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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겠단 건 다시 돌아오겠단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굳이 여행까지 가서 글을 쓰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 여행기의 의미는 어느 졸업예정자, 취준생, 여자, 집순이, '혼행러', 그리고 채식주의자가 먹방부터 감성까지 여행에서의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 돌아오겠단 거창한 선언에 있다. - 기자말

스리랑카 여행의 절반이 지나고 있다. 나는 지금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고산지대인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있다.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은 단연 다른 여행객들을 만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온 리아, 독일에서 온 줄리앙, 벤자민과 친해졌다. 어젯밤, 우리 넷은 함께 맥주를 마시러 나갔다. 스리랑카 일주일 차, 드디어 맥주다.

우리가 간 술집의 이름은 'THE PUB'으로, 이곳 누와라엘리야의 유일한 술집이다. 국민의 70% 이상이 불교신자인 스리랑카에선 술을 파는 상점도, 술집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술집 이름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 술집'인 셈인데, "우리 '그 술집'에서 만나!", "그래 '그 술집'!"이라 말해도 결국 술집은 딱 한 군데뿐이니 정말 직관적이고 재밌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스리랑카 '누와라엘리야'의 유일한 술집, The Pub
 스리랑카 "누와라엘리야"의 유일한 술집, The Pub
ⓒ 조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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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도 딱 하나뿐이다. 스리랑카 맥주인 '라이언 비어'(lion beer)'다. 깔끔한 맛의 이 맥주는 엄청 특별하진 않아도 무난하게 맥주의 시원함과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온 줄리앙이 "it's cool"을 연발했고 우리는 건배와 함께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벤자민이 테이블에 올려둔 내 여권 가방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달아둔 휘슬을 본 것이다. 나는 왠지 민망해져 엄마가 걱정이 많아서 준 것이라 말하곤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리아가 말했다.

"스리랑카에서 이렇게 밤에 밖에 있는 것도, 술집에 온 것도 모두 처음이야. 사실 너희 둘(남성인 줄리앙과 벤자민)을 만난 건 나와 윤진에게 행운이야. 만약 나 혼자였다면 절대 오지 못했을 테니까. 그건 윤진도 마찬가지고. 짜증 나지만, 이게 여성의 현실이거든."

말을 마친 후 어깨를 으쓱하는 리아의 표정이 씁쓸했다. 그건 정말 맞는 말이었다. 캔디, 담불라 등의 도시에도 역시 술집이 한두 개쯤 있었지만 해가 진 후 여성 여행객 혼자 술집에 가는 것,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안전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비단 스리랑카만의 일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물론 남성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말일 테지만, 여행과 밤은 분명 여성에게 조금 더 사납다. 리아가 문득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보여줬다.

"전 애인과의 커플링이긴 한데, 여자 혼자 여행할 땐 이렇게 반지를 껴서 결혼한 척 해야겠더라고. 그래서 끼고 왔어."

어쩜... 나도 그랬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반지를 챙기며 내가 오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방엔 휘슬, 안주머니엔 휴대용 칼, 왼손엔 반지까지... 아무리 유비무환이라지만 좀 과한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나갈 땐 웬만하면 어깨나 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삼가는 것, 인상을 굳히고 다니는 것, '이미 결혼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여성 여행객의 '상식'이었다.

그건 내게도, 리아에게도, 술집에서 만난 다른 여성 여행객 조지와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국적도, 나이도, 여행 기간도, 다음 목적지도 모두 달랐지만, 이것들은 혼자 다니는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상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지난 일주일, 내게 호의를 베푼 서너 명의 남성들은 항상 내게 sns아이디와 전화번호를 요구했다. 뭣도 모르고 번호를 주자 그때부터 하루에 몇 번이고 전화와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여행객과 친해지고 싶어서'라기엔 분명 과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요구들은 리아에겐 있었지만 줄리앙과 벤자민에게는 아니었다. 문득 그간 스리랑카에서 받았던, 앞으로 내게 올 모든 호의들이 조금 두려워졌다. 그 어떤 선의에도 선뜻 마음을 열 수 없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그날 밤, 우리 넷은 '그 술집'에서 만난 다른 여행객과 다음 날 또 만나기로 했다. 술을 자주 즐기지 않음에도 그러기로 한 것은 나도, 리아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혼자 여행지의 밤을 밖에서 즐길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기꺼이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여행객들과 헤어지며 우리는 인사했다.

"잘 가! 내일 밤, 그 술집(the pub)에서 또 만나!"

태그:#스리랑카, #여행,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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