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8일 영화 감독 '아그네스 바르다'가 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펐다. 때로 일면식도 없는 이의 죽음이 사무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실은 좀 당황스러운 순간인데, 나로서도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아그네스 바르다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가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보고서야 그에게 흠뻑 빠진 나로서는, 죽음이 이다지도 애석하게 느껴지는 것이 좀 면구스럽기도 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매혹당한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영화를 만들기도 한 아그네스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이란 뜻의 1950~60년대 프랑스 영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인 아그네스는, 사진 예술을 하다 영화로 전향해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소재 하나하나를 다루는 독특함도 아직 죽지 않은 그녀의 '누벨바그' 정신일지 모른다. 아그네스는 88살의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창발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증손자벌인 JR과 놀라운 케미를 발휘하며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공동 제작했다. 정처 없이 여행하다 만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영화 전반에 따뜻하게 녹아 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반한 이유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포스터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 내가 가장 매혹당한 부분은 약 8층 높이로 쌓아 올린 컨테이너 전시물이었다. 항만 노동자들을 찾아간 아그네스와 JR은 현장에 여성 노동자가 없다는 사실에 착안, 항만 노동자들의 아내를 작업에 불러들인다. 그녀들이 지닌 항만 노동자에 대한 연대감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들의 노동 속에 가시화되지 않는 아내들을 대형 사진으로 제작해 새긴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아내들이 새겨진 사진 중 흉부 부분을 창문처럼 열어 젖혀, 그곳에 아내들을 앉히고 세상을 조망하게 하는 장면은, 장엄함과 함께 충격적인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그녀들이 가슴을 활짝 열고 곧 새처럼 비상할 것만 같다. 이토록 도발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벌이는 아그네스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발 닿는 대로 여행하며 게릴라 전시물을 제작하던 아그네스는 마지막 여정으로 옛 친구 '고다르'를 찾아가기로 한다. 긴 기차 여행 끝에 다다랐지만, 고다르는 아그네스를 만나주지 않는다. 자신의 집 유리창에 암호 같은 메시지를 남겼을 뿐이다. 이제 서로 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아그네스는 고다르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다. 왜 고다르가 아그네스를 만나주지 않았을까를 곰곰 생각하고 있는데, 영화를 같이 본 딸애도 그 부분이 이상했던지, 이유를 물어왔다.

차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90을 넘었거나 목전에 둔 노인의 무상함을 17살의 딸에게 이해시키키란 어려웠다. 고다르는 아그네스와 함께 '누벨바그'의 거장이었다.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밤새 그를 논했을 그들의 화양연화는 사라지고 없다. 이제 사랑도 영광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로서 족하지 않을까? 한때는 모든 것이었지만 이제는 덧없는 시간들을 서로의 기억 속에 담근 채 재회한다는 것은, 어쩌면, 싱싱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을 '과거'로 박제시키는 일과도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파헤치지 않고 그대로 두고 떠날 흔적 한 두 개쯤, 남겨두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살날이 많지 않은 노인이라면 더더욱.

닮고 싶은 '노인성'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사진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사진 ⓒ 영화사 진진

