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거대한 무언가에 맞부딪혀 좌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가감없이 끔찍한 광경이라 시선을 돌렸는데도 여전히 똑같은 광경이 보일 때처럼 말이다. 며칠이 지나고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다 문득, 내가 봤던 끔찍한 광경이 사실은 내 주변에 이미 벌어지고 있던 일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는 마치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차별과 배제, 혐오라는 약품을 한 남자에게 주입하고 반응을 살피는 임상실험 같은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는 우연한 계기로 스스로를 계몽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고 애를 쓴다. 토니 케이 감독은 혐오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며 동시에 과거의 혐오와 차별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이 지금의 안녕과 평화를 담보할 수 없음을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를 통해 역설한다.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스틸컷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스틸컷 ⓒ 뉴 라인 시네마

 
토니 케이는 67세의 나이지만 다작과는 인연이 먼 감독이다. 영화는 단 네 편만을 연출했다. 그 중 세 편의 영화는 <디태치먼트>(2011)와 <레이크 오브 파이어>(2006), 그리고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1998)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방치된 청소년들과 낙태 문제, 인종차별 문제를 조명한 바 있다. 관객은 그의 영화를 통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거친 일인지, 그리고 세상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전한다. 또한 그럼에도 우리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현실의 냉엄한 사실을 관객은 전달받을 수 있다.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에서 주인공 데렉(에드워드 노튼)은 3년 전 강도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은 까닭이 유색인종 때문이라며 다른 인종을 향해 분노와 증오를 내뿜는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모임 DOC에 가담한 데렉은 특유의 강렬한 카리스마로 영웅이 된다. 가족은 모두 그의 모습을 걱정하지만, 남동생 대니(에드워드 펄롱)만은 데렉을 진정으로 믿고 따른다.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스틸컷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스틸컷 ⓒ 뉴 라인 시네마

 
그러던 어느날 데렉은 흑인을 사살한 죄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교도소에서 같은 백인들로부터 받은 배신과 충격으로 데렉의 신념이 허물어지고, 유색인종에 대한 자신의 분노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닫는다. 출감 이후 데렉은 과거 자신의 자취를 밟고 있는 동생 대니를 설득해 DOC를 탈퇴하게 만들지만 그들 형제에게는 보복이 기다린다.
 
말하자면, 데렉에게 인종차별에 관련된 DNA가 심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도 학교 과제 때문에 고민하고 식탁 위에서 가족들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한 백인 학생이었다. 데렉에게 씨앗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데렉을 향한 아버지의 시도는 집착과 강요가 아닌 자신의 편견에 기반한 혼잣말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데렉에게 되물림 되고, 현재 시점에 이르러 대니에게로 확산된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데렉은 자신과 가족의 궤도를 원상태로 돌려놓으려 애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동생을 구제한 후 평범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데렉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위기에 처한다.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스틸컷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스틸컷 ⓒ 뉴 라인 시네마

 
영화 속에서 토니 케이 감독의 카메라는 데렉이 계몽되기 직전까지만 그의 곁에 머물다가 떠나버린다. 이후의 삶은 데렉 자신의 책임이다. 감독은 왜 데렉을 곁에서 떠나보냈을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할 것을 다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참회를 받아들여줄 만큼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감독은 알고 있었던 셈이다. 언제나 잘못은 저지르기 쉽고 책임은 무겁다는 것을. 그 거대한 무게감의 크기 앞에서 언제나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눈물을 쏟아도, 있는 힘껏 자신을 자책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되돌릴 수도 없다. 그저, 감내하고 책임지는 일만 남을 뿐이다. 이것이 인종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메시지가 아닐까.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포스터

영화 <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의 포스터 ⓒ 뉴 라인 시네마

 
아메리칸히스토리X 혐오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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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잘 쓰진 못합니다. 대신 잘 쓰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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