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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사료편찬위원(1919.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사료편찬위원(1919.6)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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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일이었다. 3.1 운동 100주년이었던 그 날, YTN은 '100년 전 만세를 외쳤던 우리'란 제목의 인터뷰 영상을 내보냈다. 3.1 운동을 하다 체포된 보통 사람들의 판결문을 소개하는 이 영상에서 당시 박유진 국가기록원 기록연구관은 발굴 소감을 이렇게 밝혔었다.

"학생하고 농민분들, 교사, 잡화상이나 포목상, 그리고 가마솥 장사하시는 분들, 정말로 옆에서 바로 볼 수 있었던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그런 곳에서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되게 감동을 많이 받았거든요."

감동적이었다. "새장 속에 외로운 새가 새장을 열 때 기쁘게 날아감은 새의 본성인데 우리들도 이때를 맞이하여 독립을 하지 못한다면 새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게 당시 미동병원 직원이었던 한준겸의 최후 진술이었다. "한 국민이라면 마땅히 애국심을 일으켜 주천리 장날을 기해 나와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한 농민 천선재의 그 때 나이는 78세였다.

국가기록원이 최근 개최한 '1919년을 가슴에 품다' 특별전을 통해 공개한 판결문에 나오는 '우리'였다. 이소연 국가기록원 원장은 "조선총독부 판결문 등에서 볼 수 있는 조선인은, 알려지지 않은 우리의 숨은 영웅들이자, 지금의 나와 다를 바 없는 우리 국민"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들을 발굴한 소감을 듣고 싶어 박유진 연구관(41·여)과 김정화 연구원(49·여)을 국가기록원에서 만났다. 지난 달 19일 대면 인터뷰,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둔 지난 9일 전화 인터뷰를 함께 담아봤다.

판결문에 묻어나는 동시대성... "결국엔 거리로 나가고야 마는 국민적 DNA"
 
 "한 국민이라면 마땅히 애국심을 일으켜 주천리 장날을 기해 나와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자"며 3.1 운동 시위에 참여했던 농민 천선재의 판결문 복사본. 그 때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한 국민이라면 마땅히 애국심을 일으켜 주천리 장날을 기해 나와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자"며 3.1 운동 시위에 참여했던 농민 천선재의 판결문 복사본. 그 때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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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나의 행위는 선동적이 아니고 피동적이 아니다." (장일현, 학생, 당시 24세, 국가기록원)

누군가 부추겨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라는 이 말, 짧지만 큰 울림을 갖고 있었다. 박 연구관은 약 1만 9천여건의 판결문 데이터베이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쩔 수 없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결국엔 거리로 나가고야 마는, 불의가 있으면 뛰쳐나가고야 마는, 국민적 DNA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는 설명이었다. 그의 이 말은 앞서 소개한 농민 천선재 관련 기록을 보면 더 확연하게 다가온다.

"경기도 양평군에 거주하는 어느 노인이 상경하여 서울 대한문 앞에서 시위대에 합류하여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까지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그 노인을 경찰서로 연행하였다가 '당신은 노망한 노인이니 석방하노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노인은 '나는 노망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다. 저 가련한 청년들과 어린아이들이 독한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 나는 홀로 참아내며 돌아갈 수 없노라."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듣는 100년 전의 함성, 3.1 운동' 중)

정막례(기생, 당시 21세)는 "기생단을 조직하여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장핀과 초혜를 사서 같은 복장을 하고 기생 조합소에서부터 시장으로 나와 선두에서 수 천 명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이달근(안마사, 27세)은 "광주에서 태극기 한 가마를 광주 생도들에게 배포하고 수 천의 군중과 함께 광주 천변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했다. 그는 맹인이었다.

김정화 연구원은 그래서 "광장이란 의미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그냥 사람들이 그 때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당연히 "울컥하게 만들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판결문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재판 과정에서 "누가 (태극기를) 줘서 나갔다"는 이, "누가 시켰다"고 하는 사람 등, "한편으로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연구원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던 만큼, 다양한 마음으로 참여했고, 그러다 막상 잡히면 후회하게 되고 비겁하게 되고..."라면서 "100년 전 이 사람들이나 현재의 우리나 오버랩 되는 게 너무 많이 느껴졌다"고 했다. 박 연구관이 "지금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란 것, 동시대성을 느꼈다"고 말을 받았다.

과연 그 판결문의 후손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난 3월 1일 YTN을 통해 방영된 '100년 전 만세를 외쳤던 우리'. 당시 박유진 국가기록원 기록연구관 인터뷰 모습.
 지난 3월 1일 YTN을 통해 방영된 "100년 전 만세를 외쳤던 우리". 당시 박유진 국가기록원 기록연구관 인터뷰 모습.
ⓒ YTN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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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동시대성은 과거를 통해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박 연구관은 '이때 독립을 하지 못한다면 새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했던 한준겸의 판결문을 살펴보며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8명 수감할 수 있는 방에 50명을 3개월 동안 가둬놓고,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징역살이를 하게 만드는 그런 상황", "나 같으면 바로 잘못했다고 할 것 같았다"고 했다.

