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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구미 고향집에 내려가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났다. 몇 년 전부터 고향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설렜는데, 그건 부모님을 보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 어린 조카, 올해 다섯 살이 되는 지호를 보는 일 때문이다.

사역과 학업을 했으므로, 해마다 명절 때만 겨우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호는 볼 때마다 훌쩍 자라나 있었다. 그의 키가 한 뼘 자랐다면, 말할 수 있는 어휘는 두 뼘, 그 이상 성장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지호는 단어만을 간신히 말했다. '샤쟈', '호량이', '벙아리' 같은 좋아하는 동물들.

올해 지호는 놀랍게도 온전한 문장을 말했다. (식사 시간에) "외샴쵼, 밥 묵어",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외샴쵼, 핸드퐁 샤진 봐". 그 말이 정말 귀여워서 이 사랑스러운 요청을 나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은 다음, 나는 방으로 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호가 뒤뚱뒤뚱 걸어 내 방 문을 연다. 그리고 내 책상으로 와 말한다. "외샴쵼, 모해?" "책 읽어" 내 대답을 들었는지, 아니면 관심없는지 지호는 옆에 있던 내 노트북에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가냘픈 손가락으로 내 키보드의 알파벳을 가리키며 따라 읽는다. "E, F, G, H, I …" 한참을 알파벳순으로 잘 읽어가다가 갑자기 멈춘다. 나는 다음 알파벳이 기억이 안나나 했는데, 지호는 곧이어 말한다. "어? 쩨이(J) 어디 갔나?" 하여간 귀엽다.

지호의 어휘가 더 자란 증거는 또 있는데, 이번에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아이는 노트북 옆에 있던 내 펜을 가져가더니 거실로 달려갔다. 뭘 하려나 봤더니, 하얀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고 있던 것이다. 너무 놀라서, 나는 가족을 불렀다. "지호 글 쓴다!" 온 가족이 하던 일을 멈추고, 거실에 있는 지호에게로 왔다.

아이는 웅크린 채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글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동생(지호의 엄마)에게 물었다. "지호 저번에도 글 썼어?" "아니, 지호 글 쓰는 건 오늘 처음이야!" 동생은 휴대폰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으며 대답했다. 지호는 무슨 글자를 썼을까.

아이는 글을 다 쓴 다음, 일어서서 동생에게 안긴다. 우리 가족은 함께 몰려들어 아이가 쓴 글자를 봤는데, 보자마자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산동할인마트"
 
다음날, 지호는 블럭을 이용해서 산동할인마트를 만들기도 했다.
 다음날, 지호는 블럭을 이용해서 산동할인마트를 만들기도 했다.
ⓒ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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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지호 산동할인마트 홍보대사 하게 해라" 아버지는 "지호야 내일 우리 사진 찍어서 산동할인마트가서 보여주자" 나는 엄마에게 질문했다. "왜, 지호가 산동할인마트를 좋아해?"

어린이집에서 지호를 매번 데려오는 건 아버지(지호의 외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매일마다 아버지는 집으로 오는 길에 산동할인마트에 들러서 지호가 좋아하는 초코송이 과자를 샀다. 아마 아이는 그 기억으로 단어를 적었을 것이다.

자기 이름보다, 좋아하는 동물보다, 더 선명하게 새겨진 그 순간의 감정. 아이는 이렇다. 늘 사소한 것에서 온 힘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어떻게 이렇게 행복해 할 수 있을까, 나는 의문하지만, 그때마다 아이의 행복한 웃음은 나의 의문을 덮어버려서, 나는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지호는 웃을 때와는 정반대로 슬퍼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물을 떨군다. 무심코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뚝뚝 눈물이 흐르고, 환하던 인상은 일그러진다. 무엇이 이리도 슬픈 걸까.

나도 따라 아이의 눈물에 서글퍼지려고 할 때, 나는 아이를 들어 안는다. 눈물로 어깨는 축축해지고, 아이의 낙엽잎같은 손이 내 등에 가볍게 얹힌 것을 나는 감각한다. 이렇게 울다가도, 금방 몰라보게 환한 얼굴로 물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는, 평화를 생각하며. 

이 다섯살배기 아이에게 나는 배운다. 평화를. 사소하고 별일 아닌 것에서 행복해하고 슬퍼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로운 마음이라고.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마음이기에 작은 것에서 깨끗하게 슬퍼하고, 그래서 슬퍼한 뒤에도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환하고 밝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이 부드럽고 연한 마음이 평화를 닮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 지호는 낙엽잎같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외샴쵼 빠빠이" 나는 지호를 따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호는 여전히 산동할인마트를 적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글자를 적을 수 있게 되었을까. 오늘은 울지 않았을까. 다시 온 힘을 다해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을까. 지금도 여전히 평화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우리 가족에게, 나에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평화를.
 
평화는 이처럼 가만하고 고요한 마음에서 오는게 아닐까.
 평화는 이처럼 가만하고 고요한 마음에서 오는게 아닐까.
ⓒ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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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평화,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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