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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못 일어나기 대회' 같은 게 있다면 우승할 자신이 있을 만큼 아침이 괴로운 사람이다. 그런 내가, 동이 트기 전에 알람 시계도 없이 벌떡 일어날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농사를 지을 때다. 

나는 농사가 좋다. 얼마나 좋은가 하면, 밭에 나갈 생각만 하면 아무리 지쳐 있어도 새록새록 힘이 나고, 들에 갔다오면 정말로 얼굴이 뽀시시해진다. 새벽에 일어나도, 해질녘까지 허리가 끊어지도록 김을 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추밭에서 하루종일 있어도, 지겹거나 괴롭지가 않다.
   
하지만 서른이 다 될 때까지 나의 이런 '농사 적성'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농사는 고사하고 제대로 흙을 만져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데다가 외가 친가 모두 서울 한복판에 있어서 명절에조차 서울을 벗어난 일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타지에서 온 친구들은 내가 무슨 '강남 출신 차도녀'라도 되는 줄 안다. 

숨을 참고 살았던 어린 시절 달동네
 
동이 막 터오는 새벽부터 하늘이 환해지는 아침까지가 하루중 밭일하기엔 최고의 시간이다
 동이 막 터오는 새벽부터 하늘이 환해지는 아침까지가 하루중 밭일하기엔 최고의 시간이다
ⓒ 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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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동네에서 자랐다. 말이 좋아 달동네지, 사실은 빈민촌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집은 전철역에서 한참을 걸어 시장을 모두 지나 또 좁디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뒤 높은 비탈을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 곳에 있었다. 

녹슨 대문 너머 슬레이트로 대충 지어 바람이 숭숭 드는 집에는 네 가구가 살았는데, 당시 일요일마다 방영되던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의 소박한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2층에 살던 부부는 하루가 멀다하고 머리채 잡는 소리로 악악거렸고, 문간방에 사는 여자는 뭘 하는 건지 항상 밤에 나가서 아침에 들어왔다. 주인집 아저씨는 홀아비였는데, 부인이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 아줌마는 가끔 와서 자신을 때리던 속가 남편의 빨래를 해주고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안방 천장은 비가 새다 못해 어느날 느닷없이 무너져내렸다. 작은 방은 구들이 꺼져 항시 얼음장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집이었다.

석유 곤로와 연탄불로 밥을 하던 부엌에선 수시로 쥐가 다니며 비누를 쏠아댔다. 저녁이면 부엌에서 물을 데워 몸을 씻었다. 방안에는 요강이 있었고, 대문 밖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나는 항상 그 안에 들어가면 숨을 참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오래 숨을 잘 참는다.

80년대였다. 경제발전이 한창이던 시기니만큼 밥을 굶지는 않았다. 하지만 뭘 배불리 먹어본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고기반찬은 생일쯤 되어야 비로소 나왔고, 과일을 먹는 일도 드물었다.

옷은 항상 남에게 얻어다 입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면 보통 포기했다. 어른들이 나에게 돈이 있다 없다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항상 공기중에 까끌거리는 가난의 입자가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내 몸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경북 봉화에 있는 독립대안학교 내일학교를 개교하기 위해 처음 봉화에 왔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우선 집과 집 사이가 멀었다. 마당은 볕이 잘 들었고, 길에는 사람이 적었다. 그리고 드넓은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시골에서는 일 잘하는 여자가 최고

처음으로 밭에서 빠알간 완숙토마토를 따먹었던 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설탕을 뿌려놓은 듯 고슬고슬한 단맛. 지금까지 내가 먹던 것은 토마토 모양을 한 쭉정이였다는 깨달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토마토만이 아니었다. 농약없이 키운 고추는 과일처럼 새콤했고, 가지는 촉촉했으며, 오이는 달았던 데다가, 깻잎과 상추는 화수분처럼 쏟아져나왔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슈퍼에서 쌈채를 사는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시골에선 동이 텄는데도 안 일어나는 자를 버러지 취급하고, 빈 땅을 놀려두는 것을 범죄로 본다. 멀쩡한 땅을 버려두고 상추를 사먹었으니 그런 눈길을 받아도 쌌다.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야채를 수확하다보면, 당연히 나눠먹고 당연히 장아찌를 담그게 된다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야채를 수확하다보면, 당연히 나눠먹고 당연히 장아찌를 담그게 된다
ⓒ 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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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봉화에 가고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새벽이면 일바지를 입고 밭에 나가 일을 하자, 처음엔 데면데면하던 마을 사람들이 그제서야 말을 걸어왔다. 사람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은 내가 하는 양이 영 못 미더워 그랬던 것 같다.

"보소. 그게 그렇게 하는 게 아이고, 이래 순을 따줘야지. 그래 하면 맹 안 열린대요."

