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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7일 연구소 회의실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왼쪽부터 김용만님, 장향미님, 상임활동가 이나래, 김미숙님.
 지난 3월 17일 연구소 회의실에서 대담을 진행했다. 왼쪽부터 김용만님, 장향미님, 상임활동가 이나래, 김미숙님.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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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참여 유가족 : 장향미(ST유니타스 고 장민순씨 유가족), 김미숙(태안화력 고 김용균씨 유가족), 김용만(군포 토다이 현장실습생 고 김동균씨 유가족)

* 진행 : 이나래 (상임활동가)
* 기록 : 박기형 (상임활동가)


하루 5~6명의 노동자가 죽는 나라. 감춰지거나 혹은 밝힐 수 없는 노동자들의 죽음은 훨씬 많을 거라 짐작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신년사에서 안전, 특히 산업재해 예방에 정부가 정책 역량을 집중할 계획임을 거듭 강조했다. 2022년까지 산재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하며 자살예방, 교통안전, 산업안전 등 3대 분야를 국민생명 의제로 설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일 노동자 사망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한 시인은 얘기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한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그만큼 사회안전망은 허술하고, 노동자의 건강권은 침해 당하기 일쑤다. 일하다 세상을 떠난 노동자의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한다.

더군다나 유가족들의 존재는 더욱 흐려진다. 그러나 여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높여 사회를 바꾸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 유가족들이 있다. 지난 3월 17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3명의 유가족과 함께 가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부터 최근 유가족 모임을 만들기까지의 경과를 이야기 나눴다.

장향미씨는 과로자살로 하나뿐인 동생을 2018년 1월에 3일에 잃었다. 웹디자이너였던 동생 민순씨가 다닌 회사는 온라인 교육 서비스 기업인 ST유니타스로 회사 이름보단 '공단기'(공무원단기학교), '자단기'(자격증단기학교) 등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동생이 죽기 전 회사를 다니며 힘들어했던 것을 떠올리며 동생의 죽음이 회사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 장향미씨는 서울남부지역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를 찾아갔다.

함께 자료를 모으고 분석한 결과 동생의 죽음에 장시간 노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 고인의 교통카드 기록을 토대로 분석한 대책위에 따르면 2015년 5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법정한도인 12시간을 넘겨 연장근로를 한 주가 35.7%였고, 하루 12시간을 넘겨 일한 날이 18%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생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장향미씨는 직장 동료, 퇴직자 30여 명을 직접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모두 회사의 야근문화를 지적했다. 동생은 죽기 전 가족들에게 회사의 야근 근절을 바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결국 대책위의 6개월 간 싸움으로 회사의 책임 인정과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밥먹듯 야근하다... 사람이 죽었다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일하다 자살한 웹디자이너 고 장민순 씨의 유가족이 <장시간노동을멈춰라>플래시몹에 참여하여 발언하고 있다.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일하다 자살한 웹디자이너 고 장민순 씨의 유가족이 <장시간노동을멈춰라>플래시몹에 참여하여 발언하고 있다.
ⓒ 공인단기스콜레디자이너과로자살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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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IT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이 업종이 야근을 많이 해요. 만연한 상황이죠. 그렇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어요.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새벽 3~4시까지 일해요.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5일 중 3일은 야근을 해요. 그런데 야근해도 똑같이 오전 10시에 출근해야 하고요. 야근 수당도 없어요. 포괄임금제거든요. 그러다 보니 거의 최저임금 수준을 받기도 하고, 실제 일 한 시간 대비 따져보면 그거보다 못할 수도 있어요.

동생이 죽은 건 2018년 1월 3일인데, 죽기 한 달 전에 일이 있었어요. 동생이 힘들다는 얘기를 잘 안하는 성격이거든요. 부모님과 언니인 제가 걱정 할까 봐요. 처음부터 야근이 심해서 그때 그만두라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급성장하는 회사였고 신입이 아니니 압박이 심했던 거죠. 업무도 갈수록 늘어났고요. 반면 업무 체계는 없었어요. 처음부터 그만두라고 했지만 1년도 채 안 다니면 평가가 안 좋을까봐 걱정을 했죠.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일이 힘드니 건강 상태가 나빠졌어요. 불면증에 스트레스로 밥도 못 먹어서 살도 급격히 빠졌고요.

