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에서 4일 오후 7시 17분 발생한 산불이 속초 시내까지 접근했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의 집이 속초시 동명동 근처에 있는 걸 알기에 아들과 대피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뒤 통화를 하는데, 가스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현장을 볼 수 없으니 답답했다. 친구에게 급한 대로 사진을 부탁했다. 아무래도 사진을 그저 친구들과 소통하는 수준으로만 촬영한 탓에 각도가 기울거나 크기 자체도 작게 촬영해 대상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결국 택시로 속초 시내까지 가겠다고 한 뒤 밖으로 나왔다.
▲ 고성산불 고성에서 4일 오후 7시 17분 발생한 산불이 속초 시내 미시령로 인근에서 화염을 느낄 정도로 접근해 왔다. 아파트 주변 하늘이 온통 저녁노을처럼 붉다. ⓒ 정덕수
하늘을 쳐다보니 양양에서도 속초 방향은 하늘이 붉게 보였다. 택시가 도착하자 곧장 속초까지 갔는데 동명항 근처에서부터 통제를 하는 걸 확인했다. 이때 속초시청에서 발송한 '안전안내문자'가 들어왔다.
"교동 교동택지, 럭키아파트, 명지미래힐, 현대아파트. 동부아파트 일대 주민들은 교동초교로 즉시 대피바랍니다."
친구를 만났으나 아들과 함께 나온 친구는 "차로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다"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걷기로 하고 우선 영랑호골프장이 내려다보일 위치를 찾아 이동했다.
▲ 고성산불 고성에서 4일 오후 7시 17분 발생한 산불이 속초 시내 미시령로 3435번지 인근에서 영랑호골프장 2번홀이 지척이다. 불길이 치솟는 게 바로 보였다. ⓒ 정덕수
▲ 고성산불 고성에서 4일 오후 7시 17분 발생한 산불이 속초 시내 동명동 고층아파트 사이로 불길을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다. ⓒ 정덕수
공설운동장 오거리에서 미시령로로 걷는데, 그곳부터 대피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시령로 3429번지 근방을 도착하니 매캐한 연기가 호흡조차 힘들게 했다. 아파트가 전면을 가로 막아 왔던 길을 다시 조금 이동했다. 이미 대피를 한 이들도 있고, 어떻게든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소방호스를 구해와 집과 주변에 미리 물을 뿌리는 이들까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이때 다시 속초시청에서 발송한 두 번째 문자가 들어왔다.
"금일 19:17분 산불발생 속초의료원, 보광사 일대 주민들은 중앙초교로 즉시 대피바랍니다"
영랑호골프장 2번 필드와 2번홀까지 불이 번져 타고 있었다. 누군가 여성 한 분이 이때 "잔디라서 그나마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벌써 여기까지 다 탔겠는데..."라 했다. 말 그대로 불과 3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불길은 잔디를 태우며 주변에 있는 조경수들로 옮겨 붙고 있었다.
▲ 불길에 휩싸인 골프장 영랑호골프장 2번홀까지 번진 불길이 잔디를 태우며 번져나가고 있다. 잔디에서는 더디게 불길이 번지지만 숲을 만나면 기세를 올려 불길이 치솟는다. ⓒ 정덕수
▲ 화염에 휩싸인 조경수 오랜 세월 정성들여 가꾼 영랑호골프장의 조경수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다. ⓒ 정덕수
▲ 보광사 방향 불길 낙산사가 전소된 기억이 다시 재현되는 것인가. 대단히 큰 불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하자 “저기 보광사 타는 거 같다”는 여성들의 외침이 들렸다. ⓒ 정덕수
이때 몇 명의 남자들이 소방호스를 구해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불길이 다가오는 걸 막으려 물을 미리 뿌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멀리 고층아파트 사이로 불길이 높이 치솟아 오르자 "아이구 저기 보광사 불 타는가 보네, 저 정도면 보광사 다 탔어! 저기 보광사 맞다! 맞어!"란 소리가 들렸다.
"중앙초교 대피장소 불가, 속초의료원 일대 주민들은 속초감리교회, 동명동성당으로 즉시 대피바랍니다."
불과 10여 분 지났을까. 중앙초등학교도 화재로부터 안전지대가 아니란 얘기다. 이때 누군가 뒤에서 "사람도 몇 명 죽었다나봐. 어떻게 해"라 했다.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서 속초방향은 영랑호를 낀 동명동 일대는 아파트 근처까지 불길이 접근한 걸 현장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보광사 근처에 치솟는 불길도 목격했다.
▲ 고성산불 화재현장 집 근처까지 불길이 접근하자 소방호스를 구해와 주민들이 직접 미리 물을 뿌리며 불길을 막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 정덕수
▲ 산불현장 주민의 자구책 화마가 지척에 이르렀음에도 물러서지 않고 물을 뿌리며 소중한 재산을 지키려는 속초시 동명동의 주민들. ⓒ 정덕수
보광사까지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처라도 가봐야겠다 싶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량은 모두 통제하기 때문에 현장 근처는 어디를 가더라도 걸어야만 접근할 수 있다.
얼마쯤 걸었을까. 문득 중앙초등학교 앞이란 걸 확인했다. 운동장에 몇 대 차가 주차되어 있고 1층엔 불이 환하게 밝혀진 걸로 미뤄 선생님들이 부랴부랴 학교를 지키기 위해 다시 나온 모양이다.
▲ 속초 중앙초등학교 속초시청에서 긴급하게 속초시민들의 대피장소로 지정했다가 화재현장에서 가깝고 자칫 화재로 피해가 우려되자 대피장소로 사용할 수 없다며 안내 문자로 통보했던 중앙초등학교. ⓒ 정덕수
밤이 깊어 소방헬기도 기동할 수 없다. 서울에서 급파되었다는 소방차와 전국의 가용 소방 인력과 장비를 투입한다고도 보도되고 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 '산불 진화, 군도 총력 지원'"이란 보도까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확인했다.
하지만 현장에 인력이 턱 없이 부족하고, 군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 '산불 진화에 날이 밝는 즉시 군도 총력 지원'"으로 보도됐다면, 현장에서 뉴스를 보며 발을 구르는 주민들은 그나마 덜 분노할 듯싶다.
날이 밝기 시작하면 소방헬기와 군병력도 동원되어 화재진압을 하리라 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양양과 다르게 속초는 보도처럼 강풍이 휘몰아치지는 않는다. 양양처럼 거센 강풍이 쉴 틈 없이 불어댄다면, 이 밤은 그야말로 잠만 깨면 아무렇지도 않을 악몽이길 바라야 한다. 부지런히 속초의료원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속초시문화회관 직원들 화재현장에 근접해 불을 끄고 미리 예방 차원의 물을 뿌리는 작업을 소방대원이 아닌 속초시문화회관 직원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다. ⓒ 정덕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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