이런 식의 공감은 그로 하여금 후손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박 연구관은 "한준겸 선생은 몇 차례 옥고 이후에 1943년 돌아가셨다"면서 "후손 인터뷰를 찾아 읽게 됐는데, 아드님은 현재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손자도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이 이어 말했다.

"한준겸 선생 후손이 이렇게 사신다고 하니 오버랩이 되더라. 친일 행위로 확정돼도 재산 환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지 않나. 농사를 짓다가 3.1 운동에 참여해서 감옥에 가고, 고문도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당시 상황에서 몸으로 먹고사는 그들 대부분은 후유증이 컸을 거다. 호구지책 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그들의 그 후 삶은 어땠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재판이란 자체가 가난한 이의 생계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당시 판결이 부당하다는 생각에 항소를 선택한 경우 역시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박 연구관은 "무죄로 나온 사람은 못 봤다, 전부 기각 당했다"고 했다. 그는 "나이가 어린 경우 집행유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징역 6개월에서 많게는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했다.

태형(볼기를 치는 형벌) 90대를 선고받은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한다. 김 연구원은 "일제가 근대적 법 체계를 형식적으로라도 1910년 이후에 들여오려고 했다, 1919년은 그런 측면에서 과도기였다"면서 "판결문을 보면 태형 등이 여전히 있었으며 신체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국가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런 국가 폭력이 꽂히는 대상 또한 가난한 이들이었다.

"일본은 이미 1882년 태형을 폐지시켰다. 일본 사회 내에서도 비인도적이란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된 결과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태형은 일제의 공포적인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체벌로 오히려 더욱 악명을 떨쳤다... (중략) 13개 조항으로 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것으로,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구류에 처할 사람이나, 100원 이하의 벌금이나 과료에 처할 사람 가운데 주거가 없거나 자산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듣는 100년 전의 함성, 3.1 운동'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보다 1년 먼저 금지시킨 태형
 
 미국 기독교 교회 연합회가 편찬한 <한국의 상황>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만세 시위로 체포당한 사람은 2만8934명이었으며 이중 헌병에게 태형 처분을 당한 이들은 907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재판에 회부된 8993명 중 '공식적으로' 태형 처분을 받은 이 또한 1514명이었다고 한다. 모두 1만592명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드는 폭력을 당한 것이다.
 미국 기독교 교회 연합회가 편찬한 <한국의 상황>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만세 시위로 체포당한 사람은 2만8934명이었으며 이중 헌병에게 태형 처분을 당한 이들은 907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재판에 회부된 8993명 중 "공식적으로" 태형 처분을 받은 이 또한 1514명이었다고 한다. 모두 1만592명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드는 폭력을 당한 것이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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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독교 교회 연합회가 편찬한 <한국의 상황>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만세 시위로 체포당한 사람은 2만8934명이었으며, 이중 헌병에게 태형 처분을 당한 이들은 907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재판에 회부된 8993명 중 '공식적으로' 태형 처분을 받은 이 또한 1514명이었다고 한다. 모두 1만592명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드는 폭력을 당한 것이다.

2018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충북 옥천 출신의 박동희가 그 한 예다. 1919년 4월 2일,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보안법 위반으로 태 60대의 즉결 처분을 당한 그는 모진 태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 달 여 만인 5월 6일 사망했다. 그 때 그의 나이 스물 셋. 이처럼 태형을 당해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태형이란 말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압에 신음하던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이란 낱말이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해 5월 편찬을 시작한 <한일관계사료집>에서 3.1 운동 상황과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을 적시하면서 "만세 시위 참여 군중을 모두 독립군"이라고 표현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 연구관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구체적인 연결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19년 5월 서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주고 호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있는데 그 이름이 애국단이었다"면서 "그들은 제2의 3.1 운동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나창헌이란 이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박 연구관은 "3.1 운동 당시 학생으로 참여했던 분"이라며 "이후 임시정부로 가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으로 활동했다"고 소개했다.

그의 아들이 나중화(88) 광복회 부회장, 그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한 사람의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를 만든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강조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3.1 운동과 임시정부의 연속성이 무엇인지, 1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다 명징하게 다가왔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 '서울과 평양의 3.1 운동' 전시회 에필로그는 이렇게 시작된다.

"3.1 운동의 정신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임시정부는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평등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남녀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사형과 태형 등의 금지를 선언하여 식민지 조선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았습니다."

그리고 1920년 4월 1일, 일제가 조선태형령을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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