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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Split)에서 로마시대의 흔적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다. 스플리트는 구시가의 골목길을 돌아설 때마다 신비스러운 역사의 자취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구시가 여기저기에 로마시대의 무너진 기둥들이 쌓여 있는 모습들은 나의 역사적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했다.

나는 황제가 살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Diocletian's Palace)의 황제 알현실에서 남쪽으로 더 들어갔다. 계단을 조금 오르자 황제 궁전의 주거공간이 한눈에 펼쳐졌다. 현재 황제의 주거공간은 아쉽게도 오랜 시간동안 훼손되어 건물터와 함께 벽돌기단 부분만이 남아 있었다.
 
건물터와 함께 벽돌기단 부분이 남아 있다.
▲ 황제 궁전의 주거공간. 건물터와 함께 벽돌기단 부분이 남아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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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마 황제 궁전의 주거공간은 성벽의 남쪽에 바로 닿아 있어서 바로 앞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현재도 남아 있는 성벽의 아치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스플리트 항과 리바(Riva) 대로, 아드리아 해의 장관이 한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전망을 가지고 있으니, 황제가 이 위치에 침실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명에 수긍이 갔다. 현재 황제의 침실 공간에는 성벽의 아치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로마 시대 당시에는 이곳에 침실의 화려한 창문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이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로마시대 당시, 성벽 아래에 현재의 리바 대로는 없고 아드리아 해의 바닷물이 바로 펼쳐지고 있었다. 아침에 황제 침실에서 창문을 열면 동쪽으로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아드리아 해의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주거공간을 둘러보다 보니, 마치 땅이 꺼지듯이 아래로 파 내려간 공간이 내려다보였다. 황제의 궁전의 지하공간인데 일부분은 지상으로 뚫려 있어서 바깥 공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지하공간에서 여행자들이 찬찬히 로마의 유적을 관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즉시 아내와 함께 이 지하궁전에 들어가보기로 하였다.

나는 다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페리스틸(peristyle) 광장 남쪽으로 내려와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꽤 경사진 계단을 내려가보니 뜬금 없이 거대한 지하 통로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났다. 어두움 속에 펼쳐지는 큰 공간감에 놀라게 되는 곳이다.
 
지하통로 양쪽의 상점들에서는 다양한 기념품들이 팔리고 있다.
▲ 지하통로의 기념품 가게. 지하통로 양쪽의 상점들에서는 다양한 기념품들이 팔리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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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하의 공간은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남문으로 통하는 지하통로였다. 원래 남문은 해안과 맞닿아 있었고 선박들의 정박지에 연결된 대문이었다. 그런데 로마시대 이후, 남문 앞 해변을 매립하면서 이제는 이 남문의 지하통로가 리바 대로와 연결되는 통로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지하통로는 대낮에도 너무 시원했다. 통로의 거대함 외에는 옛 로마시대의 영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어두움 속의 공간이 마치 로마시대로 나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지하통로에서 북적거리는, 수많은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로 인해 지하의 공간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지하통로에는 관광지의 느낌이 물씬나는 수많은 기념품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지하통로 양쪽으로 상점들이 위치해 있는데, 대리석 기념품, 공예품, 액자그림, 기념 자석, 산호 액세서리 등 다양한 물건들이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가게들보다 가격은 조금 더 비싼 것 같아서 눈으로만 구경하며 상점가를 통과했다.

천장도 높고 넓은 공간, 어두움 속 신비한 분위기, 왁지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곳에서 춤을 추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우리나라 TV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 여배우가 이곳에서 춤을 추던 모습. 평생 동안 따라다닌 여배우의 굴레를 벗어던지며 자유를 만끽하던 순간의 그녀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마도 빨간 상의를 입고 춤을 추고 있었을 거야. 크로아티아의 낭만에 취하고 이 지하통로의 신비함에 취해 있었던 것 같아."
"정말 왠지 춤이 추고 싶어지는 곳이네. 하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마음을 진정해야겠지?"


지하통로의 상점가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들어가자, 1960년에 발굴된, 로마 황제의 지하궁전 입구가 나왔다. 포드루미(Podrumi)라고 불리는 이 지하궁전은 발견 당시 고고학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건축물로 알려지며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어두운 지하궁전의 입구에 서 있는 철문을 보면, 마치 칙칙한 지하실이나 감옥의 입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스플리트의 이 대표적인 로마 유적은 오후 9시라는 꽤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고 입장료도 비싸게 받을 정도로 내부 유적이 값어치가 있고 자랑스러운 유적인 곳이다.
 
지하 궁전은 지상과 똑같은 크기로 설계되어 있다.
▲ 로마시대의 지하공간. 지하 궁전은 지상과 똑같은 크기로 설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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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마시대의 황제가 사용했던 주거시설의 지하공간으로 깊숙히 들어가보았다. 실제로 들어가기 전에는 지하에 있는 궁전인가 싶었지만 막상 보니 '궁전의 지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지하 궁전은 지상과 똑같은 크기로 설계되어 있어서, 로마시대 궁전의 규모와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하공간의 입구에서 보았을 때 왼쪽은 지하궁전의 광장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작은 방들로 갈 수 있는 통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왼편은 2/3 정도가 공개되고, 그 반대편은 1/2 정도가 공개되고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아직도 발굴 중이니 앞으로 이 땅 속에서는 무엇이 더 발견될 지 모를 일이다.

