술문고, 정하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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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