기억나는 건 죽기 전 11월 한 달 동안 동생 얼굴을 평일에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12월 첫 주에 펑펑 울면서 일이 너무 많다고 대성통곡하는 거예요. 동생이 그렇게 우는 건 처음이었어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부모님이 있는 자리에서 울었어요. 너무 놀랐죠."


김용만씨는 아들을 2016년 5월 떠나보냈다. 현장실습으로 나가 6개월째 일하던 식당 조리실 일이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군대에 가겠다고 말한 뒤 출근한 아들 동균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2016년 5월 7일 외식업체 음식창고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성화고 전공은 인터넷쇼핑몰이었지만 정작 현장실습을 나간 곳은 전공과 무관했다. 하루 10시간 넘게 일한 날이 흔했고, 소위 막내에게 주어지는 괴롭힘 때문에 출근 전보다 더 일찍 나와 잡일을 해야만 했다. 성희롱도 있었다. 그렇게 아들은 장시간 노동과 괴롭힘에 시달렸다. 직접 발로 뛰며 증거들을 찾아냈고, 5개월 만에 회사와 가해자의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제 아들 동균이가 한국 토다이 분당점에서 일하다가 뛰쳐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저 혼자 3~4개월 정도 힘들게 싸웠죠. 시민단체도 만나고, 전교조나 민주노총과 힘을 합쳐서 매주 수요일마다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6개월 정도 했어요. 1인 시위도 회사 앞에서 했죠. 1년 10개월가량 진행했습니다. 제대로 진상규명되지 못했어요. 사과 한 마디 받아본 적도 없어요.

사측과는 협의가 돼서 끝났지만, 과제가 남았죠. 현장실습생 홍수현양, 이민호군 등이요. 그때 싸웠을 때 좀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제 아들은 인터넷 쇼핑몰을 전공했어요. 자격증과 특허를 5개씩 땄죠. 학교는 실적 때문에 전공이 다른 곳으로 내보냈어요. 회사는 인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겠죠. 실습 전에 학교 선생님과 상담했는데 대기업이라 대우가 좋을 것이라고 했대요. 또 선생님은 교장·교감의 압박을 받기도 했겠죠."


"대우가 좋을 거라 했는데..." 떠나버린 아들

김미숙씨는 작년 12월 11일 아들을 떠나보냈다. 아들 용균씨는 일을 하던 중 죽었다.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 이상을 확인하다 기계에 끼여 사망했다. 평소에도 위험한 작업을 해왔지만 사망 당시 혼자 근무를 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자기가 자비로 산 손전등에 의지해 다녔던 것이 사고 이후 CCTV를 통해 밝혀졌다.

김용균씨는 태안 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서부발전의 사내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의 노동자였다. 하청 노동자였다. 취업은 쉽지 않았고 어렵게 구직활동을 한 끝에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직장이 되어 버렸다.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싸움이 시작됐다. 진상조사와 재발방지책을 약속 받지 않고는 장례를 치를 수 없었고 결국 당정과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었다. 더불어 김용균씨의 죽음과 싸움을 계기로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용균이도 학교에서 견학 가면 전공이나 원하는 것과 맞지도 않고 현장 상태가 안전하지 않다고 했는데, 피해서 간 게 태안화력발전소였어요. 교수들은 취업률을 목표로 여기저기 알선해줬죠. 사실 전 안전하지 않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나보다는 낫겠지 하고 보냈어요.

취업하는 것 때문에 걱정도 되고, 그런 상태에서 애가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상태가 됐죠. 동료들도 위험하더라도 취업하기 힘드니깐 여기서 버티다 경력 쌓아 이직해야지 생각했을 텐데 결국 다치게 되죠. 현장에 30대가 없고 아주 많거나 어리거나, 비슷한 또래들이 많았다고 했어요. 자기가 위험한지 모르고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죠. 그냥 여기는 당연히 그렇게 일하는 곳인가 보다 생각했던 거예요."

