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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는 사진과 글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더해 사람의 기억을 '탁본'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돼 고문 등의 '국가폭력'을 경험한 분들의 기억 말입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삶을 질감으로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는 탁본 모임에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순천역에 내려 차로 달리길 한 시간 조금 넘었을까? 남도의 봄을 알리는 꽃길을 지나 보성 일림산 아래 터를 잡은 영광 정씨 가문의 고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천석지기의 부농이었던, 그러나 해방 이후 고난을 겪다 1980년에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으로 한 집안에서 32명이 체포되고 사형과 징역에 집안이 멸문하다시피 한, 영광 정씨 가문의 고택이 이번 탁본 모임의 목적지였다.

정유재란, 일제강점기... 대를 이어 항일에 나선 명문가
 
 전남 보성의 영광 정씨 고택
 전남 보성의 영광 정씨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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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정씨는 정유재란 시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직접 종사관으로 청했던 정경달에서부터 시작되어 구한말까지 내려온 남도의 명문가였다. 당시 선산부사로 있던 정경달이 관민을 모아 왜적을 격퇴하자, 이순신은 문관 출신인 정경달을 눈여겨보아 그에게 본영의 살림과 운영을 맡겼다. 정경달은 후일 육전(陸戰)의 난중일기라 일컬어지는 '반곡 난중일기'를 남겼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영광 정씨 가문은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에 가산을 내놓기 시작했다. 봉강 정해룡은 조부였던 정각수가 상해임시정부에 지원하겠다고 내놓은 거액의 독립자금을 들고 직접 만주로 가거나 인편을 통해 전달했다.

또한, 고택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양정원이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하고 스스로 노비 문서를 불태운 후 그들이 자립하게끔 토지를 무상분배 하고 흉년이 들면 수백 석의 구휼미를 풀었다. 특히 양정원은 1937년부터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시행했던 사설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945년 봄 정해룡·정해진 형제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폐쇄된 양정원은 해방 후 다시 문을 열었고, 1947년 회천서교가 설립된 후 현재의 회천서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많은 가산을 내놓은 탓에 99칸이라 불리던 고택은 일부분만 남게 됐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흔적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봉강은 400년 전부터 15대를 이어 내려온 고택의 사랑채 앞에 한반도를 닮은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가 직접 고안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약수가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휘돌고 제주도가 있을 법한 곳으로 빠져나가 마을로 흘러드는 데서 식민지 치하 항일운동에 대한 의지와 독립운동에 대한 봉강의 생각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정씨 고택의 한반도 모습을 닮은 연못
 정씨 고택의 한반도 모습을 닮은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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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 봉강 정해룡 선생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는 정길상 선생
 부친 봉강 정해룡 선생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는 정길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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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인 봉강 정해룡의 생애를 떠올리며 고택에 담긴 이야기를 전달하던 정길상은 이 모든 배경에 봉강의 조부인 정각수 옹이 고택 뒤편 일림산에 지은 별채, 삼의당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를 보러 올라갔으나 매관매직이 판을 치고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본 후 고향으로 되돌아온 정각수는 삼의당에 세 개의 호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하나는 부정부패에 휩쓸리지 말 것. 둘째는 선영(선산)을 지킬 것. 셋째는 후세의 교육을 철저히 할 것. 즉 봉강은 조부가 남긴 뜻에 따라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에 가문의 모든 것을 내놓은 것이다.

해방 이후 선택의 기로에 선 영광 정씨 가문
  
해방 이후 봉강은 보성의 자생적 자치기구였던 보성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미군정이 인민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몽양마저 암살당하자 당시 몽양의 근로인민당에서 재정부장을 맡았던 봉강을 비롯한 영광 정씨 가문은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일가친척들은 각자의 뜻에 따라 거취를 정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봉강은 '거북정'이라 불리던 정씨 고택에 칩거했다. 모든 재산과 청춘을 바쳐 새로운 세상을 꿈꿔왔지만, 그 꿈은 가족과 친지들의 죽음과 비극으로 돌아왔다. 그 비극의 마지막이 바로 1980년에 있었던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이었다.

봉강이 죽은 후 전두환 정권 하에서 이들 가족은 간첩단으로 엮여 사실상 멸문의 위기에 처한다. 정길상의 형은 주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정길상과 봉강의 삼촌이었던 정종희 등 수많은 정씨 일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고 10여 년의 옥중생활을 했다.

심지어 과거 총탄에 실명을 한 정종희는 북과 연락하며 암호를 풀었다는 혐의로 무전 간첩이라 하여 체포되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어떻게 난수표를 보고 암호를 해석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합리적이고도 당연한 질문은 당시 재판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관련기사] "앞 못보는 아버지가 북한 암호해독?" 참혹한 고문 흔적)
 
 정씨 고택 앞의 비석을 설명하고 있는 정종희의 딸 정숙항
 정씨 고택 앞의 비석을 설명하고 있는 정종희의 딸 정숙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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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상이 영광 정씨에 얽힌 역사를 풀어냈다면 정종희의 딸, 정숙항은 옛 시절을 떠올리며 정씨 고택에 서린 추억을 이야기 했다. 아버지인 정종희가 태어난 집이자 어린 시절 숱하게 보며 지나쳤던 거북정의 글씨, 대문 너머 중문채를 거쳐 본채가 있는 독특한 집안의 구조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본채의 정면 기둥과 가운데 난 기둥이 관에서나 쓰던 둥근 기둥이었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을 나라로부터 받았기에 언제든 국난의 시기에는 내주어야 한다며 가산을 내놓았던, 그랬기에 당시 후손들은 가난해야 했던 기억을 담담히 풀어내는 그녀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씨 고택 담벼락의 거북정
 정씨 고택 담벼락의 거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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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정을 탁본한 정숙항
 거북정을 탁본한 정숙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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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희는 거북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지었다.

'회소헌' 

웃음이 머무는 집이란 명패처럼,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과 고난을 겪었지만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내디뎌온 정씨 집안 사람들의 의지와 그들의 자부심 가득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숙항은 이곳 회소헌에서 태어났다. 눈이 안 보였어도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자식들을 보듬어 주셨던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한 집이라는 말에 엄숙함과 그리움이 전해져온다. 회소헌과 정씨 고택, 두 곳을 넘나들던 정숙항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즐거웠다.
 
 회소헌, 웃음이 머무는 집이란 뜻이다.
 회소헌, 웃음이 머무는 집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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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6.10 만세운동의 주역이자 항일 독립투사인 권오설의 후손인 권대용도 함께 자리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권오설의 영혼까지 가두고 싶었던지 가족들의 입관도 없이 철관으로 땅에 파묻은 일제의 행위를 알게 된 사연을 들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 나아가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勿爲歷史罪人)는 영광 정씨 가문의 가훈을 한 번 더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정씨 고택에서 탁본모임을 함께하는 이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정씨 고택에서 탁본모임을 함께하는 이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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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지금여기에"라는 단체에서 일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