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화로운> 영화 포스터

▲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 포스터 ⓒ 꾸러기스튜디오


맥북을 사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시나리오를 쓰는 게 꿈인 영화감독 지망생 영준(손이용 분). 어느 날, 중고거래 사이트에 시세보다 싸게 판매하는 중고 맥북을 보고 급한 마음에 입금부터 한다. 곧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나 상대방은 연락을 끊어버린 상태다. 사기를 당한 돈을 되찾기 위해 경찰에 하소연하나 절차는 복잡하기만 하다. 영준은 사기꾼을 직접 잡기로 마음을 먹고 사기꾼 조직이 있다는 중국으로 향한다.

<아바타>(2009)를 패러디한 <숫호구>(2012), <불을 찾아서>(1981)를 연상케 하는 <시발, 놈: 인류의 시작>(2016)으로 백승기 감독은 독특한 영화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스타일은 독립적인 제작 방식, 초저예산, 기발한 상상력, 황당무계한 코미디란 표현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감독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영화는 'C급 무비'다.

C급 무비는 A, B급 무비의 아래 등급이 아니다. A, B급 무비보다 작은 규모나 나름의 '새로움'을 찾겠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부족한 여건 아래에서 만들었을지언정 절대로 창피하지 않다는 '의지'도 감지된다. 그렇다면 백승기 감독이 생각하는 C급 무비는 무엇일까? 그는 C급 무비를 주변의 것을 이용하여 누구든지 쉽고 재미있게 영화를 만들고 즐기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C급 무비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매커니즘인 캠코더(camcorder)로 촬영해서 컴퓨터(computer)로 편집하고 사이버(cyber)를 통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하는 코믹(comic)하고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시네마(cinema)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알파벳 C와 모든 과정이 비교적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의 급할 급(急)을 합성한 단어다."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꾸러기스튜디오


백승기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 <오늘도 평화로운>은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나 영화에선 다루지 않던 '중고 거래 사기'를 소재로 삼았다. 내용은 사기꾼 일당을 모조리 응징하는 복수의 서사로 많은 중고 거래 사기 피해자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제목은 국내에서 가장 큰 중고 거래 사이트인 네이버 '중고나라'에서 거래와 관련하여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질 적에 네티즌들이 조롱으로 쓰는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에서 가져왔다.

영어 제목은 <숫호구>의 '슈퍼 버진(Super Virgin)',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의 '슈퍼 오리진(Super Origin)'을 잇는 '슈퍼 마진(Super Margin)'으로 붙였다. 이것은 중고거래 사기를 친 입장에서 '개이득'이란 의미가 되고, 사기를 당한 영준 입장에선 사건을 해결하며 성장하였기에 '개이득'이란 말도 된다.

<숫호구>와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비현실적인 색채가 강했다. 감독 자신이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한 경험담을 투영한 <오늘도 평화로운>은 현실에 맞닿는다. 영준이 목공일을 하는 작업장 소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빛난다.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꾸러기스튜디오


소장은 "자네 어쩌다가 이 일을 하게 됐어?"라고 물으면서 초등학교 교사, 9급 공무원, 대기업 대리 등이 좋은 직업이라고 권유한다. 영준은 자신 있게 "저 이 일 적성에 맞고 딱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사는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을 되찾은 백승기 감독의 솔직한 고백이다.

백승기 감독은 사기를 당하기 직전에 기대했던 관객 수에 미치지 못한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의 실패와 차기작에 대한 고민으로 슬럼프를 겼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중고 거래 사기까지 당한 것이다. 사기를 당한 후, 백승기 감독은 SNS에 두 줄 분량의 시놉시스와 함께 이 영화를 너무 만들고 싶다는 사연을 올렸다. 그러자 기적처럼 70여 명의 스태프와 배우를 얻으며 <오늘도 평화로운>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백승기 감독은 150만원을 잃었지만, 대신에 함께하는 '커뮤니티(Community)'란 개이득을 얻었다.

"10년 넘게 영화해온 이유가, 공동 작업이잖아요. 제 고향 인천이나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발견해서 보여주는 작업이 재밌어요. 다 같이 만들고 개봉하며 우리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맛도 있고요." - 2019.3.30. <중앙일보> 인터뷰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꾸러기스튜디오


<오늘도 평화로운>은 다양한 영화를 인용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첫 장면은 무성영화처럼 '오늘도 평화로운' 날을 보내는 영준을 보여준다. 극의 중간에 사기를 친 일당을 응징하고자 몽키스패너와 드라이버로 수련 또는 수리하는 영준은 <모던 타임즈>에서 가져왔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어록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도 거꾸로 인용한다.

그 외에도 <아저씨><해바리기><달콤한 인생><테이큰><원티드> 등 복수 영화와 <희극지왕><파괴지왕> 같은 주성치 영화의 오마주를 만날 수 있다. 가운데만 깎은 영준의 헤어스타일은 <아저씨>의 황당한 변형이다. 분노에 찬 영준이 사기꾼에게 전화로 <테이큰>의 명대사 "I'll find you, and I'll kill you."를 내뱉자 상대방이 "맨유?"라고 응답하기도 한다. 이런 황당한 오마주는 대사, 행동, 액션 장면 등 형태로 곳곳에서 펼쳐진다.

언어유희도 재미있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진지한 자막에 황당한 영어 나레이션을 입혀 웃음을 준 바 있다. 예를 들면 "승리의 신이 함께하는 것 같았다, 시발놈은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다"는 자막을 "마이클 조던, 저스트 두 잇"으로 표현했다. <오늘도 평화로운>은 얼토당토않은 사자성어를 말하곤 중국어라고 우긴다. "자네 죽을 뻔 했어"를 "구사일생"이라고 말하는 건 약과다. "(정체를) 알면 다친다"는 "신비주의" "자네 칼 쓸 줄 아나?"는 "사무라이?"라고 뻔뻔하게 던진다.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의 한 장면 ⓒ 꾸러기스튜디오


<오늘도 평화로운>에서 백승기 영화 스타일의 명암이 모두 나타난다. 제작부터 개봉까지 이어진 감독의 뚝심, 개봉을 가능케 한 두터워진 마니아층, 부천영화제의 꾸준한 관심, 국악을 곁들인 흥겨운 액션 장면 연출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부정적인 면을 보자면 코미디의 독창성은 SNL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평범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연결도 작은 콩트를 억지로 연결한 듯 매끄럽지 않다. 코미디의 독창성과 이야기의 밀도만 놓고 보면 전작이 준 '개이득'에 못 미친다.

백승기 감독은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영화로 장난치냐는 시선도 있지만, 나만의 예술적인 표현 열망은 분명 있다"며 "꾸러기도 어른이 되겠지만 그 정신은 일고 싶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오늘도 평화로운>은 '예술적인 표현 열망'으론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뻔뻔함이란 '꾸러기 정신'이 살아있기에, 그가 영화 만드는 재미를 잃지 않았기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화면에서 느껴지기에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된다. 차기작으로 예고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에선 한층 성장하고 개이득한 느낌을 주는 C급 무비를 만나고 싶다.
오늘도 평화로운 백승기 손이용 민지혁 박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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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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