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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발언하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황교안 대표.
▲ 공개발언하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황교안 대표.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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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말이 도를 넘고 있다.

지난 1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김정은 수석대변인' 비유를 든 데 이어, 14일 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국민이 반민특위로 분열됐던 것을 기억할 것"이라며 비운의 친일청산 기구인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국론분열 혐의까지 뒤집어씌웠다. 역사 모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언이다.

나 원내대표는 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반민특위 활동은 당연히 제대로 됐어야 한다, 반민특위 활동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라며 한 발 물러섰지만, 반민특위를 부정적으로 폄하한 것은 사실이다.

비운의 반민특위... '친일파 0명'이 된 대한민국 
 
 반민특위의 재판.
 반민특위의 재판.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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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1948년 헌법 제101조에 근거해 만들어진 기구다. 이 헌법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사실, 특별법의 제정 필요성은 미군정 시기(1945~1948)에도 제기됐었다. 미군정 시기의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1947년 7월 2일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를 제정한 일이 있다. 하지만 미군정의 거부로 무산됐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당시만 해도, 미국은 중국과 연합해 소련을 견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리자, 중국에 대한 미련을 거두고 일본과의 동맹을 저울질하게 됐다.

미군정이 위 특별조례를 거부한 것은 한국에서의 친일 청산이 미일동맹과 소련 견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미국의 거부로 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해방 3년이 지난 뒤에야 반민특위가 출범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한 지 1개월여 뒤인 1948년 9월 22일, 반민특위의 법적 근거인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거해 10월 12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반민특위가 공식 활동에 착수한 것은 이듬해였다. 1949년 1월 5일,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있었던 중앙청 205호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3일 뒤 친일 기업가 박흥식을 체포하는 것으로 반민특위가 본격 가동됐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민족적 열망 및 헌법 조문에 근거해 출범했다. 친일 청산을 완수하고 한국인을 위한 한국을 세우고자 등장했다. 하지만, 성과는 거의 내지 못했다.

1997년에 한국민족운동사학회가 발행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7권에 실린 역사학자 이동일의 '1948~49년 반민특위의 구성과 피의자 기소 내용에 관한 분석'에 따르면, 1949년 10월 해체 때까지 반민특위에 입건된 사건은 총 682건이다. 그중 검찰에 송치된 것은 559건이다. 그리고 재판이 종결된 것은 고작 38건이다.

38건 중에서 형벌이 선고된 것은 12건에 지나지 않는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가 4건, 징역 2년에 집행유예가 1건, 징역 1년이 3건, 징역 1년 6월이 1건, 징역 2년 6월이 1건이다. 그리고 무기징역과 사형이 각 1건이다. 독립투사 유관순이 받은 3년형보다 센 형벌은 무기징역과 사형뿐이었다.

하지만 무기징역 및 사형을 포함해 나머지 형벌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1950년 봄까지 전원 석방됐다. 그뿐 아니다. 복권 조치까지 받아 명예를 다 회복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공식적으로 한 명도 없는 나라가 됐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친일파, 반민특위 제동에 나서다 
 
 반민특위 당시 체포됐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미군정 하에서 다시 살아나 좌익계열 인사들을 무지막하게 고문했다.
 반민특위 당시 체포됐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미군정 하에서 다시 살아나 좌익계열 인사들을 무지막하게 고문했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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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된 것은 미군정이 '친일청산은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와의 협력 필요성 때문에 반민특위를 방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 자신들이 극렬히 저항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굳게 믿었던 걸까.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에 제동을 걸고자 테러까지 준비했다. 반민특위가 중앙청 205호에 입주하기도 전에 이들은 행동을 준비했다. 반민특위보다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이런 모의에 참여한 인물 중 하나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다. 지금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상대로도 고문을 자행한 인물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나열된 친일 행적 중 하나는 이렇다.
 
"같은 해(1929년) 12월에는 동래고등보틍학교 학생 문재순·추학·차일명 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고문을 자행했다."
 
구속자 석방을 주장하고 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고문까지 자행했던 노덕술. 그런 그가 반민특위 와해 공작에 참여했던 것이다. 노덕술 등은 독립운동가인 신익회 국회의장 등이 포함된 15명을 처단 대상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행동대장 백민태의 자수로 무산되고 말았다.

노덕술 등의 계획은 무산됐지만, 다른 친일파들의 작전은 성공했다. 이들은 반민특위를 상대로 가공할 테러를 감행했다. 1949년 3월 19일에는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경찰이 반민특위 강원도 지부 김우종 조사부장을 향해 총을 쐈고, 6월 3일에는 친일파 시위대가 반민특위 본부를 공격했다. 이런 공격을 계속 받다가 반민특위는 결국 해체됐다.

1948년 "동족간 화기 손상케 하는 반민법"과 2019년 "국론분열" 
 
 1948년 9월 24일 치 '경향신문'이 보도한 반공구국 총궐기 국민대회 기사.
 1948년 9월 24일 치 "경향신문"이 보도한 반공구국 총궐기 국민대회 기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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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은 무장 공격뿐 아니라 언어 공격도 가했다. 친일청산 지지자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삐라(불법선전물)를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했다. 1948년 8월 27일에는 친일청산 반대자들이 국회 방청석에 나타나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뿌리기도 했다. 

친일파들은 친일청산에 대대적인 맞불을 놓고자 '반공구국 총궐기 국민대회'까지 개최했다. 반민법이 공포된 1948년 9월 23일, 그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부끄러운 집회를 열었다. '친일청산반대 국민대회'라고는 할 수 없으니, '반공'이란 말을 붙인 것.

그 가운데 두각을 보인 인물 중 하나가 이종형(1895~1954)이다. 조선총독부 경무부 촉탁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체포하는 데 가담한 인물이다. 이종형은 반민특위가 와해된 이듬해 1950년 국회에 진출했다. 2002년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은 '친일파 708인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바로 그 이종형이 반공국민대회를 준비했다. <대한일보> 경영자였던 그는 반민법 공포 10여 일 전부터 <대한일보>를 통해 '반민법은 망민(網民)법'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반민법은 국민을 옭아매는 법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열린 반공구국 총궐기 국민대회. 이 대회에서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했던 말과 거의 흡사한 결의문이 통과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003년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0집에 수록된 이강수 정부기록보존소 학예연구사의 논문 '반민특위 방해공작과 증인 및 탄원서 분석'에 따르면, 이 결의문에는 "동족 간의 화기를 손상케 하는 반민법을 시정하는 동시에 공산매국노를 소탕할 조문의 삽입을 요청하기로 결의함"이라는 대목이 있다.
 
 반민법 반대 집회에 앞장선 뒤 반민특위 해체 후 국회에 입성한 이종형.
 반민법 반대 집회에 앞장선 뒤 반민특위 해체 후 국회에 입성한 이종형.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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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 지지자를 공산매국노로 매도하는 한편, 반민특위가 동족 간의 화기(和氣), 즉 국론 통합을 방해한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나경원의 발언인 "국민이 반민특위로 분열됐던 것"과 흡사하다.

이종형 등의 바람대로 반민특위는 결국 와해됐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공식적으로 한 명도 없는 나라가 됐다. 이렇게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조롱과 공격을 받으며 와해된 것은 한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반민특위 해체 70주년인 2019년에 제1야당 원내대표가 반민특위의 역사를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것 역시 한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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