  
나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속 아그네스를 보며 노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나이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JR과 세대 간 차이 혹은 사유의 차이가 드러나면, 다툴 때는 치열하게 그러나 유연하게 대처하며 협상하는 그의 모습은, 약하기만 하거나 너그럽기만 하기로 '타자화된 여성 노인성'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아그네스는 점점 나빠지는 시력 때문에 작업이 힘들기도 하고, JR의 재기발랄함이 치기로 보이기도 한다. 작업 중 뒷방늙은이 취급이 얼떨결에라도 엿보일라치면, 그 싸가지 없음을 서슴치 않고 짚어 제동을 건다. 노인인 자신을 함부로 동정하게도 지나치게 존경하게도 두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멋진,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노인을 나는 한 분 더 알고 있다. 다큐멘터리 <데스메탈 할머니> (미국, 2018, 리 갈렌트 감독)의 주인공 '엥게' 할머니다. 97세인 그는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대거리하고, 호령하고, 영감을 주고, 랩을 한다. 엥게는 '스위스 갓 탤런트'에 출현해 그녀가 쓴 가사로 만든 랩을 선보인다. '할머니 랩퍼'는, 누가 랩을 젊은이와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하냐는 듯, 독설로 가득 찬 랩을 던지며 근사한 랩퍼의 자질을 과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97세 엥게의 노쇠함을 감추지는 않는다. 떨며 빗질과 화장을 하는 손과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엥게가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 출연해 가사를 까먹어 예선에서 떨어지는 장면도 보여 준다. 카메라가 불운으로 시름맞은 노인과 그를 응원하는 주변인을 비출 거라 예상한다면, 영화는 그 예상을 가볍게 배신한다. 엥게는 가사를 까먹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주위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느라 호들갑떨지 않는다. "나는 살아있고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는 엥게의 말은, 그녀의 존재 방식을 그대로 설명한다.
 
닮고 싶은 이 할머니들의 모습은 그 대척점에 있는 내 엄마를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평생 우울증 약을 먹으며 살아온 엄마에게 나는 '생명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늙어서 아무 것도 못한다"며, 언제나 늙음을 방패삼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이해해야 하는 일도 쉽지 않다. 무기력한 내 엄마의 노인성을 보다, '죽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것'임을 보여준 바르다와 엥게의 '주체적 노인성'은 나를 각성시켰다.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한 장면.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한국에서 노인은 (여성 노인은 더한데) 대체로 동정의 대상이다. 비 오는 날,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에게 아이가 우산을 씌워주는 행위를, '불쌍한' 할아버지를 배려한 훌륭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는 어린이 이야기책을 읽고 착잡했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률이 가장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난'한 노인이 많다고 해서, 모든 노인이 '불행'한 것만도 '불쌍'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또 불행한 노인이면 동정 받는 것이 당연한 걸까? 늙었다고, 가난하다고 동정 받고 싶은 자, 그 누구일까?
 
'늙음'에는 층위가 다양하다. '꽃할배', '꽃할매'로 호명되는 새로운 노년이 각광받고 있다. 젊은이도 혀를 내두를 패션 감각을 선보이거나, 운동, 만화, 노래 등 각자의 취미를 살리며 젊은 감각을 유지한다. 이들 신노인의 출현은 100세를 살아야하는 새로운 생애주기가 탄생시킨 진화 혹은 고안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내 엄마에겐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가능하지 않은 삶이 어떤 노인에겐 실제 상황인 것이다. 가끔 이런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신노년'이 노인의 새로운 지평을 염과 동시에 정체된 노인을 더 기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이렇게 잘 해내는 노인도 있는데 당신은 왜 방구석에 처박혀 있죠?" 하며.

어찌 보면 신노년의 등장 또한 늙음을 동정의 대상으로 추락시키는 통념에 대한 저항 또는 부정의 발로인지 모른다. 우아하게 멋지게 늙으라는 자기 계발서 역시 억울하면 죽을 때까지 노력하라는 말이다. 모두 건강하게 품위있게 늙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듯이, 이런 노인 저런 노인이 있다. 차이가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된다. 늙으면 지혜가 당연히 생기고, 그 지혜가 너그러움을 낳고, 그 너그러움으로 존경을 받는 노인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아그네스와 엥게는 "'늙는 것은 그저 삶의 한 과정'일 뿐이고, 늙는 과정엔 적지 않은 실패와 좌절이 따르게 마련이고, 이 또한 인생"이라고 솔직히 말한다. 노력하면 지혜와 관용, 품위를 탑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기계발서가 늙음의 실체를 가리는 것처럼, 불쌍한 노인성만이 노인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반짝임과 총명함이 바래진 노년이지만, 그로서도 잘 살아낸 아그네스 바르다의 삶에 단정한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다. 어쩌면 벌써 떠났을지도 모를 엥게께도.
야네스 바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노년 노인성 신노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