 
 2019년 2월 9일 열린 고 김용균 노동자의 노제
 2019년 2월 9일 열린 고 김용균 노동자의 노제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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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재 유가족에게 사건 발생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걸로 예상돼요. 실제 가족의 죽음 이후 가장 어려우셨던 점이 무엇이었나요?
장향미 :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요.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유가족들에게 있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책임은 회사에 있는데 회사가 아니라 유가족이 입증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회사가 자료를 다 가지고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뿐이에요. 제가 자료를 요청할 때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이지 회사랑은 관계없다고 얘기하기까지 했어요."

김용만 : "저희도 그랬습니다. 경찰이 우울증이 있는지 의료기록을 확인해 오라고 했어요."

김미숙 : "여기 회사도 용균이 잘못으로 죽었다고 말했어요. 가지 말라는 곳 갔고 하지 말라는 것 해서 죽은 거라고요. 그런데 회사 동료들은 이상 신호가 발생하면 무조건 고치러 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얘길 듣고 회사 사람들이 용균이 잘못으로 돌리려고 하나보다 판단했죠. 사회 시스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직접 일하는 장소도 가봤죠. 현장 상태가 너무 열악했어요. 탈의실부터 모든 경로 다 가봤죠. 회사는 부검 관련해서도 술이나 약물 등을 문제 삼았어요. 회사가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고 했던 거죠."

"회사는 개인의 문제라고... '관계없다'고..."
 
- 여기 계신 분들의 경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책위원회도 꾸려지고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이 함께 힘을 모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도움이 되었나요?

김미숙 : "힘 있게 갈 수 있었던 점이요. 저 혼자만이 아니라 100개 넘는 단체가 함께 했어요. 사회 전체의 문제, 비정규직과 안전 문제에 대해 발언할 때마다 도와달라고 호소했죠. 사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비정규직이잖아요. 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힘 있게 할 수 있었어요."

김용만 : "혼자서 시작했어요. 여기저기 찾아다녔죠. 가정이나 개인의 잘못이라고 하는데, 증거를 찾아서 입증해야겠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동료들 입단속을 시켰더라고요. 6~7월까지 증거 수집하러 혼자 다녔어요. 언론에 알리려고 했는데 자살 사건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기피하더라고요. 조그맣게 대책위가 생기면서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내가 죽더라도 이거는 해야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서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가정과 다른 사람들의 삶이 파괴됐어요."
  
- 산재 유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정부와 사회의 지원은 무엇이라고 보세요?
장향미 : "산재 신청의 문턱이 높아요. 입증자료 모으는 것부터가 힘들죠. 회사가 순순히 내주지 않거든요. 저희도 법원에 증거보존신청, 판결까지 받아서 받아냈어요. 그런데도 회사가 불성실하게 자료를 줬죠. 법적 강제력이 없어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죠. 어떻게든 은폐시키려고 해요. 법적 강제력 없는 상황에선 자료를 확보하는 싸움이 불가능합니다. 개인 대 조직의 싸움이기 때문이죠. 대책위와 함께할 수 있어서 가능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유가족이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포기해요. 그런데 자료를 모아도 문제예요. 추가 자료요청, 진술요청, 자료보관 등 산재 판결이 날 때까지 죽음을 안고 있어야 해요. 경제적 문제를 떠나서 이게 끝나지 않으면 일상으로 돌아가지를 못해요. 오래 걸리는 산재승인 기간문제도 있죠. 그리고 무엇보다 유가족의 싸움이 산재인정 여부나 개인보상 차원의 문제로 여겨지고, 그러다 돈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유가족에 대해 비난이 가해지기도 해요."
 
 건설노동자가 가장 많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산재 신청의 문턱이 높아요. 입증자료 모으는 것부터가 힘들죠. 회사가 순순히 내주지 않거든요."
ⓒ 전국건설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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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 : "서로가 자책하게 돼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거기만 안 보내면 되었는데, 그만두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또 했는데도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러 생각이 들어요. 치유는 그냥 되지 않아요. 법 제도가 바뀌고 개선되는 상황을 봐야 치유가 되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고, 죽은 사람이 헛되이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죠."

