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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하지만 '독일의 중심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선뜻 베를린이라고 답하는 독일인들은 많지 않을 듯하다. 베를린은 수도로서 정치적, 대외적인 중심지일 뿐, 모든 독일을 대표하진 못한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내로라는 독일 기업들의 본사는 독일 전역에 고루 흩어져 있다. 예컨대,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인 메르세데스 벤츠의 본사는 독일 남부의 슈투트가르트에, 폭스바겐은 지방의 소도시인 볼프스부르크에 있다. 베엠베(BMW)와 세계 최고의 가전업체인 지멘스는 뮌헨에, 명실상부 세계 1위의 자동차 부품업체인 보쉬는 남서부의 시골 마을인 게를링겐에 터를 잡고 있다.

또, 화장품 업계의 대표주자인 니베아의 본사는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 있고, 세계적인 화학 기업 오펠은 프랑크푸르트와 이웃한 소도시 마인츠에 있다. 그런가 하면, 의약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바이엘은 고작 인구가 15만 명에 불과한 레버쿠젠에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젤리의 대명사 하리보조차 옛 서독의 수도였던 라인강변의 소도시 본에 자리하고 있다.
 
인구가 80만 명 남짓인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을 넘어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독일 내 최고층 빌딩이 죄다 모여있다.
▲ 유럽의 중심, 프랑크푸르트 인구가 80만 명 남짓인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을 넘어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독일 내 최고층 빌딩이 죄다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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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와 30분 거리에 있는 본에는 젤리 과자의 대명사 격인 하리보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
▲ 옛 서독의 수도 본에 자리한 하리보 본사 프랑크푸르트와 30분 거리에 있는 본에는 젤리 과자의 대명사 격인 하리보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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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금융의 중심지는 단연 독일 중부의 거점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다. 유로화를 발행하는 유럽중앙은행이 위치하고 있으며, 독일 최대의 금융 기업인 코메르츠 방크 본사도 인구가 70만 명 남짓에 불과한 이곳에 있다. 독일의 손꼽히는 최고층의 첨단 빌딩이 죄다 프랑크푸르트 도심에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을 넘어 유럽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모든 도시와 연결되어 있는데, 정작 수도인 베를린으로 가는 직항 편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일을 여행하려면 일단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야 한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내 다른 나라를 여행하려고 해도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게 보통이다.

유럽의 어느 나라를 여행하더라도 대개 수도가 관문이다. 프랑스는 파리를, 영국은 런던을,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당연히 마드리드와 로마를 통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유독 독일만은 예외인 이유가 뭘까. 유럽 대륙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교통 통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가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설득력이 약하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도시 비텐베르크는, 우리로 치면 읍면 단위의 소도시이지만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중심지이다.
▲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도시 비텐베르크는, 우리로 치면 읍면 단위의 소도시이지만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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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금융 등 경제 분야만 분산되어 있는 건 아니다. 독일 내 대학의 경우엔 애초 의도적으로 궁벽한 시골을 찾아 설립했다고 의심이 될 정도다. 아예 '대학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곳을 살펴보면, 하이델베르크, 괴팅겐, 튀빙겐, 뮌스터, 프라이부르크, 바이마르 등 공교롭게도 인구가 매우 적고 교통이 불편한 곳들 일색이다.

대도시인 베를린과 뮌헨에 자리한 훔볼트 대학과 자유 대학, 뮌헨 공대 등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시골 학교'들이다. 하지만 꾸준히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분야별로 나름의 일가를 이루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곳이다. 사람들에게 도시의 이름보다 대학이 먼저 알려진 곳으로,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학구적인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대학 등록금이 거의 없는 독일에서 대학 간의 서열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적 경험을 쌓은 뒤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 재학생의 성적과 수준을 동질적으로 비교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력에 따른 급여 차이가 적다 보니,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진학하는 이들이 많아 끊임없는 타 학교와의 비교를 통해 학습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학사 관리가 매우 엄격하기로 소문난 독일의 대학에서 한가하게 '서열 놀이'를 할 겨를도 없다. 공부를 소홀히 해서 한 학기라도 낙제점을 받았다간 자칫 퇴학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대학들이 수여한 학위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 중의 하나다. 그들에겐 대학의 소재지가 베를린이냐, 지방이냐를 따지는 건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곰의 도시'라는 뜻인데, 시청사 꼭대기에는 곰이 그려진 상징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 베를린 시청과 TV타워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곰의 도시"라는 뜻인데, 시청사 꼭대기에는 곰이 그려진 상징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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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독일 연방정부 산하의 공공기관도 수도인 베를린에만 모여 있지 않다. 경제, 환경, 교통, 세무 등 분야별로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 본 등에 골고루 분산되어 있다. 냉전 시기 30여 년 동안 서독의 수도였던 본을 찾았을 때 여전히 유엔 대표부가 남아 있으며, 연방 의회와 중앙 세무청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그렇다고 소통이 어렵고 시간 낭비가 초래되어 정부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적어도 독일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외려 공공기관의 분산이 각 지방의 경제적 자립도와 문화적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도시로의 인구 유출을 막고 지방의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다는 판단이다.