경상도 말도 아니고 강원도 말도 아닌, 요상한 '봉화어'를 구사하는 아지매들은 황송하게도 나에게 아침 참을 같이 먹자 권해주었다. 그 틈에 섞여 삶은 감자를 먹으면서 나는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는 구절의 뜻을 비로소 이해했다.

시골에선 얼굴이고 몸매고 애교고 다 필요없다. 일 잘하는 여자가 최고다. 새카만 얼굴에 딱딱한 손마디일지언정 한시도 쉬지 않고 재게 움직이며 바지런하게 절기를 챙겨야 밭에서 고추가 나오고 감자가 나오고 배추며 무가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봉화로 간 첫 해에 나는 농사에 심취하여 마을 사람들이 언제 뭘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달력에 적어 넣었다. 삼월 이십오 일, 마을에서 밭을 갈았다. 삼월 삼십일, 마을에서 비닐 멀칭을 했다. 사월 삼일, 마을에서 고추 모종을 심었다. 사월 십오일, 진달래가 피었다. 사월 십육일, 마을에서 감자를 심었다...  

그렇게 일 년을 기록하자 돈 주고도 못 살, 귀한 봉화판 농사 월력이 완성되었다. 시골의 한 해는 달력을 따라가지 않는다. 윤구병 선생의 '잡초는 없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마을 할머니께 콩을 언제 심느냐 물었더니, "감꽃이 피면 올콩을 심고, 감꽃이 지면 메주콩을 심는거여"라고 답하셨다.'

나는 그 얘기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시골사람'에 대한 낭만적인 삽화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건 비유가 아니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정말로 달력이 아니라 꽃과 새를 보고 산다. 진달래가 피면 감자를 심고, 뻐꾸기가 울면 콩을 심고, 고추잠자리가 날면 배추를 심고, 옥수수에 새 파먹은 자국이 있으면 다 익었다는 뜻이니 수확하면 된다.  

도시에서와 전혀 달라진 나의 삶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밭에 나가 사는 '열혈 귀농인'처럼 보이겠지만, 나의 '농사 파라다이스'는 첫 해로 끝이 났다. 그때는 개교 초기라 내일학교에 학생들도 거의 없고 별다른 할일이 없어서 하루종일 밭에 나가 있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일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폐교를 고치고, 기숙사를 짓고, 닭 삼천 마리를 기르고, 커리큘럼을 짜고, 정원을 공부하고, 말을 길러야 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일들에 매년 밭갈 때를 놓치고, 파종할 때를 놓치고, 김맬 때를 놓치고, 수확할 때마저 놓치고 말았다. 내가 사랑하던 밭은 우묵장성이 우거져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농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일에 찌들고 서류에 치이고 사람에게 지친 날이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온갖 작물로 가득한 밭을 떠올린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이랑 같이 밭을 갈아야지. 감자를 심어야지. 콩도 잔뜩 심어서 콩잎 장아찌를 만들어야지. 파프리카를 심어서 샐러드를 먹어야지. 고구마를 잔뜩 캐서 맛탕을 튀겨야지, 향신채를 빽빽하게 심어서 카레를 만들어야지, 허브를 말려 차를 우려야지... 생각만 해도 좋아서 실실 웃음이 난다. 

도시에선 항상 두려웠다. 뭔가 잘못되면, 아주 조금이라도 인생이 틀어지면, 난 언제고 다시 그 산동네의 비 새고 쥐가 끓는 집으로 빨려들어갈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되고, 누구에게 속아서도 안 되고,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혼자 그렇게 인이 박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봉화에 와서부터는 조금씩 인생에 겁이 없어졌다. 실패 좀 하면 어때, 농사 지어 먹고 살면 되지. 좀 망하면 어때, 다시 시작하면 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후에 대한 불안도 어느새 녹아버렸다. 마을 할매들은 꼬부랑해져서도 잘만 김매고 고추 따면서 지내던데. 나도 죽을 때까지 그러면 되겠네. 그런 생각을 할 때 느껴지는 안도감은, 오랫동안 무언가에 쫓겨 황무지를 헤메이다가 비로소 안온한 성벽에 들어왔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

어쩌면 인간 삶의 모든 편의를 갖춘 도시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가장 살기 힘든 곳일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평생을 저당잡혀야 하는 감옥일지도 모른다. 나는 도시를 빠져나오고서야 내가 그간 숨을 참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곳은 벚꽃이 지고 있는데 봉화에선 이제사 진달래가 피었다
 다른 곳은 벚꽃이 지고 있는데 봉화에선 이제사 진달래가 피었다
ⓒ 김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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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면서 비로소 나도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심고 불려가는 단순한 행위에서, 어떤 원초적인 충족감을 얻었다. 그렇게 채워진 가슴은, 웬만한 일에는 쉬이 이지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달래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감자를 심어야지. 얼른 심어야지. 주문처럼 되뇌인다. 예쁘게 심어야지. 그러면 꿈결처럼, 거짓말처럼, 어느새 행복해진다.

태그:#농사, #귀농, #진달래,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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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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