지하궁전의 광장 내부는 말끔히 정리되어 개방되어 있다. 공간과 벽면의 형태만 남아있어서 화려한 내부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아무 것도 없는 내부의 모습이 매우 웅장해 보인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아치형 천장과 굵은 기둥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1,700년 전 석재들이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맞추어져 있다.
▲ 지하궁전의 광장. 1,700년 전 석재들이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맞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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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1,700년이나 지난 건축물의 석재들이 신기하게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 시대에 사용되었던,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콘크리트가 천장과 기둥 사이를 고정시켜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보수공사도 해 왔겠지만 지하 궁전의 기본골격이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나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의 선진적인 건축기술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지하궁전의 전체 공간은 엄청나게 넓었다. 지하궁전의 공간은 너무 넓은 데다가 텅 비어 있어서 사전공부를 하고 오지 않으면 이곳이 무엇을 하던 공간인지 알 수가 없다. 지하궁전 입구에는 여러나라 언어로 된 설명판도 있는데 아쉽게도 한국어 설명은 없다.
 
역사유적 속의 현대미술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지하궁전의 전시. 역사유적 속의 현대미술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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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하공간 안에 가득했을 황제의 집기들은 모두 사라져서 그 당시의 찬란했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텅빈 공간이 막연한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이제 이 넓은 공간 내부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현대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옛 역사유적 속의 현대미술은 어두움 속에서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지하궁전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스핑크스 한마리가 놓여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스핑크스 한마리가 놓여있다.
▲ 지하궁전의 스핑크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스핑크스 한마리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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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지을 당시 이집트에서 잡아왔다는 12기나 되는 스핑크스들 중의 한 기겠지? 스플리트 곳곳에 스핑크스가 흩어져 있는데, 우리는 스플리트를 여행하면서 총 3마리의 스핑크스를 찾은 거야."

검은 돌로 만들어진 스핑크스는 역시나 머리가 잘리고 앞다리도 잘려나간 상태이다. 몸통 부분도 부서졌다가 다시 이어붙인 모습이다. 기독교도들이 이교도의 석상을 어떤 모습인지 알 수도 없게 난도질을 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스플리트까지 잡혀 와서 몸통만 남은 스핑크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황제가 이 궁전에서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흉상. 황제가 이 궁전에서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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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궁전의 중심이 되는 방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흉상이 밝은 조명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흉상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은퇴 후 여생을 이곳 스플리트에서 살려고 궁전을 지었지만 이 궁전에서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넓은 공간 안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 무너진 벽돌 너머에는 또 어떤 역사들이 숨어 있을까? 나는 어두움 속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빈 방들을 긴장감을 가지고 돌아보았다.

로마시대에 지하궁전의 가장 넓은 광장은 연회나 회의 시에 사용되고, 작은 방들은 식당과 방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하궁전의 한 방에는 유적조사 중 발굴된 로마시대의 오래된 나무기둥이 수평으로 전시되어 있다.

지하궁전 건축 당시 골조로 쓰이면서 현대의 H빔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나무기둥이다. 이렇게 소중한 유물이 방의 중앙에 너무 허술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손상되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도 생긴다.
 
지하궁전 건축 당시 골조로 쓰이던 나무기둥이 전시되어 있다.
▲ 로마시대의 나무기둥. 지하궁전 건축 당시 골조로 쓰이던 나무기둥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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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저방 다니다 보니, 중세시대에 올리브를 짜던 방이 나왔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시대의 지하궁전은 와인이나 올리브유 제작소, 저장고, 식량창고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흔적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 지하궁전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이곳에서 와인이나 곡식을 어떤 방식으로 보관했는지 등을 알려주는 조그마한 영어설명문들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궁전 내부는 발굴이 진행 중이어서, 아직 흙이 무너진 곳도 있고 석재를 따로 빼둔 곳도 있다. 동그란 구멍이 뚫린 네모난 석재는 지하궁전에 흐르던 수로를 감싸던 석재 배관이다. 지하수로가 이용되었을 당시에는 이 석재들이 일렬로 이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분리되어 각각의 석재 유물로 전시되고 있다.

그 옆에는 로마시대의 목욕문화를 알려주는,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던 방이 있다. 로마시대 당시 스플리트 외곽의 석회암 바위산에서 힘들게 구한 물이 석재 배관의 수로를 통해 궁전까지 소중하게 연결되었고, 이 물은 다시 이 목욕탕에 공급되었을 것이다. 로마시대의 과학적인 수로 시스템은 다시 한번 여행객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국적인 종려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지하궁전의 지상구역. 이국적인 종려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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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궁전에는 지상을 항하여 시원하게 뚫려 있는 부분도 있다. 이곳은 햇빛이 쏟아지고 있어서 지상궁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국적인 종려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엄청나게 맑게 빛나고 있었다. 고대 스플리트의 주민들은 이토록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지 궁금해졌다.

나는 지하궁전을 나와 청동의 문이라고 불리는 남문으로 향했다. 바다를 향해 있는 남문은 원래 바다와 맞닿아 있던 문이다.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배를 타고 왕래했던 문. 대문을 나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바다는 어떤 감흥을 주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남문을 통해 리바 대로로 나오자마자 스플리트의 소문난 젤라또를 먹기로 했다. 나는 종려나무 가로수 밑에 놓여진 벤치에 앉아 말랑말랑한 젤라또를 아내와 함께 먹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 아드리아 바다는 어제와 같이 계속 빛이 나고 있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앉아 한낮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 노천카페의 휴식. 수많은 여행객들이 앉아 한낮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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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로마의 시간에 멈춰 있는 듯한 정적인 장면 속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바닷가 노천카페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정겨운 노부부들도 자리에 앉아, 커피 한잔으로 여행의 피로를 달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수많은 여행객들이 햇살을 즐기며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스플리트, #스플리트여행, #지하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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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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