곧, '독일의 중심지'는 여럿이다. 관점에 따라서 수도인 베를린일 수도 있고, 북쪽인 함부르크나 남쪽의 뮌헨일 수도 있으며, 괴팅겐이나 튀빙겐 등 지도에서 찾기 힘든 도시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름의 분야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각 도시마다 독특한 경관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16개 연방으로 구성된 독일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역사적으로 독일이라는 이름의 통일 국가가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일부는 10세기 말에 건국된 신성로마제국으로 올려 잡기도 하지만,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한 통일을 실질적인 독일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우리로 치면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해당하는 1871년이니 기껏해야 150년쯤 되는 셈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독일은 봉건적인 관습 속에 제후들이 통치하는 소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16세기 경 종교개혁 이후 이른바 '30년 전쟁'이 벌어지면서 지역할거 양상은 더욱 강해졌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시작된 북부의 개신교 세력과 남부의 가톨릭 세력의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당시 인구의 3할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지역할거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어느 지역을 가든 시청 등 공공기관 입구엔 독일 국기를 포함해 서너 개의 깃발이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연방 국가답게 주를 상징하는 깃발과 독일 국기, 그리고 파란 바탕에 별로 원을 그린 유럽연합 깃발이 순서대로 게양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 등 몇몇 곳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깃발까지 함께 걸려 있기도 하다.

국가 간 축구 경기보다 지역 연고팀 간에 벌어지는 경기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도, 거대 자본의 유명 브랜드 맥주가 고유의 지역 맥주에게 고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역의 방송국에서는 2부 리그라도 해당 지역 연고팀의 경기를 우선 중계하고, 지역 맥주만 판매하는 식당과 카페도 많다. 축구와 맥주를 '지방의 자존심'이라고 명토박는 이가 있을 정도다.
 
금속활자로 유명한 구텐베르그의 도시, 마인츠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중세도시의 느낌이 강하다.
▲ 마인츠 시내 풍경 금속활자로 유명한 구텐베르그의 도시, 마인츠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중세도시의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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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더(Lander) 티켓'이라고 불리는 할인 승차권도 동일한 주 내에서만 통용된다.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주가 다르면 교통 요금이 턱없이 뛴다. 예컨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는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팔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지만, '랜더 티켓'을 쓸 수 없다. 그래선지 베를린은 뮌헨 사람보다 런던이나 파리 사람들이 더 자주 찾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지방 분권의 전통이 뿌리 깊은 나라이다 보니, 주 의회가 연방 정부의 정책에 대놓고 반기를 들기도 한다. 연방 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주와 주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갈등을 조율하는 것 정도로 여겨질 때도 있다. 대다수 독일인들은 자신의 삶에 '총리'보다 '시장'이 더 중요하다고 이구동성 말한다.

이러한 연방 국가 독일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러모로 독일과는 정반대인 우리의 참담한 현실이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다. 모든 기업과 대학, 금융기관 등이 서울에 집중되어 블랙홀처럼 지방의 인구를 빨아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오늘도 서울을 향한 갈망은 식을 줄을 모른다.

십여 년 전 행정수도를 세종으로 옮기는 문제로 온 나라가 사분오열됐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관습 헌법'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되레 갈등을 부채질했고, 서울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더욱 굳어져갔다. 혁신도시가 건설되어 공공기관의 일부가 지방으로 이전될 때도 비슷한 갈등이 재현됐고,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만 횡행하는 사회로 전락했다.

물론, 독일과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없는' 독일의 모습을 통해 우선 다음과 같은 그릇된 사고방식이라도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이는 우리가 초등학교 역사 수업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탓에 그 역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항상 참인 명제' 같은 것이었다.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왕권이 강화되면 태평성대가 이어지는 전성기이고, 지방분권화가 전개되고 왕권이 약화되면 혼란과 분열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다.'

태그:#독일 여행,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비텐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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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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