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 5살 아이 지미가 쓴 시


유치원 교사인 리사(메기 질렌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를 배우기 위해 평생교육원으로 간다. 예술적 욕구가 가득한데,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 그녀는 자주 실망한다. 그러다 유치원의 5살 아이 지미(파커 세바크)가 중얼거리는 시를 우연히 듣고, 아이에게 천부적인 시적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이므로, 동경의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리사는 시간이 지나고 굉장히 과감한 일을 실행에 옮긴다.

4일 개봉한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에서 동경과, 욕망, 그리고 심란한 내면을 고스란히 담은 메기 질렌할의 눈빛은 두말할 것 없이 어마어마하다. 뿐만 아니라, 5살 천재 시인을 연기한 파커 세바프의 눈빛 역시 무시무시하다. 알 듯 모를 듯한 아이의 무심한 표정은 미스터리 그 자체인 시적 재능의 특성과 일치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툭툭 내뱉듯이 말하는 아이의 시를 감상하는 것도 영화를 보는데 깊은 울림을 준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 (주) 엣나인필름


리사는 시 수업 선생님에게 '시작(詩作)'에 대한 세 가지 가르침을 받았다. 첫째, 대상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할 것. 둘째, 시를 통해 대상을 재탄생시킬 것. 셋째, 특정한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볼 것. '바로 그곳'에 섰을 때만 보이는 광경(관점)을 시인은 제시해야 한다는 것. 일반적인 영화라면 그녀가 이 가르침을 수행하면서 시인이 되어가는 것을 보여줬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이 세 가지는, 리사가 천재 시인 '지미'에게 보인 행동이다.

리사는 지미의 시 <애나>를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시 수업 때 발표한다. 뿐만 아니라, 지미의 또 다른 시 <황소>도 제 것처럼 발표한다. 이것은, '대상'(지미)과 자기 자신(리사)을 동일시 여기는 행위다. (첫째, 대상에게 자신을 투영하기) 한편, 그녀는 지미가 시인으로 자라려면, 세상으로부터(심지어 부모까지도) 분리되어 자신과 함께 있을 때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대상을 재탄생시키기) 그래서 그녀는 결정적으로 지미를 데려가(아이를 유괴하여) 그 둘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려 한다. (셋째, '유치원 교사' 외의 특정한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기)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 (주) 엣나인필름

  
그러니까 리사는 지미를 한 편의 '시'로 탄생시키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이야기는 보다 특별해진다. 이건 평범한 범인이 특별한 천재를 동경·질투하는 '모차르트-살리에리' 이야기가 아니다. '시와 독자'의 관계, 예술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우화다. 유치원 안에서 한숨을 내뱉는 리사로 시작한 영화는 지미의 한탄으로 끝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을 각각 혼자 두는데, 각 쇼트는 두 사람 사이의 어떤 모종의 연결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처음과 끝의 각 쇼트는 '예술과 삶'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전언과도 같다.

리사와 지미의 연결은 상보적으로 보인다. 리사는 예술적 열의는 가득한데, 그것을 실현할 실력이 부족하고, 지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그것을 실현할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 (갖고 싶지만, 갖고 있지 않은) '나의 없음'을 상대방은 정확하게 갖고 있다. 그래서, 지미(예술)는 리사(삶)를 필요로 하고, 리사(삶)는 지미(예술)를 좇는다. (지미의 연령을 5살로 설정한 것은 리사와의 '상보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시가 떠올랐어요. 시가 떠올랐다고요." 리사에게 벗어나려고 경찰에 신고한 아이가, 또다시 시를 적어줄 리사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들리는 아이의 말은 언뜻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지미를 '예술' 자체로 생각한다면 이 대사는 예술이 삶에 외치는 탄식 자체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 (주) 엣나인필름

 
상보성에서 더 간절한 쪽은 아무래도 리사(삶)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원제는 "The kindergarten Teacher"인데, 원제와 한국어 제목 모두 '리사'에 초점이 있다) 부조리하고 천박한 삶은 자주 예술의 얼굴에 매혹된다. 때로는 풍요롭고 넉넉한 웃음으로, 혹은 몰락하는 비참한 얼굴로 예술이 삶에 고개를 들이밀면, 삶은 매력적인 얼굴 앞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이내, 마음속으로 이런 결심을 한다. '내 삶을, 여기다 맡겨도 될까'. 그러나, 예술은 삶이 아니다. 영화의 충격적인 마지막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리사의 죄는 너무나 쉽게 예술에 마음을 준 천진함이라고.

예술은 정말 귀중하다. 우리가 지칠 때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지루할 때 활력을 주기도 하며, 누군가 절망의 늪에서 허덕일 때 그것을 잡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준다. 그러나, 예술이 아무리 귀중할지라도 결코 삶을 대신할 수 없다. 예술에 자신을 투영하고, 그로인해 예술이 특별한 의미로 자신의 삶에서 재탄생할지라도, 예술은 우리 삶을 결코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 특심할지라도, 그것이 삶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클 수는 없지 않을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스틸컷 ⓒ (주) 엣나인필름

  
1994년에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이런 내용이다. 삶을 등질 정도로 영화에만 몰두해왔던 병석(최민수)이 평생에 걸쳐 작성한 시나리오는 결국 무의식 중에 할리우드 영화를 표절한 것에 불과했다는 내용. 이것은 예술에 매몰된 삶이 이토록 황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토록 충만하고 아름답던 예술에게 삶은 너무 자주, 쉽게 잡아먹히고 만다. 

결국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예술이 아니라, 삶의 자리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짓는 그 자리, 외면하고 싶은 상처 난 일상의 자리, 생생한 그곳으로. '애나가 아름답다'고 노래한 예술도 사실, 삶을 살아야 비로소 애나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시인이 쓴 시의 마지막 글자까지 다 읽었다면, 이제 우리가 들어가야할 곳은 책이 아니라 삶이다. 삶의 귀중함을 다시 깨닫게 한 영화의 제목을 나는 이렇게 바꿔서 받아들인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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