김용만 : "죽을 때까지는 고통 속에서 가슴 아파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변화 없이는 그런 상황이 반복될 거잖아요. 그걸 지켜보기 힘들어요. 나 혼자보다는 같이 뭉쳐서 해결해나가고 싶어요. 사실 삶 자체도 피폐해졌습니다. 저도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자요. 1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어요."

- 유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이 같은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어떤 게 필요할까요?
장향미 : "정부도 문제의식을 점차 가지게 되는 중인 것 같아요. 사실 개인의 문제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약한 사람만 있는 걸까요? 사회구조적 문제죠. 자살자 한 명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은 평균 8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에 따른 여파가 있을 거란 거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케어를 해줘야 해요. 하지만 현재로는 없죠. 지자체에서는 연락을 취하고 매뉴얼을 갖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초반이라 배려 없이 기계적으로 할 뿐이고, 유가족 입장에서는 와닿지 않아요."

김미숙 : "사람 목숨값이 제일 싼 거로 취급되잖아요. 영국처럼 강력하게 기업을 처벌하는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용만 : "교육부의 개악안으로 그동안 요구해온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폐지 노력이 물거품이 됐어요. 다시 요구해야 합니다. 사실 공공기관의 정책을 신뢰하기 어려워요. 유가족, 시민단체, 전문가 등의 참여 하에 바꿔나가야 해요."

"치유는 그냥 되지 않아... 법제도 바뀌어야"

- 장향미씨는 과로사·자살 유가족 모임에 참여하고 계시고, 다른 두 분도 얼마 전 출범한 산업재해, 현장실습 유가족 모임에 함께 하고 계시는데요.
장향미 : "일본 과로사, 과로자살 모임에 참여했던 연구자분이 주도해서 유가족들과 연락이 닿게 되어 모임이 결성됐어요. 우리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회사와 어떻게 싸워나가야 하는지 배워나가 다른 가족들은 시행착오를 안 겪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유가족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에요. 일련의 절차와 노하우, 쟁점 등을 다룰 생각입니다. 누구도 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죠. 일본은 유가족 모임이 지속되면서 과로사 방지법까지 만들어냈어요. 향후엔 이를 한국에서도 실현해 보고 싶은 바람이에요."

김미숙 : "힘을 모아서 싸워나가야 해요. 법제도를 개선해나가는 것조차 유가족들이 나서지 않고서는 못해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유가족들이 뭉친다면 사회적 목소리도 커질 거라 생각해요."

김용만 : "들불처럼 번질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 산재사망 유가족 모임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사회를 바꾸기 쉽지 않을 거예요."

-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 전해졌으면 하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미숙 : "인식의 변화, 법제도 변화, 노동과 안전에 대한 생각이 전환되어야 해요. 사회가 안전하게 되려면, 상생하며 우리의 삶이 윤택해지려면, 우리가 나서야 해요. 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있고, 기업이나 정치인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잖아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예요."

장향미 : "정부도 기업도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해서 경제가 안 좋아진다고 하는데요. 그런 논리면 소위 선진국들은 다 경제위기에 처해야겠죠.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려고 하는 건 기업의 입장을 반영하는 거예요. 출산율이 낮아져서 위기라고 하는데 안전하지 않은 나라에서 누가 아이를 낳고 싶겠어요. 자살률, 산재사망률 높은 이유가 뭔가요. 해결 방법을 1차원적으로 접근하면 안 돼요."

김용만 :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유가족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싸워나간 것처럼 같이 일어설 수 있어야 해요. 생업에 쫓기다 보니 힘들겠지만, 당사자들이 힘들더라도 서로 다독여주며, 서로 연락을 해서 뭉치고 연대를 해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부-노동자-기업이 상생해서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해요."

② "형의 이름을 밝히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회에서 작성하였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4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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